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8 / 32쪽 · 한 쪽 20개
야고보 무덤을 찾았다는 목동의 꿈 이야기
설교자는 중세에 가장 중요한 성지 순례지로 예루살렘과 로마를 꼽고, 이어서 산티아고를 소개합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이 8세기쯤 제기되었고, 교황청이 이를 인정하면서 성지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근거는 한 목동이 꿈에 야고보 성인을 보았고, 그곳에서 뼈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입증 절차가 매우 허술했다고 평가하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주장일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온 가족이 순례를 떠나면서 도시와 도시를 잇는 순례길이 생겨났고, 지금의 많은 도시를 만든 루트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성지 순례가 면벌의 수단이자 큰 수입원이 되었음을 함께 지적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6
본문 발췌 보기
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코로나 시기 이탈리아 성지 순례 전대사 발표
설교자는 최근에도 성지 순례와 면벌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주교회가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아 살 수 없다고 교황청에 탄원했다고 전합니다. 이에 교황청은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를 하면 전대사를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설교자는 전대사가 모든 벌을 면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 일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런 체계 속에서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대사를 한 번 얻었다고 해도 이후의 삶이 구원에 확신을 주지 못하며, 계속 쌓여 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속에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통해 공로와 면벌 체계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7
본문 발췌 보기
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천둥 속에서 성 안나에게 드린 루터의 서원
설교자는 루터의 젊은 시절 일화를 소개합니다. 루터가 대학을 다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숲을 지나게 되었는데, 많은 비와 번개, 천둥이 몰아쳤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느낀 루터는 성 안나에게 기도하며, 무사히 집에 도착하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성 안나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또 루터가 살던 아이슬라벤은 광산 도시였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다는 배경을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루터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인에게 기도하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이 일화는 루터가 하나님보다 성인에게 의지하며 수도승이 되는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제시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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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해 신부를 매일 찾아간 루터
설교자는 루터가 자신의 양심을 매우 민감하게 여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고해 신부를 계속 찾아갔다고 전합니다. 고해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와서 신부가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고 매일 찾아갔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모습을 통해 루터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으로 가득했는지를 상상해 보게 합니다. 이후 루터는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가 되지만, 설교자는 이 불안한 내면이 이후 복음을 발견하게 되는 배경이었다고 연결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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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루터가 자신을 고백한 말
설교자는 루터가 스스로를 돌아본 고백을 인용하며 그의 내면을 소개합니다. 루터는 자신이 훌륭한 수도사였고 규칙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기에, 규율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는 수도사가 있다면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늘 스스로를 의심했고,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고해에서 빠뜨렸다는 생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 양심을 인간의 전통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은 노력할수록 더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루터가 매일 깨달았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깨달음이 바로 루터가 로마서 말씀을 붙들고 새로운 진리를 찾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적용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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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직접 고백인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훌륭한 수도사였으며 규칙을 너무나 엄격하게 잘 지켜서, 만일 어떤 수도사가 규율들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바로 그 수도사일 것이다." 그는 항상 의심하며 말했다. "너는 그 일을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너는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고해에서 빠뜨렸다."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 양심을 인간의 전통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은, 노력할수록 더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다는 것을 매일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붙들고, 루터가 비텐베르크 수도원에서 엄청나게 고민하고 기도하며 영적 법민으로 지내던 그 시절에,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루터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 오늘 함께 읽으신 그 구절을 읽을 때, 갑자기 루터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걸 바로 '탑속의 체험'이라고 부르는데요. 실제로 비텐베르크에 가면, 어거스틴 수도원 안에 루터가 체험했던 그 장소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아이폰으로 찍어온 사진이거든요. 그때 루터의 고백을 보시면, "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 말씀의 의미를 밤낮 묵상하던 중에, 마침내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깨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 증오했었던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바울 서신의 이 구절은 내게 바로 낙원의 문이 되었다. 바로 루터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마서 1장 17절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가 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고백하는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성경의 진리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오랫동안 가리워져 있다가 다시금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배경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라고 하는 생각을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들을, 세상의 원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 없이 무엇인가를 얻는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있습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든, 일을 열심히 하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노력합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다는 원리를 배워 왔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중요하죠. 다른 모든 문제들은 이 세상 살다가 사라질 문제들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영혼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공로 없이, 자신의 어떤 의로운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복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장담하고 확신하고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 본 사람.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를 도저히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어떤 고상한 행위나 선행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루터가 발견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로마서 말씀을 붙들고 밤낮 주로 묵상하던 중에, 루터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그 의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지시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고 죄를 범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만한 선행을 쌓아올 수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그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고, 이제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이며, 우리에게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바로 이러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합니다. 시편 32편 1절 말씀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자신의 죄된 본성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된 본성이 가리워져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평생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루터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진짜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계십니까? 우린 때때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차고 넘쳐서, 그 존재도 의식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매 순간 우리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항상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에 공기가 공짜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저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의와 그로 인해 그분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들을 마치 값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획득해 내신 그 하나님의 의를 마치 자신들이 보관하고 마음대로 나눠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인 것처럼 변질시킨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싸웠기 때문에 이신칭의의 교리가 재발견되었고, 이 새로운 진리를 시대마다 지켜내고 간직해온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종교 개혁의 신앙을 고백하고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기념주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우리 개신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이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을 이번 주간 깊이 묵상해 보시면서, 의인된 확신을 가지시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 속의 체험' 현장
설교자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로마서 1장 17절을 묵상하던 중 일어난 변화를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합니다.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뜻을 밤낮으로 묵상하다가,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그 순간 루터는 새로 태어난 느낌이 들었고,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전에는 증오했던 하나님의 의를 루터가 사랑하기 시작했고, 바울 서신의 이 구절이 낙원의 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직접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며,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 안에 그 장소가 아직 남아 있다고 전합니다. 이 체험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진다는 이신칭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설교자는 강조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4–4문단 · 예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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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직접 고백인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훌륭한 수도사였으며 규칙을 너무나 엄격하게 잘 지켜서, 만일 어떤 수도사가 규율들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바로 그 수도사일 것이다." 그는 항상 의심하며 말했다. "너는 그 일을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너는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고해에서 빠뜨렸다."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 양심을 인간의 전통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은, 노력할수록 더 불확실하고 약하며 고통받는다는 것을 매일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붙들고, 루터가 비텐베르크 수도원에서 엄청나게 고민하고 기도하며 영적 법민으로 지내던 그 시절에,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루터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 오늘 함께 읽으신 그 구절을 읽을 때, 갑자기 루터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걸 바로 '탑속의 체험'이라고 부르는데요. 실제로 비텐베르크에 가면, 어거스틴 수도원 안에 루터가 체험했던 그 장소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아이폰으로 찍어온 사진이거든요. 그때 루터의 고백을 보시면, "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 말씀의 의미를 밤낮 묵상하던 중에, 마침내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깨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 증오했었던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바울 서신의 이 구절은 내게 바로 낙원의 문이 되었다. 바로 루터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마서 1장 17절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가 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고백하는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성경의 진리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오랫동안 가리워져 있다가 다시금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배경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라고 하는 생각을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들을, 세상의 원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 없이 무엇인가를 얻는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있습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든, 일을 열심히 하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노력합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다는 원리를 배워 왔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중요하죠. 다른 모든 문제들은 이 세상 살다가 사라질 문제들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영혼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공로 없이, 자신의 어떤 의로운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복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장담하고 확신하고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 본 사람.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를 도저히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어떤 고상한 행위나 선행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루터가 발견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로마서 말씀을 붙들고 밤낮 주로 묵상하던 중에, 루터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그 의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믿음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지시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고 죄를 범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만한 선행을 쌓아올 수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그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고, 이제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이며, 우리에게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바로 이러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합니다. 시편 32편 1절 말씀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자신의 죄된 본성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된 본성이 가리워져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평생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루터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내가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진짜 낙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계십니까? 우린 때때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차고 넘쳐서, 그 존재도 의식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매 순간 우리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항상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에 공기가 공짜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저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의와 그로 인해 그분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들을 마치 값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획득해 내신 그 하나님의 의를 마치 자신들이 보관하고 마음대로 나눠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인 것처럼 변질시킨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싸웠기 때문에 이신칭의의 교리가 재발견되었고, 이 새로운 진리를 시대마다 지켜내고 간직해온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종교 개혁의 신앙을 고백하고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기념주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우리 개신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이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을 이번 주간 깊이 묵상해 보시면서, 의인된 확신을 가지시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에리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와 두 편의 시
설교자는 에리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1976년에 출간된 책이며, 고등학교 시절 교회 문고에 꽂혀 있었거나 대학생 형, 누나들이 이 책으로 토론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서 마음에 새겨졌다고 회고합니다. 나중에 직접 읽어 보니 내용이 복잡하고 설명이 어려웠지만, 주장만큼은 단순했다고 말합니다. 그 주장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소유 방식과 존재 방식의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유 방식의 삶은 대학 학력, 직업, 재산, 타고 다니는 차처럼 가진 것이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고 보고, 존재 방식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꿈을 가지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사회가 사람을 인품보다 옷차림, 연봉, 차로 판단하는 극단적인 소유 중심 사회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소유 중심의 삶이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고, 지위를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은 듯 불안하게 만들며, 인간관계를 득실로 바꾸는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이어 에리 프롬이 인용한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테니슨의 시는 갈라진 벽 틈의 꽃을 뿌리째 뽑아 손에 든 소유의 마음을 보여 주고, 바쇼의 냉이꽃 시는 꺾지 않고 바라보는 기쁨을 보여 준다고 대비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근거로 우리 교회가 꽃을 꺾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눈여겨 살펴야 보이는 초라한 꽃을 존귀하게 여기며 생명을 존중하신다고 적용합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1–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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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 프로미슨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책인데요. 1976년도에 출판된 책입니다. 그때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책이 고등학교 때 제 머릿속에 각인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 교회에 작은 교회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 문고에 이 책이 꽂혀 있었던 것 같고, 또는 그때 우리 대학생 형이나 누나들이 이 책을 갖고 토론하는 걸 옆에서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책이 제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고 나서 이 책을 구해서 읽어 보니까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고 설명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방식입니다. 소유 방식의 삶은 내가 뭘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삶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자기 존재에 영향을 주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등이 소유 중심의 삶입니다. 반면 존재 방식의 삶은 내가 뭘 추구하는 사람인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는지가 인생을 규정짓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모두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존재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에리 프로미슨의 분석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가 두 가지 방식이 비등비등한 사회일까요? 지금은 극단적인 소유 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조장하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차가 어떤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에리 프로미슨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이미 그때부터 세상이 소유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유 중심의 삶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만족하며 살다가 친구가 큰 집을 사면 자신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요? 사회가 소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차가 어려운데도 트럭을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호텔에서는 경차 타는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돈을 쓰지 않는 손님을 대접할 필요가 없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깔려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둘째, 소유 중심의 삶은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내 위치가 곧 내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지위나 신분이 곧 존재가 되므로, 그것을 잃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현실에서도 퇴직하면 퇴물이 되는 듯한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 퇴직은 퇴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 중심의 삶은 우리를 호도하고 악하게 만듭니다. 셋째, 소유 중심의 삶은 다른 사람도 소유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소유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평가하므로 인간관계가 망가집니다. 상대방의 존재가 귀해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득이 될 사람을 사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지위를 잃으면 관계를 끊습니다. 이런 것이 소유 중심의 삶의 부작용입니다. 에리 프로미슨은 이 책에서 시 두 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영국의 테니슨 시인의 시입니다. "갈라진 벽 틈새에 피는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채 손 안에 들고 있다." 이 시는 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일본의 바쇼 시인의 시는 "눈 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나." 이 시는 꽃을 소유하지 않고도 그 존재를 바라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는 꽃을 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꽃을 소유하지 않아도 그 존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뽀빠이 과자 박스 앞에서 느낀 가난의 결핍
설교자는 중학생 무렵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다가 충격을 받은 일을 전합니다. 누나 집에는 뽀빠이 과자가 박스째 사 놓여 있었고, 누나가 선반에 올려 둔 그 과자를 매일 놀러 오는 동생이 하나씩 얻어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에게 이 가난은 결핍으로 남았습니다. 사춘기 무렵부터 철이 들수록 자신의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기준에 못 미친다고 인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 가난했고 외모와 소유물도 부족했으며,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가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다는 사실까지 더해져 결핍이 많은 시절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자신을 평가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눕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스스로가 작고 부족하게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런 결핍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며 청중과 자신의 약함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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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이민 초기 '밥벌지'라 불린 청년 시절
설교자는 20대 초반 이민 초기에 자신에게 '밥벌지'라는 별명이 붙었던 시절을 회고합니다. 그 별명은 밥이나 축낸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어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고백합니다.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막노동을 하며 영어도 못하는 자신이 형편없이 보여 비웃음을 살 것 같아 위축되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결핍의 고통이 가장 컸던 이 시기를 숨기지 않고 되돌아봅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그를 살린 것은 교회였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를 영어 실력이나 처지로 평가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통해 교회가 사람을 소유나 처지의 기준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적용을 이끌어 냅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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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1983년 길에서 겪은 인종 차별
설교자는 1983년 미국에서 겪은 인종 차별의 경험을 들려 줍니다. 당시 길에서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들은 하이와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하이라고 인사했지만 상대는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말을 못 알아들었나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일을 겪으며 자신의 존재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직장에서도 쫓겨나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런 시절을 지나며 자신을 살려 준 곳이 교회였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지 않았고, 막대하지 않았으며,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비웃는 세상과 달리, 교회에서는 그런 기준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여러 고마운 분들이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고 격려해 준 축복을 떠올리며,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적용합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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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미시간 호수까지 갔던 청년 시절의 고백
설교자는 주님을 만나기 전 죽고 싶은 마음이 깊었던 때를 고백합니다.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시간 호수까지 찾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도하지는 않았고,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고백은 그가 우울하고 밥이나 축내는 인간이라고 여기던 시절의 절망을 보여 줍니다. 그러던 중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뿐인이다 인생으로 여기던 그가 이제는 충분하다는 인생이 되었고, 주님 앞에서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20대 때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은 누구나 겪을 수 있으니, 주님께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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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이 여기 있다고 치고 한 번 보세요. 멀쩡히 그 존재로 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꺾어 가지고 꽃꽂이로 만들어 놓으면 이미 그 꽃은 죽은 꽃이에요. 살아 있던 생명력으로 며칠 연장하는 거지. 이게 에리프롬이 강조하고 있는 포인트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에서 맨 앞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눈여겨 살펴보니, 콧마하고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시는 뭘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꽃의 어떤 점이 특별한지 궁금해요. 눈 여겨 봐야 보이는 꽃이에요. 여러분, 꽃구경 가자, 단풍놀이 가자 해서 버스 대절하고 설상 가는 건, 눈 여겨 봐야 찾을 수 있는 꽃이 아니잖아요. 너무나 매력적이고 유명한 꽃을 보러 가는 건데, 하나님은 눈 여겨 살펴봐야 하는 초라한 꽃, 존재가 별로 없는 꽃을 보고 계신 거예요. 확 뽑아버려도 되는데, 눈 여겨 살펴본 그 꽃이 너무 아름다운데도 꺾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설교 준비하려고 에리프롬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쭉 읽으면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점이 있었어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크리스천 같아요. 그 책 뒤에 보면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그런 내용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에리프롬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모르겠지만, 마음이 감동이 되었어요. 왜 우리 하나님은 테니슨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의 시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신가요? 눈 여겨 봐야 볼 수 있는, 보살 것 없는 초라한 작은 꽃도 인간의 평가긴 하지만, 그걸 존귀하게 보고 눈여겨 보고, 감상하되 생명력을 존중해서 꺾지 않는 게 우리 하나님 성품이구나. 왜 제가 유난히 그게 은혜가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저는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철이 들수록 제 존재가 세상이 요구하는 소유 양식의 삶의 기준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식했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걸 사춘기 때부터 느꼈어요. 너무나 가난했고요. 결혼한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 집에서 중학생 때 충격을 받았어요. 뽀빠이라는 과자를 박스로 사 놓고 먹더라고요. 선반에 올려 놓고, 누나가 매일 놀러갔잖아요. 하나씩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 가난이 제게 결핍이었어요. 외모나 소유물도 부족했고요. 아버지는 작은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셨어요. 결핍이 많았습니다. 제 결핍의 정점은 이민 초기예요. 정말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밥벌지'였어요. 20대 초반에요. '밥이나 춥네요'라는 뜻이었죠. 그때는 사대주의가 있었어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한국에서 살기 전에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미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형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비웃겠나 싶었죠. 막노동하고 살고, 영어도 못 하니까요. 83년도는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도 심했어요. 길 가면 지들끼리 '하이, how are you, fine, thank you' 하는데, 육사람 지나가는데 '하이' 하면 고개를 돌려요.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종 차별이었어요. 제 존재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요. 일도 직장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그렇게 살았어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그때 저를 살려 준 건 교회예요. 교회는 일주일에 숨을 쉬는 곳이었어요. 오늘 초대받아 오신 분들께 이걸 전하고 싶어요. 교회는 그런 기준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고, 막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미국 사람 중에는 영어 못 하는 걸 대놓고 무시하거든요. 비웃고 그러면 너무 리얼했나? 교회만 가면 그런 걸로 저를 대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어릴 때부터 격려해 주었어요. '너 걱정도 하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되? 네 아버지가 교회를 위해 금식 기도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축복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우리 청년들이, 기성 세대, 은퇴하신 분들이, 세상은 퇴직하면 퇴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냥 보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눈 여겨 봐야 보이는, 조그만한 꽃을 그냥 작은 꽃이라고 보세요. 자기 틈새에 있는 귀한 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고 난 이후로는 열정감이라는 게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있으면 바로바로 하루 이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없애 주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왜 지난주 설교로 끝내지 않고, 이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나누고 싶었어요. 지난주와는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자는 거예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대답하길,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가 방송실에 요청했더니, 직원이 어색하다고 했어요. '목사님, 이거 어디 그 어색하잖아요. 뿐인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썼어요. 왜 '뿐인이다'라고 썼겠냐고요. 제자들 입장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어린아이 도시락이에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출처가 어린아이 도시락이라고 나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장난치나? 예배 풀치를 하려고 이걸 갖고 왔냐?' 그런데 놀라운 건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죠.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은밀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이 보잘이 뿐이니이다'라고 하시면서, 갖고 왔는데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꽃이 너무 존귀하고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뿐인이다' 인생을 '충분하다'로 바꾸어 주세요. 저는 주님 만나기 전에 '뿐인이다' 인생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고 죽고 싶다고 미시간 호수까지 가봤지만, 실제로 시도한 건 아니에요. 그냥 '뛰어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우울하고 밥이나 춥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충분하다'의 인생이 되었어요. 주님 앞에 너무나 행복하게 쓰임을 받고 있어요.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20대 때 제가 '뿐인이다' 인생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20대, 30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어요. '뿐인이다' 인생은 누구나 겪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충분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비하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저를 비하하기를 원해요.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저를 만나서 득담하시느라고 '목사님은 뭘 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사업하면 잘하셨을 거예요'라고 하시면, 그런 칭찬으로 기분이 나빠요. 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 어디 시느냐고요? 뭘 해도 다 잘하는 사람이면요. 그래서 저는 저를 피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귀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비하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비하가 충분치 못하니까요. 더 비하하고 더 비하해도 '뿐인이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가지예요.
마크 투웨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설교자는 마크 투웨인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인용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두 번인데, 첫 번째는 내가 태어난 날이고 두 번째는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날이라는 내용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이 뜨거운 음식을 먹고 끝낸 군중들은 알지 못하는 의미라고 대비합니다. 오래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의미를 모른다면 슬픈 일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편안함을 얻는 군중과 달리, 주님은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 주시고 그 자리에 사명의 짐을 얹어 주신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예수를 믿지 않고 미국에서 구멍가게나 슈퍼마켓을 계속했다면 세상 기준으로는 더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00번, 천 번 하나님과 너 둘 중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라고 묻고, 자신은 이 길을 간다고 고백합니다. 이 길이 그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초대받은 이들도 그 기쁨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이찬수 · 2026-10-25
설교 내 4–4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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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두 번이다. 첫 번째 날은 내가 태어난 날이고, 두 번째 날은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날이다. 뜨거운 음식을 먹고 끝낸 군중들은 이 말의 의미를 하나도 모른다. 오래 예수를 믿으시면서도 이 의미를 모르시고 예수를 믿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예수를 믿어서 편한 건 군중이다. 예수를 믿어서 주님께서 내 어깨에 드리어진 무거운 짐은 내려 주시고, 거기에 사명의 짐을 얹어 주셔서, 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미국에서 그 구멍 가게를 계속 했거나, 슈퍼마켓을 했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편했을 것이다.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더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100번, 천번 하나님과 너, 둘 중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럼 저는 이 길을 갑니다. 이 길이 저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이기 때문에, 초대받아 오신 분들에게 이 은혜가 뭔지, 이것이 왜 기쁨인지를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성령님이 그 마음으로 오늘 경험케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설교자는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의 부자와 라자로 비유를 꺼내며, 가장 나쁜 일은 이 세상에서 희망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영원히 희망 없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부자가 바리께인들과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이자 의로움의 증거로 여겼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야기 속 부자는 보라색 옷과 고급 린넨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식사했으며,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인물로 소개됩니다. 반면 라자로는 상처투성이로 부자의 문 앞에 놓여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고 싶어 했고,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두 사람이 죽은 뒤 라자로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멀리 아브라함과 라자로를 바라봅니다. 부자는 물 한 방울을 요청하고,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 경고하게 해 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들으라고 답합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가 지옥의 실재와 그 고통이 의식적이고 영원하다는 자비로운 경고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늘과 지옥 사이의 큰 격차가 확정되어 있음을 말하며, 지옥을 피하는 길은 성경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데 있다고 적용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점, 요한복음 3장 16절의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존 맥아더 · 2026-10-25
설교 내 1–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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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삶이란 무엇보다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하나의 문장, 구절, 단락, 장마다 이 중요한 진리들을 함께 나아왔습니다. 성경을 함께 여십시오. 우리 문화 속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천국을 기대합니다. 이는 설문 조사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옛 찬송가에 나오는 말처럼, 이 세상에서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만을 위한 희망만 있다면 성경은 그 사람이 모든 사람 중 가장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 죽음 너머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죽음은 완전한 마비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주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일은 이 세상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나쁜 일은 다음 세상에서 영원히 희망 없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루가복음서 16장 19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는 가장 최악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모든 비유 중 가장 끔찍한 것입니다. 이는 고통스럽고 되돌릴 수 없는 실망입니다. 주인공은 부자입니다. 그는 중심 인물이며 천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천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14절에서 언급된 바리새인들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음을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유대인일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 바리새인일 수도 있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입니다. 그의 신학은 요한의 친구들의 신학과 비슷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그들의 이해로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부자라면 좋은 사람이고, 부자라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한의 친구들은 요한이 문제를 겪을 때 그의 삶에 숨겨진 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학은 그러했습니다. 고난을 겪는 삶은 죄 많은 삶이고, 풍요로운 삶은 의로운 삶입니다. 따라서 이 의로운 부자, 이 부자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절입니다. 한 부자가 항상 보라색 옷과 고급 린넨 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식사를 하였습니다. 한 가난한 남자가 라자로라는 이름으로 그의 문 앞에 뉘어져 있었고, 상처투성이로 되어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조각조차 먹고 싶어했습니다. 게다가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죽고 천사들이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가졌습니다. 부자도 죽고 지옥에 묻혔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눈을 들어 멀리서 아브라함을 보았고,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라자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으로 물을 적셔 제 혀를 식혀 주소서. 저는 이 불꽃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 삶 동안 네가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노라. 지금은 그가 여기서 기쁨을 누리고 있고, 너는 고통받는다. 또한,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으니, 여기서 너에게 가려는 자는 못 가고, 거기서 우리에게 오려는 자도 못 온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 부모님 댁에 라자로를 보내 주소서. 저는 오 형제가 있습니다.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를 하여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게 해 주소서." 그러나 아브라함은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을 듣게 하소서."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아브라함 아버지, 죽은 자로부터 누군가 가면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않으면, 누군가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극적인 면은 분명합니다. 이 부자는 분명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죄와 의를 믿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심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천국에 가리라 믿었습니다. 이는 자의적인 종교인들의 환상입니다. 그는 천국에 가야 마땅하고, 그의 가족 모두도 마땅히 천국에 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를 통해 그들의 의로움에 대한 인증으로 여겼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너무 놀라워서, 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고통스럽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셨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경고입니다. 그리고 모든 경고는 자비롭고 동정심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기대하면서도 결국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따라서 이 전체 이야기는 계속되는 대비와 뒤바뀜으로 가득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는 대비와 뒤바뀜의 본질입니다. 네 삶 동안 네가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노라. 지금은 그가 여기서 기쁨을 누리고 있고, 너는 고통받는다. 이는 큰 뒤바뀜입니다. 라자로는 삶이 너무 힘들어 모든 존재 중 가장 불쌍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존중하셨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반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졌고, 다음 세상에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었고, 다음 세상에는 천국에 있습니다. 대비는 계속됩니다. 이야기는 처음에는 문 밖에 있는 가난한 사람과 문 안에 있는 부자로 시작됩니다. 끝나는 것은 지옥 안에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가난한 사람은 음식이 없습니다. 부자는 음식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이 잔치에 참석하고, 부자는 물 한 방울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이 모든 필요를 가지고 있고, 부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모든 필요가 채워지고, 부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개들에게 핥히며 고통받고, 부자는 호화롭게 잔치를 즐깁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아브람 곁에 서 있고, 부자는 지옥에서 외로이 고통받으며 구원받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이 고통받고, 부자는 만족하지만, 끝에서는 부자가 영원히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이 만족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테이블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조차 원합니다. 부자는 잔치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이야기의 끝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아브람의 잔치에 참석하고, 부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 이야기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합니다. 그는 대비를 위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는 이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지옥에 있는 사람은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름 없는 부자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영광스럽게 장사지내졌지만, 이름은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끔찍한 끝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게헨나, 즉 예루살렘의 쓰레기장에 던져져 쓰레기와 함께 타 버렸지만, 죽은 후에는 아브람 곁에 천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에서 돌아와 경고를 하면, 우리는 거기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지옥에서의 증언입니다. 이는 지옥의 실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으셨지만, 이 비유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보겠습니다. 삶, 19절에 보면,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보라자와 고급 린넨으로 평소에 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고 풍족하게, 과시적으로, 낭비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TV 프로그램 '부자와 더럽다'에 나올 만한 인물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항상 그렇습니다. 이는 부자가 가질 수 있는 최극한의 상태입니다. 보라자와 고급 린넨은 매우 비싼 옷이고, 그는 매일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대조적으로, 라자로라는 이름의 가난한 남자가 그의 문 앞에 앉아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극심한 빈곤을 의미합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값 없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병으로 인해 궤양과 고름이 흐르는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장애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부자의 문 앞에 놓여졌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놓인'이라는 단어는 '발로'라는 강한 단어입니다. 이는 던지다를 의미합니다. 누군가 이 사람에 대해 지쳐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누군가 이 사람이 이웃에서 빌을 구하는 것을 지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 빌을 구하는 사람을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의 문 앞에 던져 버렸습니다. '문'이라는 단어는 큰, 넓은 문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유한 사람의 저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라자로입니다. 왜 그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주께서 도우신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도우신 자입니다. 이는 고대 히브리어 이름 엘레아저와 같습니다. 따라서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옥에서 관계가 가치나 의미가 없으며,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도 없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삶의 대비는 극심합니다. 부자는 가족, 친구, 부, 생활 방식, 잔치, 호화, 존경, 필요 없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외로운, 옷을 입지 못한, 약한, 궤양이 있는, 끔찍한, 굶주린, 수치를 당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경멸합니다. 이는 그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람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면, 그를 저주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자비나 자애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 던져진 사람은 움직일 수 없고, 그저 거기 누워 있습니다. 21절입니다. 그는 부자의 테이블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라도 배고픔을 채우고 싶어 했습니다. 게다가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이는 도로 위에 죽은 동물과 같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자는 완전히 무관심하고, 자만심이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삶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입니다. 22절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브람의 품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즉시 수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노로 숨을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가엾고 가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아브람, 믿음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아버지, 믿는 자들의 아버지, 유대인 중 가장 위대한 자, 이 민족을 시작한 첫 유대인과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가난한 빌구는 사람이 죽은 후에 아브람 곁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는 장례식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브람의 품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는 그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의 육체는 아마 쓰레기통에 던져졌을 것입니다.
Gehenna는 예루살렘 바깥에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다. "게헨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옥의 개념을 얻었는데, 거기서 불이 영원히 타오르고 있었다. 이는 지옥의 그림이었다. 장례식도 없이, 완전한 수치 속에 몸을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렸다. 그를 지옥에 던져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했다. 한편, 부자는 죽고 장사지냈다. 그는 제법 제대로 된 장례식을 받았다. 둘 다 죽었는데, 우리는 모두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부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있고, 가난한 사람은 지옥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진실의 반대였다. 이는 자의적 의로움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다. 또한, 당신의 삶의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타격이기도 하다.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도 있고, 의로운 가난한 사람도 있다. 불행한 부자도 있고, 의로운 부자도 있다. 이 이야기의 문제는 세 번째 범주에 있다. 먼저 삶, 그 다음 죽음, 그리고 그 다음 죽음 이후의 삶이다. 22절. 보라, 가난한 사
부부가 싸우는 이유에 대한 예화
설교자는 부부가 왜 싸우는지, 똑같은 상황에서도 왜 다투게 되는지를 청중에게 질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자기 행복을 위해 시작하지만, 막상 결혼한 뒤에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남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힘들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이유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그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생을 왜 사느냐는 물음에 사람들은 흔히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하지만, 그들이 좋게 여기는 것과 자기에게 유익한 것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공통될 수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 대목에서 설교자는 부부 사이의 다툼을 각자의 기준이 충돌하는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같은 일이라도 나에게는 선이 되고 옆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짚으며, 선악의 판단이 자기 기준에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 예화는 자기 중심의 기준이 가정 안의 갈등과 맞닿아 있음을 일상의 경험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김재형 · 2026-10-25
설교 내 8–8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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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왜 싸울까요? 똑같은 상황에서도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 보니, 내 행복이 아니라 남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 힘들고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이유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왜 삽니까? 다들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것, 자기에게 유익한 것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공통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이야기
설교자는 여리고에 살던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준 이유를 본문 16절의 고백으로 설명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저편의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라합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정탐꾼들에게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여리고 백성들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라합에게만 그것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11장 31절을 인용하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여 순종하지 않은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는 본문을 읽습니다. 설교자는 라합의 순종을 정탐꾼을 영접한 행동으로 보며, 요즘으로 치면 다른 나라의 간첩을 숨겨 주는 일과 같다고 빗대어 설명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이스라엘이 들어오면 여리고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풀어 줍니다. 설교자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말씀이 마음에 받아들여지면 그것이 실제 삶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적용합니다.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순서이고 행위는 그 말씀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 이 예화의 메시지입니다.
김재형 · 2026-10-25
설교 내 16–1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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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히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자마음이 녹고, 너희의 고로 사람이 아닌 신을 잃었노라. 하나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이건 정탐꾼을 만났을 때 라합이 했던 얘기거든요. 그래서 라합이 그 정탐꾼을 숨겨 준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냥 숨겨 준 게 아니죠.
여리고에서 살던 라합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이 어떤 이스라엘인가 하면,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시고,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구원해 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광야에서 여러 나라들과 싸웠는데,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다 물리치고 이겼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여리고에 있으면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우리가 들었다.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다 녹아 버렸고, 너희의 연고로 우리가 정신을 잃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다 정신이 혼미해졌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뭐예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맞다. 그걸 라합이 그 사람들에게 고백한 거죠. 정탐꾼들에게 고백한 겁니다.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그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듣고 그들의 간담도 다 녹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누구에게는 없었지만, 라합에게만 그 이야기를 듣고, "아, 그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 정말이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구나"라는 것을 라합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보면, 라합의 믿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보면,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라합의 믿음을 한 단어로 표현을 하는데, 순종이라고 이야기해요.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순종치 않았기 때문에 다 멸망당했는데, 랍은 순종했다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그 순종한 게 뭐냐면, 정탐꾼들을 영접했기 때문에 그걸 순종이다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이 라합의 이야기를 보니까, 라합이 그 정탐꾼들을 받아들인 것은, 누구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세상의 신이시구나. 아, 그분만이 참된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라합이 믿었다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그 들음이 라합 안에 믿음으로 역사하게 된 거예요. 그걸 정탐꾼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건, 그 순종이라는 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기에 앞서서, 어떤 일이 먼저 있게 되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게 먼저 있게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믿음이다라고 이야기해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제 실제가 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고요. 그니까 우리가 자꾸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실제의 삶으로 나타나게 돼요. 그걸 순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젊은 시절 자기 생각만 했던 실수
설교자는 자신이 젊었을 때의 실수를 꺼냅니다. 당시 그는 교회의 일을 두고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라고 생각했고, 정작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것이 사람을 자기 생각으로 평가하고 이끌려는 육신적인 태도였음을 돌아봅니다. 이어서 사람이 하는 과정과 결과는 부자연스럽기 쉽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을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기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을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여러분도 이런 때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도록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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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의 생각
설교자는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를 예로 듭니다. 그는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는지 물으며,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뒤 유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가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성도의 삶과 연결합니다.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시기에 그분을 통해 이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고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선포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설교자는 사탄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고 경고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맞설 것을 강조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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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함
설교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뒤 가장 먼저 한 행동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던 관계에 죄로 인한 두려움이 들어와 도망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도망가는 삶이 매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을 언급하며, 두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은 옛 생각, 옛날의 자신에게 치우치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도는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옛것에 속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앞서 나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두려움이 올 때 그는 말씀에 머물러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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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광야에서 내려온 만나
설교자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날마다 내려온 만나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했던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있었지만, 매일 내려 주신 일용할 양식인 만나였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만나가 많아도 안 되고, 집안 식구 수만큼 딱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누가 와서 더 주더라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양식으로 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근거를 하나님과 함께 찾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교제인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다고 전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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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존재는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빛을 비춰 주었을 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한참 젊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건 해야지. 당연히 교회로서 해야지.' 저는 제 생각만 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결국 결과를 보게 만들어요. 내가 하는 것, 여러분이 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의 결과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오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생깁니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았던 그 가론 유다에게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사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이후에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디에 쉬었습니까?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사탄의 생각이 오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주를 주라 시인하고 계속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뭐였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옵니다.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돼 있어요. 사람마다 뭘 두려워했을까요?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3명이나 모여서 같이 성령님의 인도를 맛보고 삶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들어와야 하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의 가르침,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도망가는 것이었죠.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죄라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도망가는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보면, 출애굽하고 나서 그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갑니까? 옛날 생각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죽었던 옛자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옛날엔 이랬었지, 저했었지.' 그런데 우리는 다 새생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옛자에 속지 말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두려움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를 의심하죠? 주님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의심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단절됐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소명이 생깁니다. 여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유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코이노니아 얘기했잖아요. 거기서 무엇이 시작되죠? 나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첫 번째 누굴 나눴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눴고, 두 번째는 간증을 했고, 세 번째는 물건을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그러니까 영적으로, 혼적으로 풀리면 무엇이 풀리죠? 물질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다 풀리게 됩니다. 순서가 있더라고요. 근데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이 되고, 혼쪽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서 막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그것도 주님께 맡기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혼까지도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이루셨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제입니다. 나눔입니다. 그게 영적인 교제든, 육적인 교제든, 아니면 물건을 통한 교제든, 그 코이노니아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합에요. 누구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사람과의 연합이 됩니다. 사람이 연합이 되면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걸 통해 저변이 확대됩니다. 근데 그게 없으니까 요즘 교회는 다들 힘듭니다. 마음속에서 꺼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뭐를 꺼내 놓으면 그냥 듣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정작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고 계시니까, 그것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고백하듯이 삶 가운데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가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질 때, 주님이 서로 일으켜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면 너희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어요.' 교제.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 누구와 교제가 되죠? 지체들과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거기에서는 기도가 있을 것이고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 모양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교제가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같이 교제하다 보면, 아, 내가 내 모양이 이래서, 내 죄성이 이래서 이렇게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일부분이고, 잠시 보여지는 일부분이고, 죄를 꺼내 놓고 좋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다른 것도 같이 꺼내 놓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무언가 간증을 들어보고 그걸 판단하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고 여겨질 수 있게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때는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떤 간증이 있고, 어떤 죄성이 있어. 그걸 하나님께 고발했더니 이렇게 해 주셨어.' 이게 자부심이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그게 다가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광야 생활 중에서 제일 감사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런 것도 있지만 매일매일 뭘 내려 주셨습니까? 만나.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근데 그 만나의 양이 많아도 안 됩니다. 딱, 집안에 네 식구라면 네 개만 딱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더 주면 받아야 되나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 양식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보여지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 찾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제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 말하기를 더고 뭐라고 얘기하시죠? 듣기를 속해하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음으로써 벌써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한 분이라면, 그 한 분만 만족하시면 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떤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과 더 뛰어난 것을 불러하지 마세요. 여러분만의 그릇이 있고 저만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점진적으로 단련한 후에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단련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떤 교제를 통해, 어떤 마음을 통해 흔들리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이 수직적인 관계가 해결되면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설교자는 요한복음 13장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똑같이 씻어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발을 씻는 일이 단순히 죄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 눈높이에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누가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경지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과의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로 서로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단계나 급으로 나누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성도는 서로 높여 주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차재성 · 2026-10-25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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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은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 함께 46절을 읽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만찬, 즉 최후의 만찬이 나와요. 거기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똑같이 씻어 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씻는다는 건 죄를 같이 씻어 주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눈높이에 가서 들어주고 교제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생각이나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목적은 그 사람의 위치에 들어가서 같이 하는 거예요. 동일한 선상에서 그 사람을 통해 교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죠? '이 사람이 낮아'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높고 낫고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를 깨달았고, 어떤 사람이 B를 깨달았어요. 그들이 만나서 교제하면, 풍요롭고 좋겠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누가 있나요? 예수님이 있으니까요.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경지와 이 사람의 경지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람의 경지를 향해서 가야 합니까? 아니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기준이 있어요. 하나님과 여러분의 만남의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기준 안에서 낮아진 상태에서 서로 교제하면, 주님의 은혜가 있고, 서로 오해가 아니라 높고 낮음이 없는 교제가 됩니다. 교제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얘기한 걸 들어주고,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해야 돼'라는 명령이 아니라, 서로 은혜 나누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교제, 코인노니아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교제에 대해 도시락을 만드는 거예요. 원 스텝, 투 스텝, 쓰리 스텝, 4단계 이런 게 아니에요. 교제는 주님 안에서 하나면 돼요. 거기에 그레이드를 나누거나, 어떤 급을 나누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걸 사랑하고 서로 높여 주는 게 맞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방법은 내려가서 씻어 주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주셨어요. 그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만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믿음을 가지고 누구를 권면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 처음에 나온 내용은 그런 거예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돼 있어요. 그 가르침을 받으면, 위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에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그렇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 개개인이 교회예요. 교회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역할의 본질은, 서로 낮아진 상태에서 죽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돼 있어요. 이건 성만찬이죠. 떡은 말씀이죠. 누가복음 22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다가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고 돼 있어요. 떡은 몸,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기념해야 하는 거예요. 공동체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는 건,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예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교제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교제하면서 내가 높아지거나, 여러분이 높아지면 안 돼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높아져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자리에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 역할들이 안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안 돼요. 그걸 기념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거예요. 육적인 건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건 맞지만, 서로 교제하면서 음식을 나누고, 떡을 떼고 음료를 마시는 건 맞지만,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건 영적인 삶, 영적인 풍요로움을 얘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58절을 보겠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돼 있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먹은 사람들인 거예요. 그럼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리고 얘기합니다.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해요. 영원히 산다. 이 떡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 천국 백성이잖아요.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이요. 그런데도 여기서 우리가 '높다, 낮다'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그 목적을 만들려고 하는 사탄에게 속는 게 문제예요. 그것들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시고, 주님께 가져가시면, 주님께서 다 흠량하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해결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몸이고 참된 피라. 이것을 먹는 자는 영원하다. 이 말씀이 성만찬의 의미예요. 우리가 이미 성만찬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주님을 기념해야 해요. 계속해서 성령님과 함께 기념하는 삶이 되면, 어떠한 교제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고,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초교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주님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꺼내 놓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돼 있어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고,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해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사건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세상 가운데 주님과 없을 때,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거예요. 그 사실들, 그 영적인 교제들이 있을 거예요. 그 하나됨을 왜 바울이 강조하겠어요? 그동안 바울 서신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결국 예수님을 다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힘든 상황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 하나라는 걸 반증하려는 거예요. 성령이 너희로 하나되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교제 속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갇힌 자들이기 때문에, 절대 분열이 없어요. 분열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문제인 거예요. 내가 문제인 거지,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을 발견해서 서로 주님과 사귐이 있을 수 있게끔,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초대교회도 이러한 문제가 없었을까? 있었어요.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로 버텼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