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11 / 32쪽 · 한 쪽 20개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모습
설교자는 야고보서 5장 7절의 농부를 길이 참음의 본보기로 소개합니다. 유대 농경 배경에서 농부는 가을 무렵 씨를 뿌리고 봄 무렵 수확하는데, 씨를 뿌릴 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오랫동안 씨가 자라기를 고대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이 '길이 참으라'는 말씀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길이 참는다는 것은 스스로 서둘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인정하며 판단을 유보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길이 참으라'가 세 번 반복되고, '굳건하게 하라'는 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의 굳건한 마음과 같은 단어라고 짚습니다. 이를 근거로 설교자는 인내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가 인내로 시작해 인내로 마무리되고, 인내를 통해 신앙의 여러 요소가 균형 있게 세워져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점도 덧붙입니다. 그래서 성도도 농부가 열매를 바라보듯 재림의 때를 바라보며 인내의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아브라함과 모세가 오래 기다린 시간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셨던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다가 25년 후에 열매를 맺었다고 설명합니다. 모세 역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기다림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결국 열매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과정에서 원망과 불평을 입술로 쏟아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원망을 쉽게 주변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마음의 한탄과 비탄을 하나님께 가져갈 때 그분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시험을 앞둔 수험생의 오래 참음
설교자는 인내를 결과를 앞둔 시간으로 설명하며, 시험을 앞둔 수험생을 예로 듭니다. 수험생은 합격이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참으며 힘겹고 많은 수고가 요구되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인내는 유쾌하지 않은 시간일 수 있지만, 바로 그 과정이 열매로 이어지는 단계라고 말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 오래 참음으로 시작한다는 말씀과,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오래참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을 함께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인내의 과정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지금 이 시간도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고 격려합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믿음으로 버티며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적용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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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1년 후 이익을 기대한 상인과 아침 안개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 한 마을에 가서 장사하며 1년 후에는 큰 이익을 보리라 기대했던 상황을 예로 듭니다. 이 예화는 사람이 미래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재단하려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원망과 맹세가 결국 미래를 내 뜻대로 정하려는 교만에서 나온다고 해석합니다. 이어서 야고보서 4장 14절의 말씀, 곧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인생은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설교자는 아침 안개가 몇 시간 지나면 사라지듯 인생도 덧없다는 점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인내를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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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묵상 말씀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눈밖에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큰 일교 차이에 우리 성도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늘을 견디는 소망의 인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낸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 다 아시죠, 여러분? 그래서 그 믿음, 그 오늘과 미래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 믿음의 대표적인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장에는 앞절 말씀에 보면 의인이 가난한 종이 착취받고 억압받는 부자에 의해서 핍박받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인내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는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길이 참으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길이 참다는 것은 스스로 바로바로 적시적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길이 참을 때에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들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이 바로 농부들인 것이죠.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따라서 그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죠. 이 유대 어 배경에서 농부들은 파종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계절로 따지면 한 10월쯤 됩니다. 10월 전으로 해서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고요. 그리고 수확기 한 4월쯤 됩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그때 전으로 수확을 하게 되는데 씨를 뿌릴 때에 그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씨가 그 비에 의해서 자라나기를 고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길이 참으라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시작할 때 인내와 기도의 말씀으로 시작했다가 또 마지막도 오늘 인내의 말씀이고 내일 또 나눌 말씀인 야고보서 다음 장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을 했었죠. 1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리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또 이렇게 인내에 관한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앙에 여러 요소들이 있거든요. 신앙에도 여러 요소들이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균형 있게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죠. 성을 향해서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온전하게 준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말씀으로는 그렇죠.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뭐 좀 편하게 설명하자면 복받을 그릇이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데 인내를 통해서 그 받을 그릇이 더 넓어지고 빈틈 없어지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오늘 두 점 말씀에서 무려 세 번이나 길이 참으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굳건하게 되어서 굳건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굳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는 그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보하게 되어서 마음을 고정시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굳건하게 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고정시켜서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 인내는 여러분, 소극적이거나 그냥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아주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의 열매 우리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보면 첫 번째 해당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 다른 것 많이 있지만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드리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보면 그 성령의 열매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오래참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여러 가지 열매들이 많이 있지만 오래참음의 열매, 오래참음이 바로 인내가 바로 열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오래 참는 상황은 그렇게 결과를 좋은 결과를 맺어지는 때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앞두고 인내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힘겹고 또 많은 수고가 요구되어지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는 단계가 바로 인내 오래 참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많은 분들 중에서 인내의 열매 과정 중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이 시간도 열매 맺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최종적인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최종 시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공의가 세워지고 모든 정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많은 성도들처럼 우리는 길이 참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 두 번째는 인내는 오늘 야고보서에 보면 많은 언어의 교훈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내는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언어의 표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금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데요. 첫 번째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원망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9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요. 그 단어는 한탄하다. 또 두 주변 사람에게 비탄을 고백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원망, 불평, 좌절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 오늘 본문 문맥상으로 보면 어떤 부자에게 그런 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을 가지고 주의 형제들에게 와서 원망, 불평, 힘든 말,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형제들 내에서는 또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원망하지 말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 그 한탄하는 마음, 비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죠.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는 바로 원망이 아니라 있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그랬고요. 25년 동안 출산되지 못하게 하다가 25년 후에 열매 맺지 않습니까? 모세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원망 불평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내로 버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말씀, 우리 1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여러분, 맹세하는 것은 또 다른 그 원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내가 재단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를 내가 재단하려고 하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하나도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앞장 4장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어느 마을로 가서 장사하여 1년 후에는 많은 이익을 보리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죠? 4장 14절 말씀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런데 그 안개는 몇 시간 지나면 오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는 그런 안개와 같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죠. 원망을 하지 말고 맹세를 하지 말라.
산상설교의 맹세 금지 말씀
설교자는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본문, 마태복음 5장 34절에서 37절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땅, 예루살렘, 그리고 자기 머리로도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며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걸고 맹세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 따라 그렇다고 할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말하라는 본문의 권면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원망과 맹세가 함께 엮여 있으며, 둘 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인내는 때로 침묵이나 잠잠한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형제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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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한 입술로 나오는 범죄,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산성 설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에서 37절 사이에 보면, '너희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그냥 맹세하지 말라를 떠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요.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에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 너희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 아무도 머리 한 털이라도 검게하거나 희게 하는 것이 너희 속관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처럼, '너희는 그냥 예라고 할 내용은 예라고 하고, 아니요라고 할 말씀은 아니요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지 못하는 현상에서 원망과 맹세를 함께 엮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내는 때로 침묵일 수도 있고, 잠잠히 기도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공동체를, 형제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선지자들이 겪은 고난
설교자는 야고보서 5장 10절에서 형제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던 선지자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짚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을 예로 들며, 아브라함, 모세, 다윗도 모두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고 그 결말을 보여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도 주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합니다. 설교자는 이들의 삶을 통해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를 수 있으나, 그 고난을 오래 참고 견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3–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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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째는 인내의 끝에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결말이 있습니다. 인내의 결말을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인내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인내 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결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10절 말씀을 읽어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던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만 보더라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모두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자들로, 그 결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도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살았던 많은 자들에게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욥의 인내와 그가 받은 결말
설교자는 욥의 이야기를 통해 인내와 하나님이 주신 결말을 설명합니다. 욥은 천상에서 있었던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명백하게 알지 못한 채 소유와 몸에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라'라고 고백하며 끝까지 버텼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욥이 중간에 한탄하고 친구들에게 원망하며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지만, 큰 흐름에서는 인내했다고 봅니다. 욥기 19장 25절과 26절의 대속자에 대한 고백은 부활 신앙을 보여 주며, 인내의 과정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열매가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욥의 마지막 결말을 통해 인내 끝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적용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로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조시환 · 2026-10-23
설교 내 4–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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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인내한 자를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인내의 신학이 있습니다. 1장 12절 말씀에 보면, '시험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뎌내는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내의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하나님께서 예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예로 든 욥의 인내를 보았습니다. 욥의 인내는 어떻습니까? 욥은 천상의 대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명백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온전하고 순전하고 정직하여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이 세상에 욕 같은 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자,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와 몸을 치셨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도 욥은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라'고 고백하면서 끝까지 버텼습니다.
물론 욥은 중간중간 생애를 한탄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강하게 원망하기도 하였으며,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욥은 인내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욥기 16장 19절 말씀을 보면, '이제 나의 정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인내 과정 중에서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 중보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욥기 19장 25절과 26절 말씀을 보면,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며, 내 가족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부활 신앙을 소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내의 과정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런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11절 하반절에 보면, '주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원어적 표현은 '많은 창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민이나 긍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로우셔서, 욥이 부분적으로는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할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100% 완전하게 신뢰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욥의 인내를 인정해 주시고, 그 과정 속에 많은 하나님의 열매를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결말은 어떻습니까? 42장 말씀에 보면, 친구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욥이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욥의 소유물이 두 배가 되었고, 예쁜 자녀들도 많이 두었습니다. 그러나 욥기 42장 맨끝절 말씀은 '용이 죽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욥의 결말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인내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최종적으로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열매를 맺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곳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러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위중한 아버님께 전한 복음과 손을 잡은 응답
설교자는 한 성도의 아버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 사정으로 직접 찾아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먼저 복음의 내용을 정리해 성도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성도는 아버님 곁에서 그 복음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드렸는데, 아버님은 위중한 상태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고 소리를 듣고 몸으로만 반응할 수 있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모두 나눈 뒤, 평소 무뚝뚝했던 아버님과 아들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기운이 있었다. 그때 성도가 아버님께 믿으시면 제 손을 꽉 잡아 달라고 부탁했고, 아버님은 그 말에 손을 꽉 잡아 주셨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한 번도 복음을 전해 본 적 없는 성도가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전한 순간이었다고 나누었다. 성도는 아버님의 손에 담긴 힘을 느끼며 가슴 찬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후 아버님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요양병원으로 옮겨지셨고, 설교자는 어제 그곳을 찾아가 아버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설교자는 다시 아버님과 복음의 이야기를 이어 가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를 마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하자, 아버님도 잘 표현하지 못하시지만 아멘으로 응답하셨다. 함께 간 성도와 그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그 시간을 보냈다. 설교자가 장난스럽게 어떤 아들이냐고 묻자, 아버님은 '내게 가장 소중한 아들'이라고 답하셨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해서 전하셨다고 한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강조했다. 그리고 믿지 않는 부모나 가족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거창한 말이 아니어도 예수님이 나를 붙잡아 주셨다는 고백부터 용기 내어 말하기를 권면했다.
은주성 · 2026-10-23
설교 내 3–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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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성도님의 아버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원 사정상 제가 직접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도님께 아버님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복음의 내용을 이렇게 만들어서 카톡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도님이 아버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슴 복잡한 마음으로 저하고 통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보내 주신 그 복음의 내용을 아버지 곁에서 다 읽어 드렸습니다. 위중한 상황이라서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소리는 듣지만 몸으로 좀 표시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복음을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 나누고, 아들과 아들, 아들과 아버지 서먹서먹한 관계 속에서, 아버님 믿으시면 제 손 꽉 잡아 주세요. 그랬더니 그 무뚝뚝했던 아버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손을 꽉 잡아 주셨다는 거예요.
한 번도 복음을 전해 보지 못했는데, 그 위중한 상황 가운데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맘대로 전했고, 그렇게 아버지의 그 손에 힘을 느끼면서 가슴 찬 마음으로 목사님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어, 아버님께서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다고 요양 병원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만나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과 인사를 나누고, 아버님과 함께 그 복음의 이야기를 또 나누고, 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니까 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아멘 말씀하십니다. 함께 갔던 우리 성도님, 성도님의 아내분, 그 눈물에 흘리면서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그 시간 그리고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 아버님께서 이렇게 표현을 잘 못 하시는데 저에게 좀 장난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막 물어봤어요. 아버님이 아들, 어떤 아들이에요? 이렇게 물어봤거든요. 근데 연세 많으시니까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뭐라고 하셨다고요? 내게 가장 소중한 아들요. 그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리고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호, 뭐라고요? 고맙다고요. 고맙다. 고맙다.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할 수 있는 귀한 일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자리에요. 아, 믿지 않는 부모님이 생각나시는 분들, 가족들이 생각나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기도한 다음에는요. 용기 내어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기를 축복합니다. 거창한 말이 아니어도 됩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셨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내게 새 생명 주셨어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면 참 행복해요. 그 비밀을 함께 말하며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주말이 심심하다는 말을 기회로 삼은 운동 친구 전도
다락방 모임에서 한 성도가 최근 네 명을 전도했다고 나누었는데, 함께한 여섯 명 가운데 다섯 명은 거의 모태 신앙이었고 한 명만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었다. 모태 신앙인들이 부럽다는 말이 오가던 중, 그 성도는 이번 주 주일에 한 분을 더 교회에 초대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설교자가 어떻게 전도하게 되었는지 묻자, 함께 운동하는 분이 대화 중에 주말에 심심하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성도는 그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는 곳으로 교회를 소개했다. 교회에 가자고 권하자 상대방은 간다고 응답했고, 예배를 마치면 맛있는 밥을 사겠다는 제안에도 좋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교회에 오기로 약속했다. 설교자는 주말이 심심하다는 가벼운 표현을 지나치지 않고 붙잡은 그 성도의 모습이 참 귀하다고 여겼다. 안 심심하게 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와 예수님을 소개한 그 걸음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고 나누었다. 일상의 작은 대화 속에서도 기회를 알아보는 성도의 모습을 설교자는 격려했다.
은주성 · 2026-10-23
설교 내 7–7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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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늘 다락방 신방을 갔거든요. 함께 한 이렇게 여섯 명 정도 모였는데요. 놀랍게도 한 다섯 분이 거의 모태 신앙인 거예요. 교회에서 막 놀면서, 교회에서 순박꼭질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지내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이 이제 성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니신 분들이 부럽다고. 근데 목사님, 저 네 명 전도했어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 제가 깜짝 놀랬어요. 네 명이라는 숫자가 적지 않잖아요. 그리고 목사님, 저 이번 주 주일에요. 한 분 더 교회에 초대하기로 했어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궁금해서 물어왔습니다. 어떻게 전도하게 되었어요? 같이 운동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이렇게 대화 중에 주말에 심심하다 그 표현 하신 거예요. 주말에 심심하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안심하게 해 드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안심한 곳이 있다고 어디요? 교회요. 교회. 교회 가자. 그 교회 가자 했는데 어, 그래요. 간다는 거예요. 그 교회 마치고 나면 맛있는 밥 사 주겠다고. 좋다고. 그리고 다음 주에 이번 돌아오는 주일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근데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참 귀하다. 그 주말에 심심하다는 표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잡는 거죠. 심심해. 안 심심하게 해 줄게. 교회 예수님을 소개해 주시는 그분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수능을 앞둔 아들을 위한 쪽지와 빌립보서 4장 말씀
지난 주일 본당 앞에서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여성 성도의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설교자를 찾아왔다. 아들은 수능을 준비하며 기숙학원에 들어가 수능 때까지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날이 마지막 주일이라고 했다. 설교자는 그 청년이 소년부 시절 함께 지냈던 친구였기에 기도 요청을 받게 되었다. 설교자가 무엇으로 기도해 줄지 묻자, 청년은 쭈뼛거리며 마음이 불안하니 그 불안하지 않도록,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설교자가 그 말씀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자, 그 구절은 빌립보서 4장으로 어머니가 아들에게 쪽지에 적어 준 말씀이었다. 설교자는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을 함께 읽으며 말씀의 내용을 나누었다. 이 장면에서 설교자는 기도하는 어머니는 다르다고 느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한 뒤에도 끝났다고 여기지 않고, 불안한 아들의 마음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기회를 찾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작은 쪽지에 말씀을 적어 전했고, 설교자는 수능을 27일 앞둔 시기가 불안한 자녀에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기회라고 보았다. 그 기회를 통해 자녀의 삶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 후에도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자고 권면했다.
은주성 · 2026-10-23
설교 내 9–1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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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이었습니다. 본당 앞에서 성도님들과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한 여 성도님 어머님께서 아들을 데리고 저에게 왔습니다. 그 아들이 이제 수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숙학원에 있는데 오늘이 마지막 주일이고, 이제 기숙학원에 들어가면 수능 볼 때까지 못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 기도해 달라고. 근데 그 친구는요. 제가 5학년, 6학년 때 소년부에서 같이 즐겁게 보냈던 친구입니다. 그 알고 있는 친구니까 기도해 달라고 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저는 그냥 기도 안 해 주거든요. 뭐라고 했냐면, 목사님이 뭐라고 기도해 줄까? 이 물어봐요. 근데 그 아들이 이렇게 쭈뼛이, 목사님, 제 마음이 좀 불안한데, 그 불안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목사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그 말씀 따라 좀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을 하는 거예요. 야, 네가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 그 빌립보서 4장 말씀이잖아요. 그러는 거예요. 봤더니 엄마가 아들에게 쪽지에 적어 주신 거예요. 빌립보서 4장 몇 절요? 6절, 7절. 그 쪽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번 읽어 볼까요? 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시작.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거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그 이야기를 이렇게 들으면서 그 엄마도 참 귀하고, 그 아들도 참 귀하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아, 기도하는 어머니는 다르구나. 기도한 다음에, 어, 나 자녀를 위해서 기도 다 했지 끝나지 않는 거예요. 기도한 다음에 뭐요? 그 불안한 아들의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할까요? 기회를 찾는 거죠. 그리고 조그만한 쪽지에 그 말씀을 적어서 전해 주는 것입니다. 수능이 27일 남았습니다. 네. 우리 자녀들 마음이 어떠할까요? 어떠할까요? 좀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이때가 어느 때라고요? 기회입니다. 기회입니다. 기도한 다음에 끝났다 아니고요.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자녀에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통해 우리의 자녀들의 삶 가운데에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말하는 대화
설교자는 요리할 때 소금을 적당히 넣고 한 숟가락 떠서 간을 보는 모습에 빗대어 말하는 법을 설명했다. 소금이 너무 적으면 싱겁고 너무 많으면 음식을 망치듯, 말도 상황에 맞게 적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내용을 말해도 상대를 무시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고, 교회에 나오라고 권하면서도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수 있음을 짚었다. 그래서 바울이 말을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내듯 하라고 한 표현을 주목했다. 설교자는 대화에서의 간보기를 사람을 떠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지금 마음이 짠지 신선한지 파악하는 일로 풀이했다. 음식에 간을 보는 일이 중요하듯 대화에서는 경청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소금은 조금만 넣어도 음식 전체의 맛을 바꾸듯, 긴 설명보다 짧은 위로의 말 한마디가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고 나누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말했느냐가 아니라 내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맛있게 남느냐라고 정리했다. 전도에서도 교회가 낯선 사람, 교회에서 상처받아 마음이 닫힌 사람, 질병이나 죽음 앞에서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묻는 사람,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궁금한 사람 등 각 사람의 상황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맞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적용했다. 설교자는 사복음서의 예수님이 사람마다 상황을 살피며 그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신 모습을 본받자고 권했다.
은주성 · 2026-10-23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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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옳은 내용을 말한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오라고 권하면서 상대방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하라고 하면서 아주 독특한 표현을 쓰고 있죠.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그 소금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왜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요? 소금은 우리가 언제 사용하죠? 요리할 때 사용합니다. 국을 끓일 때, 반찬을 만들 때 소금을 얼만큼 넣습니까? 적당히 넣죠. 많이 넣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많으면 큰일 납니다. 너무 적게 넣으면 싱겁고, 너무 많이 넣으면 음식을 망칩니다. 그래서 요리하면서 소금을 이렇게 적당하게 놓습니다. 그리고 요리하면서 한 숟가락 떠 가지고 이렇게 먹잖아요. 간을 봅니다. 간혹 요리하면서 간을 안 보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간은 꼭 봐야 됩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간을 보고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간보는 이야기를 왜 했냐면요. 대화 중에서도 간을 보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떠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음의 상태가 짠지 신선한지 파악하는 것이죠. 이걸 간을 보는 것입니다. 전문 영어로는 경청입니다. 음식에 간보는 것이 중요하다면, 대화에 있어서는 경청이 중요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소금처럼 말해야 합니다. 소금은 조금만 넣어도 음식 전체의 맛을 바꿉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긴 설명보다 짧은 위로의 말 한 마디가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말을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내 말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맛있게 남느냐입니다. 그래서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을 은혜로 건네야 합니다. 소금처럼 적게 말하고, 그 말이 그 사람의 삶 속에 정말 맛있는 내 맛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6절 말씀을 보니까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으로 맛을 내는 사람, 잘 듣는 사람, 꼭 필요한 말을 은혜 가운데 하는 사람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전해야 할 대답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이 표현을 썼습니다.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각 사람에게 마땅한 대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 대답을 하려면, 각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도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낯설고 망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요?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의 질병, 때로는 그 죽음, 때로는 힘겨운 일 앞에 ‘하나님 어디 계세요’라는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나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모습이 다양한 것입니다. 그럼 첫째는, 각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어떤 짓물을 품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전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면서 그 사람에게 맞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잘 배우려면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갈 때마다 그 사람의 상황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살피시는지 모릅니다. 다 똑같은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언어로, 그 사람의 상황에 맞게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 지혜를 우리는 함께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주님, 내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해야 이 사람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내 입술을 통해서 어떻게 그 복음의 내용을 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가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소망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하나님, 그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좀 맺겠습니다. 기도한 다음에 해야 될 세 가지를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의 기회를 붙잡게 하여 주십시오. 세 번째, 소금으로 맛을 낸 것처럼 말하게 하소서. 이 세 가지를 외우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세 단어 기억해 볼까요? 비밀, 기회, 소금. 이것이면 됩니다. 이 밤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 비밀, 기회, 소금. 골로새서 4장 6절에 나와 있는 기도에 대한 내용이 이 세 가지 내용으로 풀려갑니다. 마음에 새기면서, 바울이 성도님들을 향해 기도 부탁했던 그 기도의 내용으로, 하나님, 내가 오늘 밤에 기도하기 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지만, 기도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셨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먼저 다가가야 하고, 그분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줘야 하고, 때로는 위로하고 손을 잡아 줘야 합니다. 소망합시다. 우리의 말과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비밀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한 다음에 복음을 말하고, 기회를 붙잡고, 소금처럼 말하며, 은혜로 복음을 전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루엘라의 질문에 대한 첫 반응
설교자는 아내 루엘라가 '왜 그렇게 대답했어요?'라고 물을 때 자신의 첫 반응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의 첫 반응은 종종 '하지만 당신은...'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설교자는 이것이 자신이 한 행동의 중요성과 잘못을 축소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기분이 좋고 올바른 태도로 성경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아내에게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상관없습니다. 저는 절대 당신에게 무례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첫 반응은 아니라는 점을 그는 인정합니다. 이 고백은 설교자 자신의 실제 경험으로 제시되며, 분노와 책임 전가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나타나는지를 드러내는 적용으로 쓰였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예외적인 사람으로 세우지 않고,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도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반응이 먼저 나올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통해 청중도 자신의 첫 반응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폴 트립 · 2026-10-23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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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루엘라가 나에게 물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리고 제 첫 반응은 '하지만 당신은...' 이는 제가 한 행동의 중요성과 잘못을 축소하려는 시도입니다. 제가 기분이 좋고 올바른 태도로 성경적으로 생각할 때는, 저는 그녀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상관없습니다. 저는 절대 당신에게 무례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종종 이는 제 첫 반응이 아닙니다.
복도에서 아이에게 화를 내는 부모
설교자는 부모가 복도를 걸으며 발을 구르고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을 예로 듭니다. 그 부모는 아이들이 죄인이라서 반드시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달려드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쏟아내는 말이 아이들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니며, 성경적인 접근이나 양육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이 결국 자녀를 죄악스럽고 방종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이 장면은 분노가 일상의 양육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예가 일상생활에 매우 실용적이라고 덧붙이며, 청중이 자신의 가정에서 분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돌아보도록 권합니다.
폴 트립 · 2026-10-23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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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끔찍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살인은 창조주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분께서 창조하신 것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인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물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용법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9장이나 8장에서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드셨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류의 놀라운 중요성과 존귀함을 보여줍니다. 네, 인간 영혼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아느냐?' 네가 마음속에 분노나 증오를 품고 들어올 때, 네가 하는 일을 아느냐? 이 말은 우리가 분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화적 문제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빛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반영해야 할 아름다운 형상을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셰일비, 이 사람을 화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니?' 만약 가능했다면, 그는 정말 인내심이 많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 당신 삶의 의미를 말해보세요. 이제 저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예를 들어, 복도를 걸으며 발을 구르며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이 죄인이라서 꼭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달려드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말이 아닌 말들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인 접근이나 양육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죄악스럽고 방종한 방식으로 자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네, 이 예는 일상생활에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저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언급한 또 다른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로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삶 속 분노 수준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 혼자 앉아서 피드를 스크롤하면서,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인터넷 속에서도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네, 자동차 안에서 대시보드를 두드리며 말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고,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순간, 이는 살인적인 생각입니다. 또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여성이, 텍사스만큼 큰 가방을 들고 지갑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가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20분 동안의 대화에서 말해야 할 핵심은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 도와주소서'입니다. 네, 이 말이 바로 완벽한 대답입니다. 저는 주님이 아니며,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놓아두신 문화 속에서 문제의 일부가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해결책에 속하지 못하게 됩니다. 네, 저는 이 말이 일반적인 문화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다른 기독교인들을 무너뜨리는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을 분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전혀 면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극단적인 말씀을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악한 인간이 되어도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는 자신의 신학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트랜스젠더나 다른 사람 앞에서라도, 예수님은 이러한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님의 진리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인적 의도라고 말씀하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나요?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문화에서 너무나 일반화되어 우리가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는 단지 솔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성경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이고, 저쪽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의 편을 선호합니다. 거짓의 편은 아니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이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세상이 말하는 '네, 너는 이 과정에서 우리와 똑같다'는 사람으로 변한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삶이 아닙니다. 네, 과일을 생각해 보세요. 다시 자녀 양육의 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 하루는 어땠는지 아느냐? 네가 하는 일은 결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 이건 정말 지혜롭고 도움이 되는 말이네'라고 생각할까요?
자동차 안에서 대시보드를 두드리는 운전자
설교자는 자동차 안에서 운전자가 대시보드를 두드리며 말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내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 운전자는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생각을 단순한 짜증이 아니라 살인적인 생각이라고 연결합니다. 이는 소셜 미디어를 언급하는 흐름과도 이어지는데, 방 안에서 피드를 스크롤하며 가볍게 여기는 분노도 마음속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분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이미 죄가 시작된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분노를 품는 자가 심판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행동 이전의 마음을 무겁게 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이 예화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분노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일상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폴 트립 · 2026-10-23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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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끔찍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살인은 창조주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분께서 창조하신 것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인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물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용법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9장이나 8장에서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드셨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류의 놀라운 중요성과 존귀함을 보여줍니다. 네, 인간 영혼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아느냐?' 네가 마음속에 분노나 증오를 품고 들어올 때, 네가 하는 일을 아느냐? 이 말은 우리가 분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화적 문제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빛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반영해야 할 아름다운 형상을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셰일비, 이 사람을 화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니?' 만약 가능했다면, 그는 정말 인내심이 많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 당신 삶의 의미를 말해보세요. 이제 저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예를 들어, 복도를 걸으며 발을 구르며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이 죄인이라서 꼭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달려드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말이 아닌 말들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인 접근이나 양육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죄악스럽고 방종한 방식으로 자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네, 이 예는 일상생활에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저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언급한 또 다른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로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삶 속 분노 수준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 혼자 앉아서 피드를 스크롤하면서,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인터넷 속에서도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네, 자동차 안에서 대시보드를 두드리며 말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고,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순간, 이는 살인적인 생각입니다. 또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여성이, 텍사스만큼 큰 가방을 들고 지갑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가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20분 동안의 대화에서 말해야 할 핵심은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 도와주소서'입니다. 네, 이 말이 바로 완벽한 대답입니다. 저는 주님이 아니며,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놓아두신 문화 속에서 문제의 일부가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해결책에 속하지 못하게 됩니다. 네, 저는 이 말이 일반적인 문화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다른 기독교인들을 무너뜨리는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을 분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전혀 면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극단적인 말씀을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악한 인간이 되어도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는 자신의 신학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트랜스젠더나 다른 사람 앞에서라도, 예수님은 이러한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님의 진리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인적 의도라고 말씀하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나요?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문화에서 너무나 일반화되어 우리가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는 단지 솔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성경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이고, 저쪽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의 편을 선호합니다. 거짓의 편은 아니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이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세상이 말하는 '네, 너는 이 과정에서 우리와 똑같다'는 사람으로 변한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삶이 아닙니다. 네, 과일을 생각해 보세요. 다시 자녀 양육의 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 하루는 어땠는지 아느냐? 네가 하는 일은 결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 이건 정말 지혜롭고 도움이 되는 말이네'라고 생각할까요?
줄에서 지갑을 찾는 여성
설교자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에 텍사스만큼 큰 가방을 들고 지갑을 찾지 못하는 여성을 상상해 보라고 청중에게 권합니다. 이 장면은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짜증이 올라올 수 있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그려 줍니다. 설교자는 이 예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서 분노를 얼마나 진지하게 보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는 앞의 자동차 장면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상황에서 마음속에 분노가 쌓일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순간이 바로 분노를 점검해야 할 자리라고 말하며, 작은 불편에서도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이 예를 들며 청중이 자신의 일상에서 반복되는 짜증을 가볍게 넘기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격려합니다.
폴 트립 · 2026-10-23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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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끔찍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살인은 창조주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분께서 창조하신 것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인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물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용법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9장이나 8장에서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드셨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류의 놀라운 중요성과 존귀함을 보여줍니다. 네, 인간 영혼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아느냐?' 네가 마음속에 분노나 증오를 품고 들어올 때, 네가 하는 일을 아느냐? 이 말은 우리가 분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화적 문제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빛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반영해야 할 아름다운 형상을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셰일비, 이 사람을 화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니?' 만약 가능했다면, 그는 정말 인내심이 많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 당신 삶의 의미를 말해보세요. 이제 저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예를 들어, 복도를 걸으며 발을 구르며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이 죄인이라서 꼭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달려드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말이 아닌 말들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인 접근이나 양육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죄악스럽고 방종한 방식으로 자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네, 이 예는 일상생활에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저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언급한 또 다른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로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삶 속 분노 수준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 혼자 앉아서 피드를 스크롤하면서,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인터넷 속에서도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네, 자동차 안에서 대시보드를 두드리며 말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고,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순간, 이는 살인적인 생각입니다. 또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여성이, 텍사스만큼 큰 가방을 들고 지갑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가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20분 동안의 대화에서 말해야 할 핵심은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 도와주소서'입니다. 네, 이 말이 바로 완벽한 대답입니다. 저는 주님이 아니며,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놓아두신 문화 속에서 문제의 일부가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해결책에 속하지 못하게 됩니다. 네, 저는 이 말이 일반적인 문화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다른 기독교인들을 무너뜨리는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을 분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전혀 면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극단적인 말씀을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악한 인간이 되어도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는 자신의 신학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트랜스젠더나 다른 사람 앞에서라도, 예수님은 이러한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님의 진리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인적 의도라고 말씀하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나요?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문화에서 너무나 일반화되어 우리가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는 단지 솔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성경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이고, 저쪽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의 편을 선호합니다. 거짓의 편은 아니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이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세상이 말하는 '네, 너는 이 과정에서 우리와 똑같다'는 사람으로 변한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신 삶이 아닙니다. 네, 과일을 생각해 보세요. 다시 자녀 양육의 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 하루는 어땠는지 아느냐? 네가 하는 일은 결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 이건 정말 지혜롭고 도움이 되는 말이네'라고 생각할까요?
딸을 재촉하다 소리를 지른 설교자의 일화
설교자는 어제 있었던 자신의 일을 직접 고백합니다. 그는 늦은 딸을 집에서 빨리 데리고 나가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했습니다. 딸이 신발을 집어 들고 양말만 신은 채 짜증을 내며 앞문으로 나가자, 그는 '바로 지금 집으로 돌아가라!'며 소리쳤습니다. 딸이 다시 들어와 그를 쳐다보자 그도 '나는 시간에 맞춰 가려고 하고 있는데, 네가 하는 일은...'이라며 말을 쏟아냈다고 털어놓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자신이 지은 죄였다고 인정하며, 결국 자신이 사과했고 딸도 그에게 사과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분노 모드로 즉시 전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노가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폴 트립 · 2026-10-23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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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 너무나 기쁩니다. 나는 이제 내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아이는 방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분노가 이끄는 방향입니다.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낳지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드러내는 일입니다. 어제 실제로 나는 딸을 집에서 빨리 데려나가서 목적지에 시간에 도착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늦었습니다. 매우 늦었습니다. 나는 "가자.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가서 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녀는 양말을 신고 있고, 어느 정도 짜증을 내며 앞문을 나갑니다. 그녀는 신조차 신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습니다. "바로 지금 집으로 돌아가라!" 그녀는 다시 들어와서 나를 그렇게 쳐다보았고, 나는 "나는 시간에 맞춰 가려고 하고 있는데, 네가 하는 일은..." 이 모든 것들은 어제 내가 죄를 지은 일입니다. 나는 사과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사과했고, 우리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분노 모드로 즉시 전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깊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네. 완전히 존재합니다. 표면 아래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필요합니다.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종종 분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내 상사가 누군지 모릅니다." 또는 "당신은 내 이웃이 누군지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사는 남편이나 아내를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자식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럴 때 야고보서 4장이 도움이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사이의 다툼과 싸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요?" 이것이 바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열망들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므로, 너희는 살인하고 시기합니다." 바로 이것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내 분노의 근원은 내 자제력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내길 막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는 분노합니다. 나는 가게에 도착했을 때 내가 원하는 물건을 원하고, 줄을 서고 싶지 않으며, 교통 체증도 싫고, 반대 의견도 싫고, 인내심 있는 상사를 원하고, 나는 원하고, 나는 원하고, 나는 원하고, 나는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매우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는 내 인생에 대한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네. 아마도 이는 우리가 분노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네.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10절까지, 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기를 권합니다. 이는 분노에 대한 논문입니다. 네. 정확히 중간쯤에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분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얼마나 멋진가요? 네. 이는 폭풍 속에서 필요한 작은 섬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분노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때리거나 소리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분노하는 생각, 불耐, 짜증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분노가 있는지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문제와 함께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하고 참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노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분이 되지 않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아니, 내가 처음부터 너에게 은혜를 주었다는 것을 후회한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도 아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우리는 이 큰 싸움을 우리 자신에게 남깁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인정해야 할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네. 나는 우리 모두에게 격려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먼저 나 자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네. 이는 필요합니다. 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언니들과의 논쟁
설교자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동네 언니들과 '누가 빠지는가'를 두고 열렬히 논쟁했던 어린 시절의 일을 꺼냅니다. 당시에는 실족시킨 죄의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 누가 빠졌는지에 더 집중했고, 그것은 자기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돌아봅니다. 지금은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고 답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 질문은 본문의 무게와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이 실족케 하는 죄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드셨는지 함께 살펴보겠다고 방향을 잡습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처참한 죽음보다 실족시키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고하신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뜻이 아니라 강렬한 비유로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짚습니다. 설교자는 위로와 축복을 기대한 청중에게 무거운 주제로 시작해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이 일화는 익숙한 질문도 다시 들여다보면 본문의 무게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출발점으로 쓰입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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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보면 연자 몇 도를 그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 거죠? 실족 당한 사람입니까? 실족을 시킨 사람입니까? 뭐 잘 안 들리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당연히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라고 답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저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아마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 것 같은데 그때 동네 언니들과 아주 열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가? 그때는 실족시킨 죄에 대한 그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빠졌는가 여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죠.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하셨는지를 자세히 한번 같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족케 하는 죄가 어떤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자 몇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그 처참한 죽음보다는 실족시키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의 두려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그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지금 경고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말씀은 아니죠. 강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의 심각성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기대하고 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함을 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이미 시작했으니까 연자 몇 돌의 그 큰 것도 한번 보여 드릴게요. 영상이 준비됐으면 한번 보여 주시면 됩니다. 지금 연자 몇 돌을 당나귀가 돌리고 있죠. 여러분들이 그 시골에서 사용했던 그 가정용 몇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면도 똑같은 장면인데 이게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당나귀가 몇 돌을 돌렸던 거죠. 변자 몇 돌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들며 이렇게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들을 과장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예들이 몇 가지가 있죠. 그중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남의 눈에 튀는 보면서 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들보는 뭐냐면 굉장히 큰 나무가 눈에 있는 거예요. 그니까 정말 현실성이 없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그런 큰 비유를 들고 있죠. 근데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는 실족시키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실족이 무엇인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족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다. 또 걸려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원문과 가장 가까운 것이 레위기 19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애물이나 걸림돌 또는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겠어?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의 본문을 좀 연구하고 볼수록 여러분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죄의 함정에 빠뜨리거나 또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너 때문에 실족했어."라고 말하는 어떤 단순히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죠.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손상시키거나 죄로 넘어지게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지금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설명하면 여러분이 실족에 대해서 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하는 그 대상이 누군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족케 하지 말라 하는 대상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여기서 작은 자를 또 찾아보라면 다시 1절부터 5절의 말씀을 또 봐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1절.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 큰 자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근데 예수님은 거기에 이렇게 응답을 하셨습니다.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3절에 뭐라 했냐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 좀 이상하죠?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천국에 못 들어가. 지금 천국에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왜곡된 신앙, 그 왜곡된 사고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계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것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작은 것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전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천국에 입문도 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에서의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일까요?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은 존재들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사회적 권력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지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존했어야만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힘도 없고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죠. 성인 남자 중심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존재 가치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죠. 그럼 작은 자가 어린아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요. 바로 "나를 믿는"이라는 수식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작은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곧 제자 공동체,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팀, 목장 모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작은 자들. 그들은 자신을 높일 어떤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내세울게 없는 자들입니다. 존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럼 이제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보인다면 그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그 중대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실족게 한 적이 있나요? 나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 본 적이 없어. 그를 죄에 빠지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마태복음 18장 7절입니다. 시작.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이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라는 거죠. 문장은 단순히 실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라는 것을 뛰어넘어서 세상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다는 지금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필연성이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없을 수는 없다. 이 지금 이중 부정을 하고 있죠. 첫 번째 부정은 실족하게 한 일이 없다. 근데 이것을 다시 부정해서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실족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내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를 들어서 사람을 실수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표현을 한다면 이 문장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실수를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이 되겠죠. 마태복음 18장 10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방식으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을 수는 없으나 이렇게 표현을 하실까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장의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실족에 불가피성을 말하시면서도 그것의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구별은 필연성과 그 당위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도 실족시키고 나도 실족시키고 다른 사람이 모두가 다 실족시킨다면 그래 괜찮아. 이렇게 해야 마땅할 거 같은데 모두가 실족시키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책임에서 면하진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이러한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한마디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당나귀가 돌리는 연자 맷돌 영상
설교자는 본문의 극단적인 이미지를 실감 나게 전하기 위해 준비한 영상을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영상에서는 당나귀가 큰 연자 맷돌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데, 설교자는 그것이 시골 가정에서 쓰던 작은 맷돌이 아니라는 점을 짚습니다. 다음 장면도 같은 장면이지만, 이것이 실제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당나귀가 맷돌을 돌리던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연자 맷돌이 웬만한 크기의 맷돌임을 말하며 청중이 그 무게를 떠올리도록 돕습니다. 영상을 보여 준 뒤에는 이제 내려 주셔도 된다고 하며 장면을 마무리합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셨는지 생각하게 하는 장치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이 맷돌 이미지가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감각적으로 보여 준다고 봅니다. 그래서 청중은 영상 속 맷돌을 통해 본문의 경고가 막연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무게를 가진 말씀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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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보면 연자 몇 도를 그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 거죠? 실족 당한 사람입니까? 실족을 시킨 사람입니까? 뭐 잘 안 들리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당연히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라고 답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저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아마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 것 같은데 그때 동네 언니들과 아주 열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가? 그때는 실족시킨 죄에 대한 그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빠졌는가 여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죠.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하셨는지를 자세히 한번 같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족케 하는 죄가 어떤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자 몇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그 처참한 죽음보다는 실족시키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의 두려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그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지금 경고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말씀은 아니죠. 강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의 심각성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기대하고 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함을 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이미 시작했으니까 연자 몇 돌의 그 큰 것도 한번 보여 드릴게요. 영상이 준비됐으면 한번 보여 주시면 됩니다. 지금 연자 몇 돌을 당나귀가 돌리고 있죠. 여러분들이 그 시골에서 사용했던 그 가정용 몇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면도 똑같은 장면인데 이게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당나귀가 몇 돌을 돌렸던 거죠. 변자 몇 돌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들며 이렇게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들을 과장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예들이 몇 가지가 있죠. 그중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남의 눈에 튀는 보면서 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들보는 뭐냐면 굉장히 큰 나무가 눈에 있는 거예요. 그니까 정말 현실성이 없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그런 큰 비유를 들고 있죠. 근데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는 실족시키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실족이 무엇인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족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다. 또 걸려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원문과 가장 가까운 것이 레위기 19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애물이나 걸림돌 또는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겠어?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의 본문을 좀 연구하고 볼수록 여러분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죄의 함정에 빠뜨리거나 또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너 때문에 실족했어."라고 말하는 어떤 단순히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죠.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손상시키거나 죄로 넘어지게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지금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설명하면 여러분이 실족에 대해서 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하는 그 대상이 누군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족케 하지 말라 하는 대상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여기서 작은 자를 또 찾아보라면 다시 1절부터 5절의 말씀을 또 봐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1절.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 큰 자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근데 예수님은 거기에 이렇게 응답을 하셨습니다.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3절에 뭐라 했냐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 좀 이상하죠?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천국에 못 들어가. 지금 천국에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왜곡된 신앙, 그 왜곡된 사고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계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것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작은 것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전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천국에 입문도 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에서의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일까요?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은 존재들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사회적 권력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지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존했어야만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힘도 없고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죠. 성인 남자 중심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존재 가치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죠. 그럼 작은 자가 어린아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요. 바로 "나를 믿는"이라는 수식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작은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곧 제자 공동체,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팀, 목장 모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작은 자들. 그들은 자신을 높일 어떤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내세울게 없는 자들입니다. 존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럼 이제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보인다면 그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그 중대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실족게 한 적이 있나요? 나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 본 적이 없어. 그를 죄에 빠지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마태복음 18장 7절입니다. 시작.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이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라는 거죠. 문장은 단순히 실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라는 것을 뛰어넘어서 세상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다는 지금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필연성이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없을 수는 없다. 이 지금 이중 부정을 하고 있죠. 첫 번째 부정은 실족하게 한 일이 없다. 근데 이것을 다시 부정해서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실족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내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를 들어서 사람을 실수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표현을 한다면 이 문장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실수를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이 되겠죠. 마태복음 18장 10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방식으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을 수는 없으나 이렇게 표현을 하실까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장의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실족에 불가피성을 말하시면서도 그것의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구별은 필연성과 그 당위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도 실족시키고 나도 실족시키고 다른 사람이 모두가 다 실족시킨다면 그래 괜찮아. 이렇게 해야 마땅할 거 같은데 모두가 실족시키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책임에서 면하진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이러한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한마디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낙타와 바늘귀 과장법
설교자는 성경에 나타난 과장법의 예를 들면서 낙타 이야기를 꺼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표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또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도 함께 언급합니다. 들보는 눈에 있는 굉장히 큰 나무라는 점을 설명하며, 두 비유 모두 현실성이 없는 큰 이미지라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비유에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상황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이라고 정리합니다. 아울러 천국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려는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예화는 연자 맷돌의 극단적 이미지가 과장법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이렇게 과장된 표현을 통해 청중이 실족의 의미를 더 분명히 붙잡도록 이끕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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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보면 연자 몇 도를 그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 거죠? 실족 당한 사람입니까? 실족을 시킨 사람입니까? 뭐 잘 안 들리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당연히 실족시킨 사람이 빠진다라고 답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저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아마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였을 것 같은데 그때 동네 언니들과 아주 열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빠지는가? 그때는 실족시킨 죄에 대한 그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빠졌는가 여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겨야 했기 때문이죠.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왜 하셨는지를 자세히 한번 같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실족케 하는 죄가 어떤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자 몇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그 처참한 죽음보다는 실족시키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지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죽음의 두려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그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지금 경고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라는 말씀은 아니죠. 강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의 심각성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기대하고 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함을 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이미 시작했으니까 연자 몇 돌의 그 큰 것도 한번 보여 드릴게요. 영상이 준비됐으면 한번 보여 주시면 됩니다. 지금 연자 몇 돌을 당나귀가 돌리고 있죠. 여러분들이 그 시골에서 사용했던 그 가정용 몇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면도 똑같은 장면인데 이게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당나귀가 몇 돌을 돌렸던 거죠. 변자 몇 돌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들며 이렇게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이런 표현들을 과장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예들이 몇 가지가 있죠. 그중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는 표현이 있고 또 남의 눈에 튀는 보면서 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들보는 뭐냐면 굉장히 큰 나무가 눈에 있는 거예요. 그니까 정말 현실성이 없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그런 큰 비유를 들고 있죠. 근데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는 실족시키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실족이 무엇인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족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다. 또 걸려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원문과 가장 가까운 것이 레위기 19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장애물이나 걸림돌 또는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겠어?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데. 우리의 본문을 좀 연구하고 볼수록 여러분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죄의 함정에 빠뜨리거나 또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너 때문에 실족했어."라고 말하는 어떤 단순히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죠.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손상시키거나 죄로 넘어지게 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지금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설명하면 여러분이 실족에 대해서 잘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하는 그 대상이 누군가를 한번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족케 하지 말라 하는 대상이 6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여기서 작은 자를 또 찾아보라면 다시 1절부터 5절의 말씀을 또 봐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1절.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 큰 자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근데 예수님은 거기에 이렇게 응답을 하셨습니다.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3절에 뭐라 했냐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 좀 이상하죠?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천국에 못 들어가. 지금 천국에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왜곡된 신앙, 그 왜곡된 사고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계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것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작은 것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전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 천국에 입문도 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에서의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일까요?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은 존재들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사회적 권력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지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존했어야만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힘도 없고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죠. 성인 남자 중심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존재 가치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죠. 그럼 작은 자가 어린아이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요. 바로 "나를 믿는"이라는 수식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작은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곧 제자 공동체,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팀, 목장 모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작은 자들. 그들은 자신을 높일 어떤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내세울게 없는 자들입니다. 존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럼 이제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보인다면 그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그 중대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실족게 한 적이 있나요? 나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 본 적이 없어. 그를 죄에 빠지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마태복음 18장 7절입니다. 시작.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무슨 말이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라는 거죠. 문장은 단순히 실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라는 것을 뛰어넘어서 세상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다는 지금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필연성이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없을 수는 없다. 이 지금 이중 부정을 하고 있죠. 첫 번째 부정은 실족하게 한 일이 없다. 근데 이것을 다시 부정해서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실족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내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를 들어서 사람을 실수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표현을 한다면 이 문장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실수를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하다라는 뜻이 되겠죠. 마태복음 18장 10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방식으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없을 수는 없으나 이렇게 표현을 하실까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장의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실족에 불가피성을 말하시면서도 그것의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구별은 필연성과 그 당위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도 실족시키고 나도 실족시키고 다른 사람이 모두가 다 실족시킨다면 그래 괜찮아. 이렇게 해야 마땅할 거 같은데 모두가 실족시키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책임에서 면하진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은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이러한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한마디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길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설교자는 목자가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었을 때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목자는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작은 자 한 명이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드러내려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가 소중한 양이며, 높고 낮음 없이 한 마리 한 마리가 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그 작은 자가 바로 나일 수 있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화는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본문의 경고를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해 주는 장면으로 쓰입니다.
조은주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아니,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는 이미 죄악이 가득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는데, 화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실족시키는 일을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니구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죠.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의 본문, "그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비슷한 문장이죠.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또 남을 없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스스로 낮출 수도 없고, 교만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자가 중요합니다. 왜냐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다음 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8~10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자 중에 하나도 없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고 있는지 지금 말씀하고 계시죠. 그들의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보고 있고, 그리고 보고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는 작은 자 개개인의 수천사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천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천사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니까 그들의 천사, 그들에게 속한 천사,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혼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네. 이 말씀을 보니까, 그들을 위해 섬기는 천사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은 자들을 보고, 그들을 돕고, 그리고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는 거죠. 특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없신 여기면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그다음 9절에 나옵니다. 이른 양의 비유.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비유죠. 100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목자는 아홉 아홉 마리를 그냥 산에 놔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그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 길을 잃지 아니한 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찾은 길 잃었던 그 양을 찾은 것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작은 자,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같은 양이며, 쥐가 높거나 낮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소중한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가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그 양이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선을 좀 바꿔서 제자들에게로 한번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과 34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가보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니라." 네.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죠. 근데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사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6장과 17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17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있죠. 이때도 예수님은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 세 제자만 목도하게 됩니다. 이 또한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다른 아홉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예수님에게 소중하게 되어지는가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 시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이 질문하기 전에 두 번 정도 예수님이 고난받을 것과 죽으실 것을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을 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 나는 어떤 위치에, 누가 어디에 서열에, 누가 클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이 조금 다르다는 거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그 선지서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그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제자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왕이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명기 17장 20절을 보면, 왕이 마음을 높여서 자기 형제를 위해 교만하게 굴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 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의 그 말씀과 매우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조차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이미 모세의 오경을 알고 있는 이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누가 높은 것인가 여기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이 지금 예수님에게 질문하도록 이끌었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사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이들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가 오시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실 거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부활 이후에도 남아 있던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을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들은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순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들이 익숙했던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의 방향 자체를 사실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각에서 돌이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그 태도는 남을 낮추려는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 여기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반대되는 행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더 큰가 관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천국의 개념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이 공동체에서 낮은 자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기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