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18 / 32쪽 · 한 쪽 20개
출애굽 밤 어린양 피와 맏아들
설교자는 이사야 43장 3~4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집트를 이스라엘의 속량으로 주셨다는 말씀을 출애굽 사건과 연결합니다. 그는 이 구절이 출애굽 때의 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문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를 바쳤고, 그 결과 그들의 맏아들들은 이집트의 맏아들들처럼 죽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이집트의 맏아들이 죽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로워졌다고 정리합니다. 이어서 '쿠시와 세바를 네 대신으로 주리라'는 말씀을 창세기 10장의 함의 아들들과 연결하며, 이는 이집트와 관련된 민족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신이라는 말을 네 대신에 그들이 죽고 너는 살게 된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또 4절의 너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므로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알렉스, 잼, 샘 · 2026-10-21
설교 내 46–46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의 어린양 피를 바치고, 그들의 맏아들들은 이집트의 맏아들들처럼 죽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맏아들이 죽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아내와의 저녁 메뉴 대화에 빗댄 새 창조
설교자는 이사야 43장의 새 일을 설명하면서 일상적인 부부 대화를 가볍게 떠올립니다. 설교자가 아내에게 저녁 메뉴를 묻는다고 가정하는 장면입니다. 아내는 그냥 새롭게 할 거야라고 대답하고, 설교자는 아 하고 반응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이것이 새 창조라고 농담처럼 말하며 이사야 43장을 인용하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아내가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상황까지 함께 그려 보입니다. 이 장면은 새로움을 어렵게 설명하기보다 친숙한 말 속에서 떠올리게 하는 비유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새 창조라는 개념을 청중의 일상에 가까이 가져오려 합니다. 대화 형식의 예화여서 가볍지만, 신학적 용어를 생활 언어와 연결하려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알렉스, 잼, 샘 · 2026-10-21
설교 내 84–84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이제 새롭게 솟아오릅니다. 이는 땅에서 새 생명이 솟아나는 것처럼, 가지나 줄기가 뿌리에서 다시 자라나는 것처럼 표현된 것입니다. >> 내가 아내에게 물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 뭐 먹을 거야?"라고. 그녀는 "아, 그냥 새롭게 할 거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아."라고 할 것입니다. >> [웃음] >> 너는 >> 알겠지, 새 창조야. >> 너는 이사야 43장을 인용하고 있어. 그녀는 "무슨 말이야?"라고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데이allas 잼의 인터뷰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는 조나단 레만과 매우 비슷한 말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조나단 레만처럼 말이죠. >> 누가 그들을 한 방에 함께 본 적이 있나요? >> 마찬가지로, 팀 켈러를 듣고 눈을 감으면, 그는 체비 챠시처럼 들립니다. >> 정말 그런가요? >> 그렇죠. >> [웃음] >> 나는 >> 종종 사람들이 너와 내가 서로 비슷하게 들린다고 말하더군요. >> 자, 18절에 대해 한 마디 해보겠습니다. 알겠죠, 이 구절은 아이러니하죠. 왜냐하면 16절과 17절에서 이사야가 "아, 내가 너에게 기억해야 할 것을 말해줄게. 여호와께서 바다를 가르고 바로의 전차를 무너뜨리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하면서도, 그 다음에 "이런 일을 기억하지 말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 잊어버려라. >> 그리고 저는 이것이 바로 그의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이런 일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이제 잊어버려라. 이는 곧 과거에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던 일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뛰어난 일이 될 것입니다. 알겠죠, 출애굽 사건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소진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16절, 17절, 18절이 함께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행하실 일은 출애굽 사건과 일치하며, 이는 곧 이전의 일과 비슷한 새 일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새 일은 이전의 일과 비슷하지만, 동시에 이전의 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의 일과 새 일 사이에는 단절이 있으며, 새 일은 훨씬 더 크고 위대할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언약의 표징은 언약 공동체에만 적용되었죠. >> 그렇죠, 맞습니다. >> 바로 그런 예입니다. >> 그렇죠. 그리고 저는 >> 할렐루야. >> 저는 성경에서 유형론을 다루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겔리와 웰럼은 그들의 책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저자들도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형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말합니다. 텍스트적 대응과 역사적 대응을 원합니다. 그리고 종종 언급되는 것은 단계적 발전입니다. 반유형은 원형보다 더 크고 위대해야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예로 들어, 반유형과 원형 사이의 단계적 발전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본인 스스로 유형론적으로 읽고 있다는 점을 잠시 주목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모세의 글들이 자신들을 넘어서는 더 큰 종말론적 행위를 가리키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으며, 모세의 글들에 담긴 종말론적 사상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시대에 맞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 아멘. >> 내가 당신이 설명한 단계적 발전에 대해 주목한 것은, 이는 양면적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점점 더 좋고 영광스러워지지만, 동시에 악한 일도 더 심각해진다는 점입니다. 바로, 심판이 더 심각해진다는 것입니다. >> 그렇죠, 맞습니다. >> 그렇죠. 저는 이사야 2절에서 물과 불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당신의 말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걸 노트에 적어두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당신이 그쪽으로 가셨다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당신이 정확히 맞다고 생각합니다. 소돔과 홍수 사이의 관계는 종말론적 기대를 만들어내며, 2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이는 세상의 종말적 심판이 될 것입니다. 이는 단지 홍수에서의 육체적 생명의 파멸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지역적 심판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 가해질 종말적 심판이며, 이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심판이 될 것입니다. >> 자, 우리는 19절 중간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새 일은 이전의 일과 비슷하다."라고 말씀하시죠.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제 새롭게 솟아오를 것이다."
요셉이 옷을 벗고 다시 입는 이야기
설교자는 물이 위협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전환을 설명하면서 창세기 요셉 이야기를 비슷한 패턴의 예로 듭니다. 그는 성경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많다고 말하며, 한 가지 예로 요셉의 삶을 제시합니다. 설교자가 떠올린 장면은 요셉이 옷을 벗겨졌다가 다시 옷을 입고, 그 후 형들에게 옷을 주는 모습입니다. 설교자는 이 흐름이 이사야 43장에서 물이 전개되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봅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물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위협으로 나타나고, 이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과 생명을 주는 물로 바뀝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하나의 요소가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전개되는 구조를 강조합니다. 이 비교를 통해 설교자는 본문의 물 이미지가 점점 발전하는 방식을 청중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알렉스, 잼, 샘 · 2026-10-21
설교 내 86–86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네, 저는 이가 단계적 발전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16절에서 주님께서 바다에 길을 만드셨고, 여기서는 같은 단어인 '데렉'으로 광야에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상호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가 단계적 발전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여시고 이스라엘을 지나게 하셨던 그분께서, 이제 광야를 여시고 물을 흐르게 하시어, 이 건조한 땅에 에덴 같은 비옥함을 만드셨습니다. 이와 유사한 언어는 이사야 51:3에도 나타납니다. "주께서 시온을 위로하시고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시며, 광야를 에덴과 같게 하고 사막을 여호와의 정원과 같게 하리라." 저는 이와 같은 영상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물의 언급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 이야기를 보면, 요셉이 옷을 벗겨졌다가 다시 옷을 입히고, 그 후 형들에게 옷을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의 포도원 비유
설교자는 이사야 43장 22~28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제사로 그분을 섬기지 않았다는 고발을 설명합니다. 본문은 죄와 불법으로 여호와를 짓누르고 피곤하게 했다는 책망으로 이어지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죄를 지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설교자는 이를 새 언약의 약속과 연결하며, 예레미야 31장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씀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다음 설교자는 이사야 27절과 28절의 조상과 중보자들의 범죄, 그리고 성소의 지도자들을 더럽히겠다는 말씀을 살핍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이 유배에 들어가고 언약 체계가 무너진 뒤에야 구원이 온다는 흐름으로 해석합니다. 설교자는 이 세대에 걸친 고발이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반복된다고 말하며, 마가복음 12장의 포도원 비유를 함께 언급합니다.
알렉스, 잼, 샘 · 2026-10-21
설교 내 95–95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그리고 2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나는 성소의 귀족들을 더럽힐 것이며, 야곱을 완전한 멸망에 넘기고 이스라엘을 모욕에 넘기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에서 성소의 귀족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집니다. 저는 방금 언급하신 것처럼 왕들과 제사장들을 포함한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이사야가 예언할 당시 이스라엘이 아직 유배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희는 유배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너희의 전체 언약 구조와 운영 체계는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며, 이후에야 내가 너를 구원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사야를 함께 읽으며 주님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이사야의 묘사, 언어, 신학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셨는지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 구절에서도 "네 아버지가 죄를 지었고, 네 중재자들이 나를 범죄했다"라고 말씀하시며, 주님께서 너희를 버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와도 비슷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들을 보내셨지만 모두 죽였고, 결국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이사야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세대에 걸친 고발이 있으며,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 전반에 걸쳐 이와 같은 고발을 반복하셨습니다.
쉐보레 광고 문구와 대자연 탐험
설교자는 미국 쉐보레가 트래벌스라는 큰 차를 광고하면서 '편안한 신뢰에서 대자연을 탐험하라'는 카피를 사용했던 일을 소개합니다. 듣기에는 좋은 문구지만, 설교자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대자연을 탐험하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경험을 하기 때문인데, 편안한 실내에서 그런 탐험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차라리 TV를 보는 편이 낫다고 덧붙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광고하면서 '편안한 의자, 세련된 신뢰에서 예수님을 경험하세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경험하는 본질을 놓친 광고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신뢰 있는 공간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좋고 필요한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일은 편안한 신뢰의 자리에서 나와 삶의 현장으로 나갔을 때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야고보서 2장 15절과 16절을 인용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고 실제로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믿음이 말에 머물지 않고 행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적용으로 전합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우리 야고보서 말씀을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시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오늘 14절 말씀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첫 번째는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을 수 있다는 첫 번째 사실과, 두 번째 사실은 14절에서 발견되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는 ‘믿음’입니다. ‘믿는다’는 표현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주 사용됩니다. 신약성경에만 ‘믿음’, ‘믿으라’는 단어가 500회 가까이 기록됩니다. 신약 성경이 260장 정도인데, 거의 장마다 두 번씩은 믿음이나 믿으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는 믿음이 우리 성도들의 삶과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초대교회가 시작될 때 성도들을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믿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은 ‘믿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표현이지만,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 이는 요한복음 20장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여기서 요한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며,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려 함이고,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전부입니다. 너무 간단하지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고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고, 믿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이며,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미국에 쉐보레라는 자동차 회사가 있습니다. 쉐보레 자동차 중에 트래벌스라는 큰 차가 있는데, 몇 해 전에 이 차를 광고하면서 ‘편안한 신뢰에서 대자연을 탐험하라’는 카피를 사용했습니다. 듣기만 해도 너무 좋은 말이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대자연을 탐험하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안한 실내에서 대자연을 탐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TV를 보는 게 낫습니다. 교회를 광고한다고 해서 ‘편안한 의자, 세련된 신뢰에서 예수님을 경험하세요’라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경험하는 본질을 놓치는 광고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뢰 있는 공간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은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은 신뢰에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경험하는 것은 신뢰에서 나와야 됩니다. 물론 우리가 신뢰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한 과정이지만,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은 신뢰에서 나갔을 때 가능합니다. 바로 오늘 15절과 16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그냥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평안히 가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서도 실제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완벽한 고백과 십자가 앞의 실패
설교자는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34절까지의 유명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시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을 함께 언급하며,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인류 역사상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대답이라고 평가하고, 예수님도 베드로를 칭찬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며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돌이키셔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베드로가 가장 온전한 지식과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바로 직후에 사탄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점을 충격적인 장면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설교자는 우리의 믿음이 행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적용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자기 부인의 실패에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여러분, 우리가 한 번 성경을 떠나서 마가복음 8장 말씀을 보시겠어요?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30절, 34절 말씀을 보시면, 이건 아주 유명한 장면입니다. 이건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는 첫 번째 질문하는 장면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물어봐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그리고 제자들한테도 물어보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29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을 듣고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님은 그리스도시이다'라고 대답해요. 여러분, 마태복음의 동일한 말씀을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하냐면,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해요. 여러분, 인류 역사상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대답을 베드로가 합니다. 지식적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시죠. 베드로한테 '잘하였다.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시죠.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완벽한 대답을 합니다. 지식적으로.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 대답을 듣고 그제서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한테 말하죠.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반응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어 놓고 '절대 그렇게 안 될 거다'라고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죠. 그때 마가복음 8장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세요. 여러분, 베드로가 가장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 후에 사단이 됩니다. 이게 충격적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온전한 지식, 가장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 후에 사단이 됩니다. 직후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죠.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왜 행함을 만들어 내지 못하냐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게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행동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지식은 있는데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고 있는데, 정작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벤 윌슨이 말한 우르크와 우루의 도시
설교자는 영국 캠브리지 출신 역사학자 벤 윌슨을 소개합니다. 벤 윌슨은 2020년에 인류 도시의 역사를 다룬 두꺼운 책 『메트로폴리스』를 출판했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 책은 기원전 4천년경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가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 도시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크라고 전합니다. 벤 윌슨은 우르크가 기원전 4천년경에 생겨나 4천 년을 견뎌내고 기독교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고 소개됩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버틴 도시는 우르크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설교자는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로마도 수백 년밖에 버티지 못했다는 점을 함께 언급하며 우르크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후 우르크를 모방하고 그보다 뛰어난 도시들이 나타났는데, 벤 윌슨이 그중 가장 먼저 언급한 도시가 우루였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창세기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루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루는 우르크처럼 유브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고 우르크보다 남부 해안 쪽에 가까워 더 풍요로웠다고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우루가 견고하고 세련되며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로서 수천 년을 지속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출발한 곳이 당시 가장 발전되고 견고한 도시였음을 보여주어, 그 출발의 무게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습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여러분, 그 영국에 캠브릿지 출신의 벤 윌슨이라는 역사학자가 있거든요. 그 벤 윌슨이라는 역사학자가 2020년에 인류 도시의 역사를 쓴 『메트로폴리스』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출판해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는데, 『메트로폴리스』라는 책을 출판해요. 이 벤 윌슨이 그 책의 내용에 보면, 기원전 4천년경에 인류 역사의 최초의 도시가 나타납니다. 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인류 최초의 도시의 이름이 뭐냐면, 우르크입니다. 우르크. 우르크란 도시예요. 이 우르크란 도시가 얼마나 경고하고 발전된 도시냐면, 그 벤 윌슨이 말하길, 기원전 4천년경에 이 도시가 생겨나고 무려 4천년을 이 도시가 견뎌냅니다. 기독교 시대까지. 벤 윌슨이 인류 역사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견뎌낸 도시는 우르크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니까 로마도 수백 년밖에 못 갔어요. 이 우르크라는 도시가 발생하고, 그 우르크를 모방하고, 우르크보다 더 뛰어난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많은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 벤 윌슨이 그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도시가 우루입니다. 우루. 여러분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창세기 11장 마지막 부분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루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죠. 여러분, 우루란 도시가 어떤 도시냐면, 우르크와 동일하게 유브라테스 강을 끼고 있고, 우르크보다 더 남부 해안 쪽에 인접하고 있어서 훨씬 더 풍요롭고 견고하고 세련되고 견고한 우루란 도시도 수천 년을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루가 발전되고 견고하고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였어요. 우르크보다 더.
갈대아 우루를 떠난 아브라함
설교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되고 견고하며 세련된 도시 우루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당시 우루가 모두가 선망하는 도시였고, 그곳에 머물면 삶이 안전하고 편안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도시를 떠나는 일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도시를 나온 이유는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너를 들어서 열방에 복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이 약속 하나를 붙들고, 그 말씀 하나를 믿고 우루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낸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머리로 믿는 것은 입으로 나오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행동으로 나온다는 말을 함께 전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점검하기 위한 말이라고 설교자는 분명히 합니다. 설교자는 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머무는지, 살아 있는 믿음인지 점검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겠느냐고 경고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조상의 스토리가 어떻게 시작하냐면, 이 가장 세계에서 발전되고 견고하고 세련된 도시에서 나오는 것부터, 이 모든 믿음의 조상의 이야기가 시작하죠. 여러분,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 당시에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잖아요. 우루는 모두가 선망하는 도시에 거기 있으면 모든 것이 안전되고, 자신의 자녀는 물론, 자녀가 없지만, 자신의 모든 삶이 거기서 모든 것이 편안하고,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도시를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너를 들어서 열방에 복이 되게 하겠다'는 그 약속 하나 붙들고, 그 말씀 하나 믿고 나와요. 그 도시에서. 여러분,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몇 번 저희 교구에서도 말씀드리고 말씀드렸잖아요. 여러분, 머리로 믿는 건 입으로 나오고, 마음으로 믿는 건 행동으로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게 다른 어떤 사람들을 평가하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점검할 때 꼭 이 말을 쓰셔야 돼요. 여러분, 머리로 믿는 건 입으로 나오고, 마음으로 믿는 건 행동으로 나옵니다. 내 믿음이 내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정말로 살아 있는 믿음인지를 점검하셔야 돼요. 오늘 말씀에 분명하게 경고하잖아요.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겠느냐고.
간디의 말: 예수님을 담지 않은 신자들
설교자는 아주 오래전에 간디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소개합니다. 간디는 예수님은 참 좋아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우리 조국 교회의 현실과 연결합니다. 교회당도 많고 예배와 설교도 좋지만,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세상은 실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고백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로 풀어 말합니다. 말로 드러나는 믿음이 삶에서 담기지 않으면 그 실망은 결국 복음 자체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삶 속에 담아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오늘 야고보서 본문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이 무엇일까요? 강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참 신앙생활 오래 해 오신 분들인데,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고, 오늘 본문 역시 우리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본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은 특별히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군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삶에서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말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봤을 때, 구체적인 행동이 없을 때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14절을 먼저 한번 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 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많은 약속들과 은혜들을 믿는 그 사람. 저 믿음 있는 사람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겠죠. "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그리스도인 맞아?" 무엇이 문제일까요? 야고보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거예요. 진정성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의 진정성을 담아내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말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이죠. 어떤 진심을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래서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울면서 호소할 수도 있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기장에 적어 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진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나은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쭉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가.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진정성을 알 수 있겠죠.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아닐까? 야고보는 15절 16절에 이러한 예를 하나 듭니다. 우리 한번 읽어 볼까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덮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다. 너무 추운데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굶어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참 딱하고 불쌍해요.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그 형제 자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 너무 춥죠? 너무 배고프죠? 빨리 평안히 돌아가세요. 가서 따뜻하게 하시고, 먹을 것도 좀 드시고."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따뜻하게 할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말은 좋죠. 말만 놓고 보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었죠? 내 외투를 벗어주는 일. 나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고 함께 다스리는 상속자인데, 말만 하는 그 사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이 형제 자매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점은 뭐냐면, 이 대상이 형제 자매라는 거예요. 한 분도 안 본 외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고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이런 방식으로 대한 것이죠. 이런 믿음 쓸모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것이 너의 구원에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을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겠는가라는 매우 심각한 질문까지 던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참 불편하더라고요. 왜 그러냐면 제가 이런 말 참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어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아, 너무 힘든 일 당하셨습니다. 기도할게요." 어떤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아, 그 문제 너무 어려우시죠? 잘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말로만 말로만 할 때가 참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말은 유익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할 때 위로를 받게 되죠.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는 말로만 진실함은 없는 채로, 진정성은 없는 채로 말로만 습관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잘 될 겁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나의 무언가를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고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믿음이고 정체성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서 이율배반적으로 말로는 참 잘하지만, 말로는 너무너무 청산유주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의 진심이 행동으로 결려진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하나님께 모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 어떨 때 그렇죠?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방식으로 죄가 섞여 있는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진정성이 담보가 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많이 겪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에, 우리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믿음을 뭐라고 이야기하죠? 우리 17절 한번 읽어 볼까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한 설문에 따르면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 설문 조사했을 때, 늘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답이 뭐냐면, 목회자 혹은 성도들이 그 삶과 믿음이 그 삶과 입술의 고백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꼽습니다. 말은 너무 그럴 듯한데, 설교는 너무 그럴 듯한데, 고백은 너무 그럴 듯한데, 실제로 만나고 교제했을 때 그 말과 너무나 반대되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죠. 그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청년들은 상처받습니다. 말이 멋있으면 멋있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간디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저는 예수님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국 교회의 비극, 우리는 많은 수많은 예배와 참 좋은 설교와 너무나 멋진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 관련 글이 올라왔을 때 그 댓글들을 유심히 봐요. 그런데 한결같이 그런 이야기 합니다.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가장 용서할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다.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다. 이런 댓글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제 얘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은 말들, 격려의 말들을 하지만, 제 진심이 묻어나지 않고, 제 말이 믿음이 되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제가 목양하고 담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받을 상처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무거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 다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길 원하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과 삶의 내용들이 나와야 그것이 좋은 믿음이죠. 우리 18절 19절 한번 읽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내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믿음을 이렇게 꺼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의심하고 기독교를 의심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가 정말 해야 될 일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일이죠.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말은 너무나 귀하지만, 그 말이 진짜인 것을, 진정성이 담겨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만 하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은 귀신과 같은 수준이라는 거예요. 귀신들도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떠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행위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원인을 알아야겠죠. 우리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탄식합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여기서 허탄하다라는 말은 우리 전도서에서 많이 본 단어, 헛되다, 헛되다 있죠. 예. 공허하다, 비어 있다. 헛되다, 쓸모 없다. 이런 뜻입니다. 허탄한 사람아. 그런데 그다음 절이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할 때, 이 헛것은요. 앞에 있는 비어 있다. 케노스랑은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르게라는 단어인데, 행함이라는 단어가 에르곤. 그리고 복수는 에르가이거든요. 행함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붙어 있는 단어예요. 그래서 아르게라는 단어입니다. 아르게.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그래서 게으른, 활동하지 않는 이런 뜻입니다.
교회를 떠난 청년들의 설문 조사
설교자는 교회를 떠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전합니다. 조사에서 높은 비율로 나온 이유는 목회자나 성도들의 삶과 믿음, 입술의 고백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그럴듯하고 고백도 멋있지만, 실제로 만나 교제해 보니 그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청년들은 그 말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되고, 말이 멋있을수록 더 큰 상처를 받는다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현실을 말과 삶의 간격이 얼마나 큰 아픔이 되는지 보여주는 예로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고백과 행동이 함께 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말로 전한 복음이 삶에서 확인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떠나게 되며, 그래서 믿음을 말로만 드러내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청년들의 상처를 자신과 교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오늘 야고보서 본문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이 무엇일까요? 강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참 신앙생활 오래 해 오신 분들인데,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고, 오늘 본문 역시 우리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본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은 특별히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군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삶에서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말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봤을 때, 구체적인 행동이 없을 때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14절을 먼저 한번 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 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많은 약속들과 은혜들을 믿는 그 사람. 저 믿음 있는 사람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겠죠. "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그리스도인 맞아?" 무엇이 문제일까요? 야고보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거예요. 진정성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의 진정성을 담아내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말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이죠. 어떤 진심을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래서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울면서 호소할 수도 있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기장에 적어 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진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나은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쭉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가.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진정성을 알 수 있겠죠.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아닐까? 야고보는 15절 16절에 이러한 예를 하나 듭니다. 우리 한번 읽어 볼까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덮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다. 너무 추운데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굶어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참 딱하고 불쌍해요.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그 형제 자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 너무 춥죠? 너무 배고프죠? 빨리 평안히 돌아가세요. 가서 따뜻하게 하시고, 먹을 것도 좀 드시고."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따뜻하게 할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말은 좋죠. 말만 놓고 보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었죠? 내 외투를 벗어주는 일. 나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고 함께 다스리는 상속자인데, 말만 하는 그 사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이 형제 자매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점은 뭐냐면, 이 대상이 형제 자매라는 거예요. 한 분도 안 본 외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고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이런 방식으로 대한 것이죠. 이런 믿음 쓸모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것이 너의 구원에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을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겠는가라는 매우 심각한 질문까지 던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참 불편하더라고요. 왜 그러냐면 제가 이런 말 참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어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아, 너무 힘든 일 당하셨습니다. 기도할게요." 어떤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아, 그 문제 너무 어려우시죠? 잘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말로만 말로만 할 때가 참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말은 유익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할 때 위로를 받게 되죠.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는 말로만 진실함은 없는 채로, 진정성은 없는 채로 말로만 습관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잘 될 겁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나의 무언가를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고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믿음이고 정체성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서 이율배반적으로 말로는 참 잘하지만, 말로는 너무너무 청산유주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의 진심이 행동으로 결려진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하나님께 모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 어떨 때 그렇죠?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방식으로 죄가 섞여 있는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진정성이 담보가 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많이 겪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에, 우리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믿음을 뭐라고 이야기하죠? 우리 17절 한번 읽어 볼까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한 설문에 따르면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 설문 조사했을 때, 늘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답이 뭐냐면, 목회자 혹은 성도들이 그 삶과 믿음이 그 삶과 입술의 고백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꼽습니다. 말은 너무 그럴 듯한데, 설교는 너무 그럴 듯한데, 고백은 너무 그럴 듯한데, 실제로 만나고 교제했을 때 그 말과 너무나 반대되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죠. 그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청년들은 상처받습니다. 말이 멋있으면 멋있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간디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저는 예수님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국 교회의 비극, 우리는 많은 수많은 예배와 참 좋은 설교와 너무나 멋진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 관련 글이 올라왔을 때 그 댓글들을 유심히 봐요. 그런데 한결같이 그런 이야기 합니다.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가장 용서할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다.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다. 이런 댓글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제 얘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은 말들, 격려의 말들을 하지만, 제 진심이 묻어나지 않고, 제 말이 믿음이 되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제가 목양하고 담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받을 상처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무거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 다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길 원하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과 삶의 내용들이 나와야 그것이 좋은 믿음이죠. 우리 18절 19절 한번 읽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내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믿음을 이렇게 꺼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의심하고 기독교를 의심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가 정말 해야 될 일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일이죠.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말은 너무나 귀하지만, 그 말이 진짜인 것을, 진정성이 담겨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만 하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은 귀신과 같은 수준이라는 거예요. 귀신들도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떠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행위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원인을 알아야겠죠. 우리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탄식합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여기서 허탄하다라는 말은 우리 전도서에서 많이 본 단어, 헛되다, 헛되다 있죠. 예. 공허하다, 비어 있다. 헛되다, 쓸모 없다. 이런 뜻입니다. 허탄한 사람아. 그런데 그다음 절이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할 때, 이 헛것은요. 앞에 있는 비어 있다. 케노스랑은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르게라는 단어인데, 행함이라는 단어가 에르곤. 그리고 복수는 에르가이거든요. 행함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붙어 있는 단어예요. 그래서 아르게라는 단어입니다. 아르게.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그래서 게으른, 활동하지 않는 이런 뜻입니다.
인터넷 댓글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평가
설교자는 기독교 관련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을 때 달리는 댓글을 유심히 살펴본다고 말합니다. 그 댓글들에는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라는 반응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가장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평가가 한결같이 담겨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런 댓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 평가를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목사로서 어쩔 수 없이 격려의 말을 하지만, 그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성도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이 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 댓글을 말과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오늘 야고보서 본문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이 무엇일까요? 강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참 신앙생활 오래 해 오신 분들인데,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고, 오늘 본문 역시 우리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본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은 특별히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군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삶에서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말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봤을 때, 구체적인 행동이 없을 때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14절을 먼저 한번 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 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많은 약속들과 은혜들을 믿는 그 사람. 저 믿음 있는 사람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겠죠. "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그리스도인 맞아?" 무엇이 문제일까요? 야고보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거예요. 진정성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의 진정성을 담아내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말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이죠. 어떤 진심을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래서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울면서 호소할 수도 있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기장에 적어 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진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나은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쭉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가.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진정성을 알 수 있겠죠.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아닐까? 야고보는 15절 16절에 이러한 예를 하나 듭니다. 우리 한번 읽어 볼까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덮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다. 너무 추운데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굶어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참 딱하고 불쌍해요.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그 형제 자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 너무 춥죠? 너무 배고프죠? 빨리 평안히 돌아가세요. 가서 따뜻하게 하시고, 먹을 것도 좀 드시고."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따뜻하게 할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말은 좋죠. 말만 놓고 보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었죠? 내 외투를 벗어주는 일. 나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고 함께 다스리는 상속자인데, 말만 하는 그 사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이 형제 자매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점은 뭐냐면, 이 대상이 형제 자매라는 거예요. 한 분도 안 본 외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고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이런 방식으로 대한 것이죠. 이런 믿음 쓸모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것이 너의 구원에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을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겠는가라는 매우 심각한 질문까지 던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참 불편하더라고요. 왜 그러냐면 제가 이런 말 참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어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아, 너무 힘든 일 당하셨습니다. 기도할게요." 어떤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아, 그 문제 너무 어려우시죠? 잘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말로만 말로만 할 때가 참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말은 유익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할 때 위로를 받게 되죠.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는 말로만 진실함은 없는 채로, 진정성은 없는 채로 말로만 습관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잘 될 겁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나의 무언가를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고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믿음이고 정체성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서 이율배반적으로 말로는 참 잘하지만, 말로는 너무너무 청산유주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의 진심이 행동으로 결려진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하나님께 모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 어떨 때 그렇죠?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방식으로 죄가 섞여 있는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진정성이 담보가 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많이 겪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에, 우리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믿음을 뭐라고 이야기하죠? 우리 17절 한번 읽어 볼까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한 설문에 따르면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 설문 조사했을 때, 늘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답이 뭐냐면, 목회자 혹은 성도들이 그 삶과 믿음이 그 삶과 입술의 고백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꼽습니다. 말은 너무 그럴 듯한데, 설교는 너무 그럴 듯한데, 고백은 너무 그럴 듯한데, 실제로 만나고 교제했을 때 그 말과 너무나 반대되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죠. 그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청년들은 상처받습니다. 말이 멋있으면 멋있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간디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저는 예수님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국 교회의 비극, 우리는 많은 수많은 예배와 참 좋은 설교와 너무나 멋진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 관련 글이 올라왔을 때 그 댓글들을 유심히 봐요. 그런데 한결같이 그런 이야기 합니다.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가장 용서할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다.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다. 이런 댓글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제 얘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은 말들, 격려의 말들을 하지만, 제 진심이 묻어나지 않고, 제 말이 믿음이 되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제가 목양하고 담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받을 상처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무거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 다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길 원하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과 삶의 내용들이 나와야 그것이 좋은 믿음이죠. 우리 18절 19절 한번 읽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내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믿음을 이렇게 꺼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의심하고 기독교를 의심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가 정말 해야 될 일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일이죠.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말은 너무나 귀하지만, 그 말이 진짜인 것을, 진정성이 담겨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만 하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은 귀신과 같은 수준이라는 거예요. 귀신들도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떠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행위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원인을 알아야겠죠. 우리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탄식합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여기서 허탄하다라는 말은 우리 전도서에서 많이 본 단어, 헛되다, 헛되다 있죠. 예. 공허하다, 비어 있다. 헛되다, 쓸모 없다. 이런 뜻입니다. 허탄한 사람아. 그런데 그다음 절이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할 때, 이 헛것은요. 앞에 있는 비어 있다. 케노스랑은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르게라는 단어인데, 행함이라는 단어가 에르곤. 그리고 복수는 에르가이거든요. 행함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붙어 있는 단어예요. 그래서 아르게라는 단어입니다. 아르게.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그래서 게으른, 활동하지 않는 이런 뜻입니다.
힘든 일을 당한 이에게 한 말로만의 기도
설교자는 자신이 말로만 위로하던 경험을 솔직하게 나눕니다. 어떤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아, 너무 힘든 일 당하셨습니다. 기도할게요.'라고 말했고, 큰 문제를 만난 사람에게는 '그 문제 너무 어려우시죠? 잘 해결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그렇게 말로만 전했던 순간이 참 많았다고 고백합니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진심 없이 습관처럼 기도하겠다고 하고 실제로 돌보지 못하는 모습은 잘못이라고 돌아봅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이름으로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 주고 사람을 돌보며 세워야 하는데,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 말만 청산유수처럼 잘하게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성도들이 말의 진심이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오늘 야고보서 본문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이 무엇일까요? 강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참 신앙생활 오래 해 오신 분들인데,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의 이야기를 하고, 오늘 본문 역시 우리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본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은 특별히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군가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삶에서 믿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말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봤을 때, 구체적인 행동이 없을 때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14절을 먼저 한번 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 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많은 약속들과 은혜들을 믿는 그 사람. 저 믿음 있는 사람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겠죠. "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그리스도인 맞아?" 무엇이 문제일까요? 야고보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거예요. 진정성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의 진정성을 담아내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말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이죠. 어떤 진심을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래서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울면서 호소할 수도 있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기장에 적어 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진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나은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쭉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가.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진정성을 알 수 있겠죠.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아닐까? 야고보는 15절 16절에 이러한 예를 하나 듭니다. 우리 한번 읽어 볼까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덮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다. 너무 추운데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굶어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참 딱하고 불쌍해요.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그 형제 자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 너무 춥죠? 너무 배고프죠? 빨리 평안히 돌아가세요. 가서 따뜻하게 하시고, 먹을 것도 좀 드시고."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따뜻하게 할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말은 좋죠. 말만 놓고 보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었죠? 내 외투를 벗어주는 일. 나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고 함께 다스리는 상속자인데, 말만 하는 그 사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이 형제 자매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점은 뭐냐면, 이 대상이 형제 자매라는 거예요. 한 분도 안 본 외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고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이런 방식으로 대한 것이죠. 이런 믿음 쓸모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것이 너의 구원에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을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겠는가라는 매우 심각한 질문까지 던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참 불편하더라고요. 왜 그러냐면 제가 이런 말 참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어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아, 너무 힘든 일 당하셨습니다. 기도할게요." 어떤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아, 그 문제 너무 어려우시죠? 잘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말로만 말로만 할 때가 참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말은 유익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할 때 위로를 받게 되죠.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는 말로만 진실함은 없는 채로, 진정성은 없는 채로 말로만 습관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잘 될 겁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나의 무언가를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고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믿음이고 정체성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서 이율배반적으로 말로는 참 잘하지만, 말로는 너무너무 청산유주처럼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의 진심이 행동으로 결려진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하나님께 모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 어떨 때 그렇죠?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방식으로 죄가 섞여 있는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해놓고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진정성이 담보가 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많이 겪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에, 우리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믿음을 뭐라고 이야기하죠? 우리 17절 한번 읽어 볼까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한 설문에 따르면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 설문 조사했을 때, 늘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답이 뭐냐면, 목회자 혹은 성도들이 그 삶과 믿음이 그 삶과 입술의 고백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꼽습니다. 말은 너무 그럴 듯한데, 설교는 너무 그럴 듯한데, 고백은 너무 그럴 듯한데, 실제로 만나고 교제했을 때 그 말과 너무나 반대되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죠. 그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청년들은 상처받습니다. 말이 멋있으면 멋있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간디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저는 예수님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국 교회의 비극, 우리는 많은 수많은 예배와 참 좋은 설교와 너무나 멋진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 관련 글이 올라왔을 때 그 댓글들을 유심히 봐요. 그런데 한결같이 그런 이야기 합니다. "선한 영향력, 용서 말이 좋아서 선한 영향력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가장 용서할 용서하지 않는 집단이다.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다. 이런 댓글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제 얘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은 말들, 격려의 말들을 하지만, 제 진심이 묻어나지 않고, 제 말이 믿음이 되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제가 목양하고 담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받을 상처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무거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 다시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길 원하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과 삶의 내용들이 나와야 그것이 좋은 믿음이죠. 우리 18절 19절 한번 읽어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내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믿음을 이렇게 꺼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의심하고 기독교를 의심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가 정말 해야 될 일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일이죠.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말은 너무나 귀하지만, 그 말이 진짜인 것을, 진정성이 담겨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만 하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은 귀신과 같은 수준이라는 거예요. 귀신들도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떠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행위의 불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원인을 알아야겠죠. 우리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탄식합니다. "아 허탄한 사람아." 여기서 허탄하다라는 말은 우리 전도서에서 많이 본 단어, 헛되다, 헛되다 있죠. 예. 공허하다, 비어 있다. 헛되다, 쓸모 없다. 이런 뜻입니다. 허탄한 사람아. 그런데 그다음 절이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할 때, 이 헛것은요. 앞에 있는 비어 있다. 케노스랑은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르게라는 단어인데, 행함이라는 단어가 에르곤. 그리고 복수는 에르가이거든요. 행함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붙어 있는 단어예요. 그래서 아르게라는 단어입니다. 아르게.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그래서 게으른, 활동하지 않는 이런 뜻입니다.
남득현 목사의 설교 인용
설교자는 같은 날 오전 예배에서 남득현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남득현 목사는 머리로 하는 믿음은 입술로 나오지만, 마음으로 하는 신앙은 삶의 행동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이 아주 멋지다고 반응하며 청중의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빌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에 진실함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라고 강조합니다. 믿음이 머리에만 머물면 말만 남고, 마음에서 나온 신앙이어야 삶의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진실해져서, 내가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정말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남도 살리고 나도 산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이 눈에 보일 때 사람은 다르게 살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그러니까 일을 하지 않으니까 헛되고 무익하고 소용 없는 이런 뜻을 갖게 됩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 헛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가 믿음을 받아서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해야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 안에 받은 그 믿음이 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게으른 믿음을 가지고 진정성 없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일하기 싫어하는 이 믿음, 게으른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그리고 저의 믿음이 행위로 온전하게 자라가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고 정말 결심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께서 주신 그 믿음이라는 선물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 믿음이 점점 더 잘 작동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예요.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보여 주는데 하나의 예가 아브라함이고 또 다른 예가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을 먼저 보실까요?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원인을 뭐라고 얘기하는지 한번 보시죠. 22절입니다. 우리 22절 한번 읽어 볼까요?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태가 다 죽은 자신의 몸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성령으로 이삭 아들을 주셨죠. 그 믿음이 계속해서 이랬더니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요구, 너의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 일하던 믿음이 "아들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믿음으로 이르게 했고, 그 믿음이 결국은 아들을 바치게 했던 거죠. 어, 믿음이 온전해진 겁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거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결심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어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자라갈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예요. 라합은 들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신 여호와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스라엘 군대가 왔을 때 그 정탐꾼이 왔을 때 그 믿음이 계속 일하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그런 아주 위험천만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정탐꾼들을 숨기고 자신의 그 고백이 행위로 온전하게 되는 일을 보여 주었죠. 그리고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로 그렇게 들어가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되었죠. 저와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강하게 하고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어떤 노력과 애를 쓴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일하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이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꾸준히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순종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저와 여러분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오늘이 밤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신기하게요. 말씀을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일상을 살다 보면 그 믿음이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의 논리로,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살아가죠. 저도 똑같습니다. 너무너무 똑같습니다. 저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참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진실함이 회복되는 것이죠. 진실함이. 오전에 우리 남득현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셨더라고요. 머리로 하는 믿음은 입술로 나오지만, 마음으로 하는 신앙은 삶의 행동으로 나온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웃음] 여러분,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이 진실함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그 믿음이 진실해지도록 정말 믿도록, 정말 믿도록,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니라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남들도 살리고 나도 살고, 부요한 그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정말 믿어야 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서, 정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이 우리 눈에 보일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정말 중요한 건 우리의 믿음이 진짜여야 하는 거예요. 정말 우리 마음에 진실함이 묻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드리는 기도와 예배가 우리의 말이 행동이 누군가를 상처,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믿음이 있노라.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정말 확인하게 될 거예요.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우리를 정말 의롭다하게 하는 그런 복됨을 우린 누리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남서울교회 성도 여러분, 이 우리 주님 앞에 머리 숙이고 기도합시다. 번지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 진짜 믿음을 좀 주십시오. 정말 우리 자녀를 기를 때, 믿음으로 기르는 믿음으로 기른다고 하고서 똑같이 하는 거 말고, 정말 믿음으로 길러내는 교회를 섬길 때, 정말 믿음으로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믿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진실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귀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제단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태가 죽은 자신의 몸과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믿음이 계속 일하여 나중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을 때에도 순종하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아들을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믿음에 이르렀고, 그 믿음이 결국 아들을 바치는 행위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믿음이 온전해진 모습으로 보며,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순종이 가능해진다고 적용합니다. 결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자라갈 때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2–2문단 · 예화 6
본문 발췌 보기
그러니까 일을 하지 않으니까 헛되고 무익하고 소용 없는 이런 뜻을 갖게 됩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 헛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가 믿음을 받아서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해야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 안에 받은 그 믿음이 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게으른 믿음을 가지고 진정성 없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일하기 싫어하는 이 믿음, 게으른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그리고 저의 믿음이 행위로 온전하게 자라가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고 정말 결심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께서 주신 그 믿음이라는 선물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 믿음이 점점 더 잘 작동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예요.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보여 주는데 하나의 예가 아브라함이고 또 다른 예가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을 먼저 보실까요?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원인을 뭐라고 얘기하는지 한번 보시죠. 22절입니다. 우리 22절 한번 읽어 볼까요?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태가 다 죽은 자신의 몸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성령으로 이삭 아들을 주셨죠. 그 믿음이 계속해서 이랬더니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요구, 너의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 일하던 믿음이 "아들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믿음으로 이르게 했고, 그 믿음이 결국은 아들을 바치게 했던 거죠. 어, 믿음이 온전해진 겁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거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결심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어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자라갈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예요. 라합은 들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신 여호와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스라엘 군대가 왔을 때 그 정탐꾼이 왔을 때 그 믿음이 계속 일하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그런 아주 위험천만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정탐꾼들을 숨기고 자신의 그 고백이 행위로 온전하게 되는 일을 보여 주었죠. 그리고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로 그렇게 들어가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되었죠. 저와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강하게 하고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어떤 노력과 애를 쓴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일하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이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꾸준히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순종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저와 여러분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오늘이 밤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신기하게요. 말씀을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일상을 살다 보면 그 믿음이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의 논리로,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살아가죠. 저도 똑같습니다. 너무너무 똑같습니다. 저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참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진실함이 회복되는 것이죠. 진실함이. 오전에 우리 남득현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셨더라고요. 머리로 하는 믿음은 입술로 나오지만, 마음으로 하는 신앙은 삶의 행동으로 나온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웃음] 여러분,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이 진실함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그 믿음이 진실해지도록 정말 믿도록, 정말 믿도록,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니라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남들도 살리고 나도 살고, 부요한 그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정말 믿어야 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서, 정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이 우리 눈에 보일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정말 중요한 건 우리의 믿음이 진짜여야 하는 거예요. 정말 우리 마음에 진실함이 묻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드리는 기도와 예배가 우리의 말이 행동이 누군가를 상처,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믿음이 있노라.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정말 확인하게 될 거예요.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우리를 정말 의롭다하게 하는 그런 복됨을 우린 누리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남서울교회 성도 여러분, 이 우리 주님 앞에 머리 숙이고 기도합시다. 번지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 진짜 믿음을 좀 주십시오. 정말 우리 자녀를 기를 때, 믿음으로 기르는 믿음으로 기른다고 하고서 똑같이 하는 거 말고, 정말 믿음으로 길러내는 교회를 섬길 때, 정말 믿음으로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믿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진실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귀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긴 이야기
설교자는 라합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예를 듭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들었고,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신 여호와라는 것을 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왔을 때 라합의 믿음은 계속 일했고,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설교자는 이 행동이 라합의 고백이 행위로 온전하게 되는 모습이었다고 봅니다. 그 결과 라합은 구원받았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예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노력과 애를 쓴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순종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임만세 · 2026-10-21
설교 내 2–2문단 · 예화 7
본문 발췌 보기
그러니까 일을 하지 않으니까 헛되고 무익하고 소용 없는 이런 뜻을 갖게 됩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 헛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가 믿음을 받아서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해야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 안에 받은 그 믿음이 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게으른 믿음을 가지고 진정성 없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일하기 싫어하는 이 믿음, 게으른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그리고 저의 믿음이 행위로 온전하게 자라가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고 정말 결심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께서 주신 그 믿음이라는 선물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 믿음이 점점 더 잘 작동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예요. 그래서 두 가지 예를 보여 주는데 하나의 예가 아브라함이고 또 다른 예가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을 먼저 보실까요?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원인을 뭐라고 얘기하는지 한번 보시죠. 22절입니다. 우리 22절 한번 읽어 볼까요?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태가 다 죽은 자신의 몸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성령으로 이삭 아들을 주셨죠. 그 믿음이 계속해서 이랬더니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요구, 너의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 일하던 믿음이 "아들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믿음으로 이르게 했고, 그 믿음이 결국은 아들을 바치게 했던 거죠. 어, 믿음이 온전해진 겁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거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결심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어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자라갈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예요. 라합은 들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애굽 군대를 물리치신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신 여호와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스라엘 군대가 왔을 때 그 정탐꾼이 왔을 때 그 믿음이 계속 일하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그런 아주 위험천만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정탐꾼들을 숨기고 자신의 그 고백이 행위로 온전하게 되는 일을 보여 주었죠. 그리고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로 그렇게 들어가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되었죠. 저와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강하게 하고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어떤 노력과 애를 쓴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일하기 시작할 때 그 믿음이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꾸준히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순종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저와 여러분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오늘이 밤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신기하게요. 말씀을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일상을 살다 보면 그 믿음이 다 어디로 갔는지, 세상의 논리로,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살아가죠. 저도 똑같습니다. 너무너무 똑같습니다. 저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참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진실함이 회복되는 것이죠. 진실함이. 오전에 우리 남득현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셨더라고요. 머리로 하는 믿음은 입술로 나오지만, 마음으로 하는 신앙은 삶의 행동으로 나온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웃음] 여러분,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이 진실함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그 믿음이 진실해지도록 정말 믿도록, 정말 믿도록,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니라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남들도 살리고 나도 살고, 부요한 그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정말 믿어야 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서, 정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이 우리 눈에 보일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정말 중요한 건 우리의 믿음이 진짜여야 하는 거예요. 정말 우리 마음에 진실함이 묻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드리는 기도와 예배가 우리의 말이 행동이 누군가를 상처,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믿음이 있노라.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정말 확인하게 될 거예요. 그 믿음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우리를 정말 의롭다하게 하는 그런 복됨을 우린 누리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남서울교회 성도 여러분, 이 우리 주님 앞에 머리 숙이고 기도합시다. 번지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 진짜 믿음을 좀 주십시오. 정말 우리 자녀를 기를 때, 믿음으로 기르는 믿음으로 기른다고 하고서 똑같이 하는 거 말고, 정말 믿음으로 길러내는 교회를 섬길 때, 정말 믿음으로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믿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진실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귀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쓴 이야기
설교자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도 내 만족을 위한 쾌락으로 쓰일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그 예로 탕자의 이야기를 듭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가서 모두 허랑방탕하게 써 버렸습니다. 설교자는 야고보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한 말씀과 이를 연결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도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할 때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리기보다 내 뜻을 정해 놓고 알려 드리는 기도를 돌아보자고 권합니다. 탕자의 장면은 받은 것을 나를 위해 써 버리는 마음을 경계하는 자리에서 쓰였습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
설교자는 원하는 것을 구하되 그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기도의 모범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듭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간절히 구하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라는 기도의 모습을 함께 제시합니다. 눈물로 구해도 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듣는 성도들이 자기 기도의 중심을 점검하기를 권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설교자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30년 넘게 기도한 경험
설교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눕니다. 그는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30년 넘게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는 기도 제목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기도가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니라고 적용합니다. 오랜 시간 같은 제목을 붙들고 기도해 온 성도들도 이 자리에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기다림이 길어지는 기도 앞에서 낙심하기보다, 그 기도를 계속 붙들고 있는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성도들과 함께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와 응답
설교자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 마음에 무엇이 드러나는지 살피기 위해 바울의 사례를 듭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응답을 들었다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서운함이 올라오는 우리의 모습을 함께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시는 것 같고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거절된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도록 권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간음한 아내를 다시 데려온 이야기
설교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방식을 설명하면서 호세아 선지자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호세아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과 같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았느냐'고 부르시는 소리는 내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내를 값 치르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다고 이어갑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부르시는 말씀이 정죄가 아니라 돌아오게 하시는 사랑의 음성임을 강조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5
본문 발췌 보기
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