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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4 / 32쪽 · 한 쪽 20개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 방식

설교자는 사도행전의 아덴을 예로 들어, 자기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체험을 주고받는 대화가 결국 비교로 흐르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상대가 자신의 경험이 더 놀랍다고 말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그 답으로 아덴에서의 바울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생각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짚으며, 그들이 예배하는 그분이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사람이 언제 어디서 살지를 정하신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랑하기보다, 나를 넘어 저 밖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완전하시며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진리가 역사와 역경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점을 적용으로 삼습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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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당신에게 방금 천사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 당신 안에서 일어난 일보다 더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덴에서의 바울처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일들에 대해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예배하는 그분은 알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이 언제 살고 어디서 살지를 정하셨습니다. 그분은 능력이 있으시고, 완전하시며,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역사와 역경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을 바꾸십니다. 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청지기 방식으로 바뀐 예배와 일터

설교자는 허버트의 글을 인용합니다. 허버트는 모든 일에서 나의 하나님과 왕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무엇을 하든지 그분을 위해 하기를 구합니다. 이 목적을 가진 종은 고된 일을 거룩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 빗자루질을 하는 자는 그 행동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근거로 주일과 엿새의 일이 이루는 삶의 순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일과 다른 압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우리 자신을 드리게 하셨으며, 이것이 삶에 실재의 모습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이를 이해하면 일하는 방식과 예배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월요일에 주일의 시간을 잠깐 가진 것으로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19–19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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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서 나의 하나님과 왕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당신을 위하여 하게 하소서. 이 목적을 가진 종은 고된 일을 거룩하게 만들고, 당신의 율법을 위해 빗자루질을 하는 자는 그 행동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스코틀랜드 친구의 찬양과 두려움

설교자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친구가 차 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그 노래는 '오, 교제가 얼마나 좋은가, 오, 신적인 기쁨이여,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였고, 친구는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라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설교자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섬기는 말이었고, 제자인 친구가 스승을 가르치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 자신은 운전 중에 해야 할 일과 고쳐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수요일도, 내일 아침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문제를 눈앞에 쌓아 올렸습니다. 설교자는 그 모습을 271번 도로 남쪽에서 아이거를 눈앞에 쌓아 올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때 친구의 노래가 들려왔고, 기댈 팔이 없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다른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22–22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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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 있는 제 친구 한 명이 있습니다. 어제 차를 몰고 가면서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오, 교제가 얼마나 좋은가, 오, 신적인 기쁨이여,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습니다.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 그는 제 영혼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제 제자인 그가 저의 스승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내야 할까? 저것은 어떻게 고쳐야 할까? 다음 일은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수요일까지 버틸 수 없어. 나는 절대 수요일까지 가지 못할 거야. 내일 아침까지도 버틸 수 없어.' 그리고 여러분은 눈앞에 그 모든 것을 쌓아 올립니다. 마치 271번 도로 남쪽에서 눈앞에 아이거를 쌓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영원하신 팔에 기대어.' 그러나 내가 기댈 팔이 없다면, 나에게는 두려워할 모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두려워할 다른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수많은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자전거 위 어깨 사이에 누운 개

설교자는 여행 중 작은 마을 길가에서 본 장면을 전합니다. 머리가 긴 청년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개는 주인의 어깨뼈 사이에 누워 있었고 앞발은 주인의 앞에서 교차되어 있었습니다. 동행한 수는 자전거가 거리를 달리는데도 개가 그렇게 신뢰하는 모습이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개는 한 번도 놀라거나 움직이지 않고 편히 쉬고 있었습니다. 20분쯤 뒤 다른 곳에서 같은 남자와 자전거, 개를 다시 보았는데 똑같은 장면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는 산책로에서 그들과 다시 마주쳤고, 남자가 다가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개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수가 강아지 때부터 키웠는지 묻자, 남자는 개가 꽤 나이가 들었을 때 보호소에서 구조해 왔고 그때부터 줄곧 자신을 믿고 따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에서 신명기 33장 12절의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분 안에서 안전히 거하리니'라는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 개가 핏불이었다고 밝히며, 살기를 내뿜고 살인을 일삼던 다소 사람 사울이 구원받아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어깨 위에 안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알기에 완전한 안전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24–27문단 · 예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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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여행하면서 많은 다른 것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작은 어느 마을의 길가에 서 있었을 때 둘 다 동시에 이것을 알아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길었습니다. 그것이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결국 눈에 띈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띈 것은 개가 있던 위치였습니다. 그는 자전거에 앉아 있었고, 개는 그의 어깨뼈 사이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 사람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제 자전거이고, 여기 제 개가 있고, 그의 머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콧소리] 뒤에서 보면 제 개의 등이 제 어깨뼈 사이에 누워 있고, 뒷발은 이렇게 아래로 내려와 있으며, 꼬리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개의 머리 앞쪽에는 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주인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의 앞발은 이렇게 그의 앞에서 교차되어 있었습니다. 수가 제게 말했습니다. '개가 그렇게 신뢰할 수 있다니 놀랍다. 특히 자전거가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 말이야.' 그 개는 한 번도 놀라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20분쯤 뒤, 우리가 걷던 다른 곳에서 같은 남자, 같은 자전거, 같은 개를 다시 만났습니다. 똑같은 장면이었죠. 저것 좀 보세요.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우리는 자전거와 그 남자, 그리고 그 개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계획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우리는 산책로 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오고 있습니까? 바로 그 남자와 개입니다. 그가 다가와서,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다른 사람에게 멈춰 서서 말을 겁니다. 그리고 개는 저렇게 가만히 있습니다. 그때 수가 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개가 당신에게 그렇게 몸을 맡기고 그토록 편안하게 누워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강아지 때부터 키우셨나요?」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이 녀석이 꽤 나이가 들었을 때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보호소에서 구조해 왔더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저를 믿고 따릅니다.」 그 말을 듣고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신명기 33장의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아,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그 개가 어떤 종류였는지 궁금하시죠?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말씀드리면, 핏불이었습니다. 핏불이요. 제가 핏불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다소 사람 사울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불을 뿜듯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살인을 일삼던 핏불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분의 어깨 위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아들이라는 뜻의 바디메오 이름 유래

설교자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이름 없이 '한 소경'으로 나오는 사람이 마가복음에서는 바디메오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바'는 아들을 뜻하는 말이어서 바디메오는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그에게는 고유한 이름이 따로 없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린 셈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이름 짓는 방식이 이스라엘이나 서양 사람들에게 흔하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오사마 빈라덴의 '빈'이 아들을 뜻한다는 점, 빈살만이 살만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점을 듭니다. 영어권의 데이비드슨, 로버트슨, 존슨 같은 성도 모두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방식을 쓰지 않는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그러면서 이적과 표적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 대부분이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데, 이 소경만은 마가복음에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차이를 통해 바디메오가 성경에서 특별히 기억된 사람임을 전하려 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3–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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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35절, 오늘 본문과 그 뒤에 이어지는 19장까지 연결해서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은 여기 누가복음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그냥 한 소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똑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에 가서 보면 그 사람 이름이 바디메오라고 합니다. ‘바’ 하는 말은 아들이란 말이고, 디메오의 아들, 그러니까 자기 이름도 따로 없고 그냥 디메오의 아들이다, 그게 이름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서양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러 그렇게 합니다. 자기 따로 이름이 없고 아버지 이름에다가 벤이나 빈 이런 걸 붙여요. 오사마 빈라덴 할 때 빈이 벤이야. 아들이란 말이에요. 빈살만, 살만의 아들. 이런 식으로 영어로 하면 다윗의 아들 데이비드슨, 로버트슨, 존슨, 이런 게 전부 다 누구 아들이라는 말이에요. 제 이름도 없고 누구 아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어쨌든 이 사람은 디메오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각을 대신한 청각으로 믿음을 얻은 맹인 바디메오

설교자는 바디메오가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듣는 감각이 매우 발달했다고 말합니다. 시각 장애인은 모든 정보를 청각과 촉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듣는 능력이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시각 장애인 김선태 목사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김선태 목사는 점자로 성경을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으며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소개됩니다. 설교자는 바디메오도 그런 청각을 통해 여러 소문과 말씀을 듣고 판단하는 힘을 길렀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사렛 예수'라고 부를 때, 그는 들은 내용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여기서 믿음이 보는 데서 나지 않고 들음에서 나며, 이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고 적용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에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과 대비해, 잘 듣고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18–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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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는 볼 때 이 시각 장애인 바디메오가 비록 눈은 보지 못하지만 우리보다 더 발달된 기관이 있는데 청각이야. 청각, 듣는 감각.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정보가 청각과 촉각, 만져 보는 것, 듣는 것, 이런 기능이 굉장히 민감하게 발달해요. 제가 처음에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이 년을 공부할 때 어떤 특강하는 강사가 오셨는데, 김선태라고 하는 목사예요. 김선태 목사가 시각 장애인인데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여러분, 성경을 아마 다 외우다시피 하는 것 같아. 우리는 눈이 보이니까 그냥 스르르 읽어 지나가거든요. 이 사람들은 점자를 가지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으니까 굉장히 정밀하게, 세밀하게 읽고 그걸 생각하면서 읽어요. 눈이 안 보이니까 휙 지나가는 게 아니고 한 자를 더듬어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자기는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대. 정전된 거나 전기 들어온 거나 똑같으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대요. 얼마나 밝은 눈을 갖고 있느냐? 착착착착 해서 계단을 올라서 어디 몇 걸음 딱딱 가서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탁 꽂으면요. 요즘은 번호 키를 하지만 옛날에는 열쇠 구멍 있잖아요. 바로 쏙 하는 거예요. 더듬지도 않고 착착착 하면 돼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는데 자기는 점점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굉장히 촉각이 민감하고, 걸음도 우리보다 실족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매번 더듬어서 가니까. 우리는 까불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빠지고 하는데 이분은 범사에 조심조심하고, 듣는 걸 굉장히 민감하게 듣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뭐냐면 보는 데서 나는 게 아니고 들으면서 나는 거예요. 잘 듣는다는 거예요. 이 바디메오도 눈이 안 보이는 대신에 귀가 많이 발달했어요. 눈에 보이면 자꾸 생각이 보이는 대로 바뀌니까 우리 마음이 길바닥처럼 되는데, 보이는 게 없으니까 그런 걸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으로 볼 때,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거예요.

김선태 목사와 점자 성경 공부

설교자는 성경학교에서 이 년간 공부하던 시절 특강을 하러 온 강사 김선태 목사를 소개합니다. 김선태 목사는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성경을 매우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전하며, 비장애인인 자신들이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것과 대비합니다. 김 목사는 점자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었기 때문에 훨씬 정밀하고 세밀하게 말씀을 읽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 휙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글자를 더듬어 기억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정전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우리에게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19–2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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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에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이 년을 공부할 때 어떤 특강하는 강사가 오셨는데, 김선태라고 하는 목사예요. 김선태 목사가 시각 장애인인데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여러분, 성경을 아마 다 외우다시피 하는 것 같아. 우리는 눈이 보이니까 그냥 스르르 읽어 지나가거든요. 이 사람들은 점자를 가지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으니까 굉장히 정밀하게, 세밀하게 읽고 그걸 생각하면서 읽어요. 눈이 안 보이니까 휙 지나가는 게 아니고 한 자를 더듬어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자기는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대. 정전된 거나 전기 들어온 거나 똑같으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대요. 얼마나 밝은 눈을 갖고 있느냐? 착착착착 해서 계단을 올라서 어디 몇 걸음 딱딱 가서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탁 꽂으면요. 요즘은 번호 키를 하지만 옛날에는 열쇠 구멍 있잖아요. 바로 쏙 하는 거예요. 더듬지도 않고 착착착 하면 돼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는데 자기는 점점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다섯 가지 인생 유형과 바디메오·삭개오

설교자는 오래전 성경을 보다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몇 가지 유형이 있다고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쓴 책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구약편과 신약편으로 나뉘어 있다고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사람, 처음이 어렵고 나중이 좋은 사람, 처음은 좋았으나 끝이 나쁜 사람, 변덕이 심해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다섯 유형을 나눕니다. 그중 처음에는 어렵다가 나중에 좋아진 대표적인 사람으로 바디메오와 삭개오를 듭니다. 바디메오는 선천적으로 불행을 타고났고, 삭개오는 후천적으로 돈을 좇다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끝이 좋았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경험도 나눕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학업을 중단했다가 스물아홉 살에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동창들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을 알게 된 후 나중에 나아졌다고 고백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30–3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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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 번째, 처음에 어렵다가 나중에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처음부터 시종일관 좋으면 제일 좋죠. 그런데 여기 처음에 잘된 사람 누가 있어요? 나부터 처음에 참 불행했어. 너무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공부를 하다가 그만둬 버렸거든요. 초등학교 하다가 때려치우고 삼 학년까지 가고, 그다음에 중학교 하고 또 때려치우고, 그래서 스물아홉 살 때 고등학교를 갔어요.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를 가야 되는데 스물아홉 살에 고등학교에 가니까 다른 사람보다 십삼 년이나 둘러서 학교에 가는 거예요. 그래도 나중에 제가 동창회에 가 보니까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안 그럴 수 있는데 나는 내가 볼 때 내가 제일 잘된 것 같아.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의 잘 몰라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우리 동기 동창, 초등학교 동창들, 중학교 동창들 가 보니까 몇 사람 안 돼. 초등학교 동창 중에 한두 사람, 중학교 동창 중에 한두 사람, 그게 다야. 그래서 저도 어쩌면 처음보다 나중에 조금 나아졌지 않느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정말 나중이 좋아진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박 집사의 극동방송 질문 일화

설교자는 창원에 살던 시절 극동방송에서 진행한 생방송 성경 질문 프로그램을 회상합니다. 청취자가 전화로 질문하면 아나운서와 함께 답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그중 부산에서 전화를 걸어오던 박 집사라는 청취자가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박 집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늘 질문을 두 가지씩 가져왔고, 질문의 수준도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어떤 질문은 설교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서 당황했지만,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해 보니 틀린 대답은 아니었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박 집사의 전화가 올 때마다 긴장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점자로 공부하며 한 글자씩 더듬어 생각했기 때문에 허술한 답을 쉽게 넘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일화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묻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 주는 예로 소개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56–57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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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극동방송, 창원에 살 때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해서 생방송으로 전화로 질문이 들어오면 아나운서하고 같이 대답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했는데, 부산에서 어떤 박 집사라는, 이름은 잘 모르겠고 박 집사입니다. 전화가 오는데 꼭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리 한 가지만 못 해. 꼭 질문 두 가지를 갖고 와요. 그리고 질문 수준이 제일 높아. 정말 물어볼 만한 걸 묻고, 어떤 경우는 내가 그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못 했던 질문이 푹 나왔는데 제가 당황했어요. 어떻게 둘러대고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까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런 정도였어요. 그 사람은 자주 전화가 오는데 그 사람 전화가 오면 내가 긴장이 돼요. 또 무슨 뾰족한 걸 물어서 나를 궁지에 빠뜨릴까? 왜 그러냐?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 보니까 대충 지나가는데, 아까 말했듯이 점자 한 자 한 자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서 생각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조금 잘못한 걸 또 더듬어 보고 이렇게 재미를 보는 거예요.

삭개오의 외로움과 나무 위 만남

설교자는 세리장 삭개오가 돈은 많았지만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고 설명합니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모두 얼굴을 돌려 피해 가니, 돈만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삭개오는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았다는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세리인 그가 예수님을 찾아가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세금을 착복한 죄만 드러날 것 같아 쉽게 나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아침 일찍 거리에 사람이 없을 때 뽕나무, 설교자의 말로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아 사람들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길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의 그를 올려다보며 이름을 부르셨고, 오늘 밤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직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61–7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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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삭개오가 부자라는 거예요. 부자인데 뭐가 없느냐? 돈은 있는데 친구가 없어.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다 외면해 버리고 피해 가 버리고 그래. 이런 돈 있어 봐야, 온 여리고 사람들이 다 그러면 무슨 만족이 있겠냐고. 돈이면 행복할 줄 알지만 돈 갖고는 아니야. 그래서 많이 외로워졌는데 이 사람이 소문을 들었을 거라. 한 삼 년 전부터 무슨 소문이냐? 저 가버나움의 마태를 잘 알지. 세리 세계가 많은 인원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예수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자기가 아는 마태라는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네. 세상 이상해. 그래서 너무 외롭고 외롭고 하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저는 한 번 부산의 어떤 병원에 가 있는데 옆 야구장에서 야구를 하면서 함성 소리가 병원 창이 막 떨릴 정도로 나는 거예요. 나는 내 평생 한 번도 야구 보러 간 적이 없어요. 야구장에 간 적도 없고 축구 보러 간 적도 없고 그런 거 보러 간 적이 없는데, 그때 야구 선수 누가 오고 하면 그 앞에 여고생들이 그 선수가 자는 호텔에 떼로 몰려와서 이름을 부르고 그런다네. 참 희한하다. 한편으로 그때 나는 인정도 메마르고 눈물도 없고, 그런 배우나 이런 사람도 보고 싶지가 않아요. 산청에 보면 옛날에 극장이 있었어요. 공회당이라 하는 데가 있었는데 거기에 최무룡이 오셨다는 거예요. 오시면 내가 거기 가 볼 일이 뭐 있어? 보면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왜 가? 거기를 가려면 육 킬로미터, 칠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돼. 그걸 보러 간다고? 그걸 보면 뭘 한대? 또 김지미가 온대. 김지미가 온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제가 그렇게 마음이 메말라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이렇게 마음이 메말라서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아서 되겠나? 저는 그때 청년들, 학생들 하는 게 더러 마음에 안 들고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마음이라고 봐요. 저는 누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으니까 얼마나 내 마음이 삭막한지요. 여러분, 삭개오는 모든 친구가 다 없어지고 돈은 있는데 친구는 없어.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가 아는 마태를 제자로 삼았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그냥 예수님이 보고 싶은 거야. 세리인 자기가 어려운 사람 같으면 예수님을 찾아가거나, 아픈 사람이 찾아가거나 하겠는데, 자기는 돈도 많고 무슨 명분으로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금을 많이 짜내서 착복한 죄만 드러날 텐데 갈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안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보고 싶어. 저는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다, 하다못해 탤런트나 배우나 스포츠 스타나, 누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아주 인간성이 남아 있고 좋은 심리라고 봐요. 어쨌든 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그런데 마침 소문이 들리기를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그 기회도 마지막 기회야,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네. 가서 봐야지. 그래서 아침밥을 일찍 먹고 거리에 사람들이 안 나올 때 나무에 올라갔어. 성경에 보면 뽕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에요. 뽕나무가 아니고 돌무화과나무인데, 여러분, 무화과하고 뽕나무가 과가 같아요. 돌무화과, 야생 무화과나무인데 여리고에 가면 지금도 그 나무인지 모르지만 굉장히 큽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나무가 커요. 올라가서 나뭇잎 뒤에 싹 몸을 숨기고 그냥 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한다는 게 아니고 내가 보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심리,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남아 있다는 건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숨어서 보는데 왜 올라갔냐면 키가 작아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이 지나가도 못 봐. 길바닥에 있으면 못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람들이 막 에워싸고 가기 때문에 못 봐. 앞에 가고 뒤에 가고 하니까 못 볼 것 같아서 자기가 나무에 올라가면 잘 보이죠. 그래서 보고 있는데 보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제자하고 어떤 여인들하고 좌편에 우편에 쭉 사람들이 함께 갑니다. 지나가면 될 텐데 삭개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도 안 깜빡이고 보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 밑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위를 쳐다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나는 삭개오가 오줌을 싸지 않았겠나?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름을 덜컥 불러 봐요. 보기라도 하고 싶다,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데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하고 가야 되겠다.” 세상에, 여러분, 나는 삭개오가 내려왔는지 후루룩 떨어졌는지 몰라. 그냥 놀라서 떨어지지 않았겠나?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야 되겠다고 하는 바람에 막 내려왔어요. 그때 삭개오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을 거라.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시지, 이름을 탁 불러 버리면 어떻게 해? 세리장은 그 마을에서 지역 유지급이나 되는데 나무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들통났잖아. 그러나 상관이 없어요. 그냥 내려와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입니다.

부산 병원 근처 야구 함성과 최무룡·김지미 공연 이야기

설교자는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때의 경험을 나눕니다. 병원 옆 야구장에서 함성이 얼마나 크게 울렸는지 병원 창문이 떨릴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평생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가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유명 야구 선수가 오면 여고생들이 그가 묵는 호텔에 몰려가 이름을 부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전합니다. 또 산청 공회당에 배우 최무룡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육칠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고, 김지미가 온다고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때 자신의 마음이 메말라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청년들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인간성이 남아 있는 좋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삭막했던 마음과 대비하며,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삭개오의 간절함과 이어진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62–64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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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번 부산의 어떤 병원에 가 있는데 옆 야구장에서 야구를 하면서 함성 소리가 병원 창이 막 떨릴 정도로 나는 거예요. 나는 내 평생 한 번도 야구 보러 간 적이 없어요. 야구장에 간 적도 없고 축구 보러 간 적도 없고 그런 거 보러 간 적이 없는데, 그때 야구 선수 누가 오고 하면 그 앞에 여고생들이 그 선수가 자는 호텔에 떼로 몰려와서 이름을 부르고 그런다네. 참 희한하다. 한편으로 그때 나는 인정도 메마르고 눈물도 없고, 그런 배우나 이런 사람도 보고 싶지가 않아요. 산청에 보면 옛날에 극장이 있었어요. 공회당이라 하는 데가 있었는데 거기에 최무룡이 오셨다는 거예요. 오시면 내가 거기 가 볼 일이 뭐 있어? 보면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왜 가? 거기를 가려면 육 킬로미터, 칠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돼. 그걸 보러 간다고? 그걸 보면 뭘 한대? 또 김지미가 온대. 김지미가 온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제가 그렇게 마음이 메말라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이렇게 마음이 메말라서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아서 되겠나? 저는 그때 청년들, 학생들 하는 게 더러 마음에 안 들고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마음이라고 봐요. 저는 누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으니까 얼마나 내 마음이 삭막한지요.

삭개오의 재산 절반 나눔과 네 배 배상

설교자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뒤 보인 결단을 전합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다고 말하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그에게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도 삭개오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약속했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약속을 따르면 재산이 거의 남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삭개오가 그로 인해 거덜이 나도 좋다고 여겼다고 말합니다. 친구 하나 없이 외면당하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두 제자와 함께 대접하게 되었다는 점도 설교자는 주목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셨음을 전합니다. 설교자는 삭개오가 돈 귀신에 홀렸다가 돈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었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73–76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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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있는데 삭개오가 뭐라 하느냐?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일단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겠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것은”, 토색했는가 봐, “토색한 것은 네 배씩 다 갚아 주겠습니다.” 보나 마나 절반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남은 절반을 가지고 토색한 것을 네 배로 갚아 버리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내가 볼 때 별로 남은 게 없겠어. 거덜 나는 거야. 이제 예수님 때문에 쫄딱 망했어. 그래도 좋다는 거야. 친구 하나 없이 길에서 만나면 얼굴을 휙 돌려 버리던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만 만난 게 아니잖아. 열두 사도가 더 왔어요. 여러분, 지금은 예수님을 예언자 정도, 마태 같은 세리를 제자로 받아 준 예언자 정도로 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잖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열두 사도를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할 수 있었다. 이게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일단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봐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한때 돈의 맘몬 귀신, 돈 귀신에 홀려서 돈을 좇아갔지만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삭개오가 아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게 아니고, 그냥 앞에 있는데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너 이거 토색했지?” 이렇게 한 게 아니야. 아닌데 삭개오가 그런 고백을 하고 다 있는 데서 그런 약속을 한 겁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상선약수 비유

설교자는 물이 어떤 더러운 물도 받아들이고 바다에서 정화되어 다시 맑은 물로 비에 실려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물은 구정물이나 흙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결국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노자가 말한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에 빗댑니다. 물처럼 온갖 이로움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삶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가르침을 현대 사회의 경쟁 문화와 대비합니다.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경쟁해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에서 남의 것을 털어먹으려 하며, 서울로 가려는 욕망도 그런 데서 나온다고 비판합니다. 설교자는 삭개오와 바디메오처럼 예수님이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점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노우호 · 2026-10-26

설교 내 78–79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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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한 번 말씀드렸죠. 유교 문화라든지 오늘 현대 한국 문화라는 것은 죽기 살기로 경쟁해서 높은 데 올라가서 남의 것을 털어먹고 짜먹고 편하게 놀고먹고 이런 걸 하잖아. 반면에 유교가 아니고 도가 같은, 노자, 장자 이런 사람을 따라갔던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는 거 안 가고 아래로 내려가고, 물처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면서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요. 여러분, 물을 봐요. “구정물은 안 돼. 흙물은 안 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물도 좋아. 가져와라. 그리고는 바다까지 가서 소금 있는 데까지 가서 정화해서 또다시 맑은 물로 비에 실어서 여기까지 가져오는 거 봐요. 그래서 노자가 가장 고차원적인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상선약수라, 물과 같이 온갖 이로움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거예요.

저항력을 기르는 것에 비유한 질병과 감염

설교자는 에베소서 3장 16절의 기도에서 사도가 성도들을 위해 구한 첫째 내용이 물질적 형편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는 영적인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을 만날 때 어려움 자체를 살피거나 그것에 직접 조치를 취하는 데 머물기보다 속사람을 세우는 데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설교자는 질병과 감염에 관한 일상적인 이해를 끌어옵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하거나 감염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염 자체보다 자신의 저항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비타민 등을 그토록 강조하는 현상이 바로 이 사실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고, 건강한 몸이 끊임없이 공격하는 여러 세력에 저항할 수 있듯이, 속사람이 강건해야 영적 싸움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사도가 기도를 통해 제시하는 전략이 바로 이런 것이며, 그것은 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청중이 어려움 앞에서 상황만 바라보기보다 속사람의 힘을 기르는 데 먼저 마음을 두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4–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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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사도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는지 말합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영적인 기도입니다. 그는 그들의 물질적 형편이나 자기 자신의 물질적 형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큰 전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에 대처하는 길은 어려움 자체를 살피거나 그것에 직접 무슨 조치를 취하는 데 주로 있지 않습니다. 이 속사람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이기며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됩니다. 감염 자체보다 자신의 저항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에서 비유를 들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하거나 질병과 감염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저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비타민 등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건강하면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병들게 하려는 여러 세력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우리가 처한 영적 싸움에 관한 기도를 통해 제시하는 전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이며 구체적입니다.

스펄전이 말한 평범한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은혜의 경지

설교자는 찰스 해던 스펄전의 말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또 다른 높은 자리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스펄전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보다 높은 것만큼, 평범한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은혜의 경지가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설교자는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수준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스펄전은 그 위에 또 하나의 자리가 있다고 상기시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모든 차원에서 알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다고 참으로 믿는다면, 그 자리가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수준보다 높은 정도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만큼 크다는 데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청중에게 스스로 점검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고 계신가, 아니면 평범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14–1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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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자리에 있어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찰스 해던 스펄전이 한 말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스펄전은 이 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보다 높은 것만큼, 평범한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은혜의 경지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하므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 안에는 어떤 경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장에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보다 높은 것만큼 평범한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지점이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이고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리는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있고, 비그리스도인은 저 아래 있습니다.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또 다른 자리가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그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수준이 비그리스도인의 수준보다 높은 것만큼,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수준보다 높은 자리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실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 사랑을 그 모든 차원에서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 자리가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수준보다 높은 정도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만큼 크다는 데 곧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옥의 그늘과 워즈워스의 말

설교자는 워즈워스의 말을 인용하며 아이에 관한 비유를 설명합니다. 워즈워스는 "감옥의 그늘이 자라나는 소년을 에워싸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합니다. 아이에게 원래 죄가 없다거나 본래 불멸성과 완전함이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려는 요지는 아이가 무지하기 때문에 주변 세상의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늘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이는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여 겉으로 보이는 대로 세상을 받아들이며, 그 안의 추악함은 자라면서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의 새사람에게 적용합니다. 회심한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이며, 연약하고 보호와 강건함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21–2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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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언제나 아기 때, 곧 유아기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늘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아이는 모르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세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있는 추악함과 더러운 것들을 모릅니다. 자라면서야 비로소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아기에게 죄가 없다거나 아기가 무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불멸성과 완전함이 본래 있다가 “감옥의 그늘이 자라나는 소년을 에워싸기 시작한다”는 워즈워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아이가 무지하기 때문에 위험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나그네와 뱃사람의 비유 및 전쟁 후 생존자의 식사

설교자는 핸들리 물 주교의 글을 소개하며, 굶주린 나그네가 음식을 먹는 데 힘이 필요하냐고 묻고, 길 잃은 뱃사람이 도선사를 갑판에 맞아들이는 데 힘이 필요하냐고 묻는 비유를 전합니다. 물 주교는 그런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답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며, 그 주교의 자기 예화에 비추어 보아도 오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난 전쟁 때 어뢰 공격을 받고 뗏목이나 구명정에서 여러 날을 보낸 사람들, 혹은 강제 수용소에서 굶주림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자유를 얻고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푸짐한 식사를 차려 주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그들을 죽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정맥으로 포도당을 주입하고 여러 추출물을 공급해야 했고, 그 뒤에야 살짝 삶은 달걀처럼 가벼운 음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려는 그리스도와 그 능력이 너무 강하고 커서, 먼저 강건해져야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29–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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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므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은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사례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경건한 핸들리 물 주교가 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명과 빛을 받아들이는 데 왜 지극히 큰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까?” 그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가 강건해져야 한다니, 그런 말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굶주린 나그네가 먹지 않으면 곧 쓰러질 음식을 먹기 위해 힘이 필요합니까? 길을 잃은 뱃사람이 자신을 소망하는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도선사를 갑판에 맞아들이는 데 힘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증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여기에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힘이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힘을 받아들이는 데 어떻게 힘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광야를 헤매던 사람을 예로 듭니다. 그 사람에게 힘을 줄 음식을 먹는 데 힘이 필요합니까? 또는 배를 타고 대양에서 길을 잃은 뱃사람이 길을 아는 도선사를 배에 맞아들이는 데 힘이 필요합니까? 그 도선사가 올라와 그를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말씀이 반드시 이런 뜻이어야 한다고 이어서 말합니다.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능력을 무서워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할지 염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 자체는 전적으로 참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특정한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서는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 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므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거기에 매우 분명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 자신이 든 예화에 비추어 보아도 오류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먹지 못한 사람이 자신에게 힘을 줄 음식을 먹기 위해 힘이 필요하냐고 묻고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저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감히 그 답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전쟁 때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자주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뢰 공격을 받고 바다 위 뗏목이나 구명정에서 여러 날을 보낸 사람들, 또는 강제 수용소에 갇혀 굶주림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자유를 얻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푸짐한 한 끼를 차려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들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기와 채소 등을 듬뿍 차린 식사를 주면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든든한 식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먼저 그의 기력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정맥으로, 혈액 속으로 포도당을 주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추출물을 공급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뒤에야 아주 살짝 삶은 달걀 같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양분이 많지 않지만, 그저 조금이라도 가벼운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너무 벅차지 않은 음식이어야 합니다. 쇠약하고 기진한 사람은 도무지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내세운 논증 자체에 비추어 보아도, 제 생각에는 그 입장 전체가 잘못되었으며, 이 대목에서 사도의 기도가 지닌 영적 의도를 분명히 놓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젖과 단단한 음식 비유

설교자는 히브리서 저자가 5장에서 청중에게 젖만 먹였다고 말한 구절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단단한 음식은 어른이 된 사람, 성장하고 발달한 사람, 그 감각이 사용을 통해 훈련된 사람에게 알맞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에게 붉은 고기 같은 단단한 음식을 주면 심한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심하면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젖을 줍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영적인 성장에 적용합니다. 영적으로 자라지 않은 신자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러므로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깊은 가르침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34–3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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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려는 것은 너무나 강력하고 크고 힘이 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강건해져야 합니다. 다른 논거,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자기 편지 5장에서 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못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젖만 먹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어른이 된 사람들, 성장하고 발달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붉은 고기, 단단한 음식을 주면 심한 소화불량을 일으킵니다. 심하게 아프고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단단한 음식을 주지 않습니다. 젖을 줍니다. 단단한 음식은 그 감각이 사용을 통해 훈련된 사람들, 성장한 사람들,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강한 사람들에게만 알맞습니다.

디 엘 무디가 길에서 겪은 성령 체험

설교자는 뉴욕 월가를 걷던 디 엘 무디에게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성령이 임하셨던 경험을 전합니다. 무디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 경험은 너무나 엄청나고 영광스러워서 자신이 과연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실제로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길거리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손길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나중에는 자기 방에서도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경험의 본질을 초월적인 영광의 위대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들어오실 때 그 영광과 능력이 너무 커서 육체가 그 아래 무너지는 듯하고 온몸이 떨리고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조너선 에드워즈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경험에서도 같은 증언을 발견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담아내려면 속사람이 강해야 하며, 사도가 성령으로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37–38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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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여러 성도의 경험을 읽어 보면 충분히 확인됩니다. 어느 날 오후 뉴욕 월가를 걷던 디 엘 무디에게 찾아온 경험을 저는 여러분에게 자주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갑자기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경험은 너무나 엄청나고 영광스러워서 자신이 과연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실제로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길거리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손길을 거두어 주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방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영광의 초월적인 위대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들어오실 때 그 영광과 능력이 얼마나 큰지, 육체 자체가 그 아래 무너지는 듯하고 온 사람이 떨리고 진동합니다. 조너선 에드워즈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같은 사람들의 경험에서도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모두 이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믿음으로 마음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담아내려면 강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강한 전기를 담는 용기의 벽

설교자는 전기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비유를 듭니다. 강력한 전기력을 어떤 용기 안에 담으려면, 그 용기의 벽이 보강되어 그 힘을 견딜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 안의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종이로 된 벽이나 나무로 만든 벽 안에 그것을 넣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에 적용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을 담을 속사람의 벽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기도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담을 그릇이며, 그 그릇이 견고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39–39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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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여 주는 비유는 많습니다. 전기의 세계 같은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강력한 전기력을 어떤 용기 안에 넣으려면 그 용기의 벽이 보강되어 그것을 견딜 수 있는지 아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종이로 된 벽이나 나무로 만든 벽 안에 그것을 넣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에너지와 힘 때문에 정말 강한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가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