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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24개 · 1 / 2쪽 · 한 쪽 20개

겟세마네에서 잠든 제자들

설교자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고민하며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을 함께 읽으며,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돌아와 본 제자들은 마귀가 들린 듯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우시며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예, 주님' 하고는 또 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깨워 기도시켜도 다시 자는 모습이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땀을 피같이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과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강하게 대조하며,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위기 앞에서 준비되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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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을 제가 발견했어요. 기도해야 할 때 졸았어요. 기도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에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고민을 하셨는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죠. 예수님이 고민하여 죽게 되는데 너는 왜 자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죠.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통곡하며 기도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죠.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고, 예수님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하고 와서 제자들을 보면 이상해요. 마귀가 들린 듯 잠을 깊이 잡니다. 아주 확실하게 그냥 잤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깨우셨어요. 다 같이 기도 좀 하자. 그런데 베드로가 예, 주님, 그러고 또 잔 거예요. 몇 번씩이나 그랬냐면 세 번씩이나 그랬어요. 예수님은 깨워서 또 가서 기도하고 돌아보면 또 자고, 또 깨워서 기도시키면 또 자고 그렇게 됐어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러셨는데,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땀을 피같이 흘리며 기도하는 것과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이 두 그림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종과 하속들 앞에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고, 그때가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 있었으며 베드로도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고 기록됩니다. 설교자는 이 여자가 대단하거나 무서운 인물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겁을 먹으면 상대가 굉장히 커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쩔쩔매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상태였고, 여자 문지기 앞에서도 신분을 숨기며 신앙 고백을 바꾸었다고 전합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옆에서 당신도 예수의 제자 같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나는 예수 제자가 아니라고 두 번째로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대제사장의 종 중 귀를 잘린 자의 친척이 동산에서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다그쳤고, 베드로는 다시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설교자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며 영적으로 비참해졌다고 말하며, 고난을 두려워하기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23–5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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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이 베드로가 첫 번째 '나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요'라고 부인을 합니다. 이 여자가 대단한 여자는 아닙니다. 무서운 여자도 아닙니다. 근데 사람이 한번 겁을 먹고 사람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이 굉장히 커 보여요.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도 쩔쩔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겁니다. 여자 문지기에게까지도 쩔쩔매고,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자기의 신앙 고백을 바꾸어 예수 나 안 믿는다, 나 예수 제자 아니라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발견하는 게 뭘까요? 두 가지. 그가 가진 믿음은 굉장히 좋은 믿음 같았는데, 사실 보니까 인간적인 믿음이었다. 육적인 믿음이었다는 거예요. 그게요, 보통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 들어오면 딱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러분에게 누가 욕을 바가지로 해 보면 알아요. 그리고 여러분을 막 오해하고 여러분을 막 힘들게 하면, 딱 그 순간에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적인 믿음인지 성령으로부터 온 믿음인지가 구분이 돼요. 제일 쉬운 예로,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릴 거냐 말 거냐, 이제 그런 거예요.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 리를 가고 이렇게 돼 있잖아요. 여기서부터 내가 가진 믿음이 인간적인 믿음이냐 인간적인 봉사냐,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냐 하는 것이 이제 드러나는 거예요. 베드로는 창피하게 다 드러난 거예요. 3년 따라다녀 봐야 말짱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수준이 그거니까. 그리고 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줄 알았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일부러 가서 기도하셨어요. 근데 그 아주 중요한 시간에 베드로는 졸았다 말이죠. 다른 제자들도 졸았다 말이죠. 그러니 영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때로는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들에게, 때로는 우리의 비즈니스에, 여러분이 일하는 직장에 위기가 올 수 있어요. 어쩌면 당신이 그 직장을 떠나야 될지도 몰라요. 다음 직장을 구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계속 가다가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런 불안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불안은 여러분을 점점 지배하게 될 거예요. 두려움은 점점 여러분을 지배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상상을 하지 못하고 나쁜 상상을 계속합니다. 최악의 상상을 하고, 나중에는 그 상상이 사실이라고 자기가 또 믿어요. 바로 이런 현상이 베드로에게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자, 요한복음 18장 19절부터 21절까지 쭉 읽겠습니다. 시작.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 제자들과 그 교훈을 물으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말하였노라. 내가 항상 회당과 성전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내게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자, 베드로가 그렇게 아주 겁에 질려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문지기 여자한테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시간에 재판과 질문이 시작된 거예요. 그 대제사장이 묻죠. 너는 제자들이 누구며 무엇을 가르쳤기에 여기까지 왔느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누구를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말이에요. 두려움이 없는 표정이에요. 왜 그럴까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거든요. 그날 밤에 금식하셨고, 그날 밤에 준비하셨고, 하나님하고 말씀을 많이 나누셨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거야.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은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되기를 축원하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세상에 어떤 사건이 생기고 누가 뭐래도 하나님하고 대화를 많이 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어. 아니 내가 어디 뭐 숨어서 얘기했냐? 다 공개적으로 얘기했는데 내가 하는 말은 숨길 것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고 싶으면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을 다 불러다 증인 삼아서 물어보면 알 거 아니냐. 아, 예수님의 그 태도가 얼마나 당당한지 몰라요. 그런데요, 또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당당한 사람을 꼴배기 싫어해요. 머리도 숙이고 손도 비비고 뭐 좀 이래야 권력자가 좀 이렇게 재미가 있는데 예수님이 안 그러시거든요. 요한복음 18장 22절 읽어 주십시오. 시작. 곁에 섰던 아랫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쳐서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말이 옳으냐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태도가 건방지다 이거예요. 어디서 딱딱거리고 대답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주먹이 하나 날아온 거예요. 여기 보니까. 근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도 또 흔들리지 않아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증거를 대라. 잘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자,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에 흔들림이 없었다는 거예요.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돈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폭력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않아요.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않지만 흔들리지도 않아요. 담담하게, 자유롭게, 불안하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없는 게 가장 불행한 게 아니라 흔들리는 게 불행한 겁니다. 여러분 집이 없는 게 불행한 게 아니고요. 여러분이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 휩쓸려 있는 게 불행한 겁니다. 미래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없는 이것이 문제지, 물질이 문제가 아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부 생활을 해 가면서, 사업을 해 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한두 번 있습니까? 그리고 이 어려운 문제가 지금 끝났다고 끝난 것입니까? 아니에요.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이 얘기를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환난이 와도 고난은 파도 같은 거예요. 저 또 왔다, 또 왔다, 또 왔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이 말이죠, 뚝을 넘지 않게 하기만 하면 돼요.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납니다. 물이 뚝 끝까지 왔다가 막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돼요. 근데 이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나요. 안나스 대제사장은 자기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사위인 가야바 대제사장에게로 예수를 보냅니다. 요한복음 18장 24절 읽어 주십시오. 시작.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더라. 자, 이제 카메라 앵글이 또다시 베드로에게로 왔어요. 지금까지는 베드로에게 있다가 이제 가야바에게로 갔다가 다시 앵글이 베드로에게로 돌아왔습니다. 25절 읽어 주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쬘 때에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도 그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더라. 이번에는 여자가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예수님 제자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다. 나는 예수 제자가 아니다라고 두 번 부인했습니다. 26절, 27절을 보십시오. 시작. 대제사장의 종 중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자의 친척 한 사람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너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하니,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매 곧 닭이 우는지라.

신학생 시절 버스에서 드린 세 시간의 기도

설교자는 신학교 시절 버스를 타고 기도하는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약 세 시간 동안 하나님과 깊이 교제했고, 그 시간이 자신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의 한 예로 소개합니다. 하루를 온전히 드리는 일은 어렵지만, 그 일부라도 드리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 이 나눔의 요지입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이 훈련에 도전해 보기를 권면합니다.

오경제 · 2026-10-23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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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락방은 오랜만에 특별 공과를 하지 않고, 한 구절 무상에 있는 공과 내용을 다룹니다. 또한 각 다락방마다 초청 다락방의 시간도 있으니, 세제 축제 기간 동안, 내가 기도하고 있는 가족이나 이웃, 지인을 나누시고 그 영혼을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주일 설교는 잠깐 넣어 놓았는데, 주제는 '빈들에서 만들어진 풍성한 은혜'였고, 오병이어 사건을 바탕으로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5절은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다'고 하며, 오병이어 사건이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합니다. 장소는 빈들, 시간은 이미 저물었으니, 해가 지는 시간대를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빈들과 같은 장소와 시간이 있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그러한 빈들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누구와 함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0절에서는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12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은혜를 행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빈들에서도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다 배불리 먹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인생은 환경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며, 빈들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추억이 많을수록 신앙이 성장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의 추억이 얼마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으며 말씀이 추억이 되었는가, 예배하면서 눈물 흘렸던 추억, 찬양하면서 인격을 터치했던 순간들, 이런 순간들이 영적인 건강과 신앙의 성장을 이끕니다. 또한, 공동체와 함께한 추억도 중요합니다. 교회 생활을 함께 하면서 쌓인 추억들이 하나님께서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대형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예비하신 은혜가 있고, 결핍이 있더라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많은 결핍을 경험했지만, 감사하게도 시골 교회에서의 추억들이 신앙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골 교회는 단임 목사님만 있었고, 전도사님도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모두가 일꾼이 되었고, 성탄절 전구를 바꾸는 일도 모두가 함께 했습니다. 인생에 누구나 빈들을 만나지만, 예수님을 만난 추억들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빈들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빈들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의 빈들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존재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몇 번의 설교에서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이라는 책의 주제를 담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을 매듭으로 삼고자 합니다.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것은 어렵지만, 하루를 드리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버스를 타며 기도하는 도전을 했고, 세 시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 시간이 저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아, 내 인생을 기도와 감사로 물드리고 싶다'입니다. 이는 시편 92편의 본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사명이고, 동행이며, 훈련이며, 사랑입니다. 이 책은 기도 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최악선이라는 의사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내의 쓰러짐과 고난 속 기도의 시작

설교자는 책의 저자가 겪은 고난의 시작을 소개합니다. 2001년 1월 7일, 저자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주님의 돌보심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화장실에 가던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가족은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겼고, 응급실에서는 아내를 곧바로 중환자실로 보냈습니다. 진단은 내출혈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저자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렸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책의 서두가 6페이지에 나온다고 밝히며 이 경험이 책의 배경임을 알려 줍니다. '내 인생을 기도와 감사로 물들이고 싶다'는 고백이 이 고난의 여정 속에서 나왔다고 적용합니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의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삶의 방향이 될 수 있음을 설교자는 강조합니다.

오경제 · 2026-10-23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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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의 표지에는 제가 잊혀지지 않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 내 인생을 기도와 감사로 물드리고 싶다'는 이 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이제 넘겨 보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잠깐 읽어 드릴게요. 2001년 1월 7일, 나는 아내와 두 딸을 함께 주님의 돌보심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화장실에 갔던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겼는데, 응급실에서는 아내를 보자마자 중한 자실로 보냈고, 내출혈이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렸습니다. 이 책의 서두는 6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서평에 담긴 '고통의 계곡' 고백

설교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다시 읽어 줍니다. 서평의 제목은 '고통의 계곡에서 참된 기도의 빛을 발견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저자가 고통의 계곡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모든 삶이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바뀌었다고 소개합니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질병과 병상에서 보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저자는 기도로 채웠습니다. 설교자는 고통 중에 무너지지 않고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 낼 때 삶이 거룩한 울림이 된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병원과 가정, 차 안, 일터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독자들도 고난을 이겨 내기를 응원한다는 서평의 문장도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문장을 통해 고난이 기도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나눕니다. 서평의 이 표현은 저자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고 설교자는 이해합니다.

오경제 · 2026-10-23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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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한번 더 읽어 드리면, '고통의 계곡에서 참된 기도의 빛을 발견하다'라고 써 있습니다. 고통의 계곡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질병과 병상에서의 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기도로 채우면서 저자가 한 고백입니다. 고통 중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낼 때, 고통을 품고 기도할 때, 삶은 거룩한 울림이 됩니다. 병원에서, 가정에서, 차 안에서, 일터의 현장에서 저자가 기도한 것처럼, 독자들 역시 고난을 이겨내며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내기를 응원해 봅니다. 이 출판 서평이 이렇게 써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와 생명을 아버지께 맡김

설교자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떠올립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2장 23절은 예수님이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그 말씀을 따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를 인용합니다. 그는 주님을 의지하는 인생이란 곧 내 생명을 아버지께 맡기는 인생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가진 것과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서,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손에 맡겨라'고 말씀하신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인간적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며 살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양석효 · 2026-10-22

설교 내 8–8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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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썩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는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여러분, 고대 동방에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재산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창고의 곡식이고, 두 번째는 옷이며, 세 번째는 쌓아둔 금과 은이었습니다. 창고의 곡식도 있고, 좋은 옷도 있고, 금과 은도 쌓여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보면서 만족하고 사는 인생입니다. '이 정도면 내 인생 괜찮은 거지',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지' 이렇게 만족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가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곡식은 썩을 것이고, 옷은 썩을 것이고, 금과 은은 녹이 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금과 은은 원래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금과 은이 녹이 슬 거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 사라질 거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말씀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헛된 것들이다라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인스타를 많이 하지는 않는데, 인스타그램 같은 걸 보고 있으면 SNS를 보고 있으면 화려한 것, 좋아 보이는 것, 대단해 보이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나 빼고는 다 잘 사는 것처럼 느껴져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죠. 저도 운동을 좋아해서 러닝이나 사이클 같은 걸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 보면 최근 러닝 붐이 일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기록을 올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4분 30초로 뛰었다', '42.195km 일곱, 서브 3, 서브 4'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뛰는 것처럼 보입니다.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나도 저기 도달해야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삽니다. 다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아이 펀런 하는 게 중요합니다. 펀런 죄송합니다. 영어 잘 못해서 펀런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 보면 절대 펀런 하지 않습니다. 기록에 매어 가지고 인스타에 올라와 있는 기록 보고 나도 저기 도달해야지. 허상가도 같은 거죠. 그게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부자들 보고 잘 사는 인생들 보면 그 뒤에 감춰져 있는 허상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건 SNS죠. 그런데 정말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풍족하게 하고 책임져 주는 걸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는 뭐냐면, 그것들이 썩고 썩고 녹이 슬었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를 책임져 주지 못할 것이다. 마음의 살진 자의 첫 번째 특징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4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삭기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귀에 들렸느니라.' 마음이 살진 자의 두 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프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재물이 부족해서 품삯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재물을 쌓아두고, 두었고, 그것으로 만족하니까 다른 사람이 고통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내 배를 채우기에 급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풍족하고 많은 것들을 누리고 많은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울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 재물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는 중요한데, 마땅히 돌아가야 될 그 삭이 돌아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이 살찌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것에는 관심이 많은데,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에는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지 않는 삭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입니까?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주지 않는 삭기 소리를 지르고, 그 비명과 소리를 누가 듣고 있다고 얘기합니까? 하나님이 듣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살진 자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이미 나의 부유함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 상한 자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이 살진 세 번째 특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5절 보니까 이렇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취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죽음 너머에 어떤 것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을 생각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끝이 있고, 그 끝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알고 있고, 그 죽음 너머의 생명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살진 자들은 죽음 너머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내가 누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것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 너머의 그 인생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이 없는 인생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끝을 넘어 영원히 사는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마음이 살 있다면 지금과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당장 하고 있는 그것에 집중해서, 그 이후의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살찐 자들, 부한 자들은 그런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재물에 한물되어 있고, 그것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고, 두 번째는 내 주변에 아픈 그 신음 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무감각합니다. 세 번째로는 끝이 없이 지금 생애가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심판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첫 번째 장사하는 자, 두 번째 부자,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인생입니다. 오늘 세 번째 마지막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6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지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의인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부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던 가난한 성도들을 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지 당했다'라는 것은 법정 용어거든요. 그러니까 부당하게 법정적으로도 부당한 어떤 수탈을 당해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냐면,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너무 좋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참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너무 안 좋고, 너무 어렵고, 너무 힘들 때 무엇을 하라고 성경 기록합니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의 힘입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어떤 수단을 생각하고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은혜를 사모함으로 기다리고 참는다는 의미가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보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9절에 보니깐요. '심판주가 문 밖에서 계시니라.' 오늘을 살지만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는 자들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고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인간적 방법을 생각해서 어떤 방법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해결하심을 기다리고 그 응답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이라고 오늘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시는데요. 제가 한번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대요.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지막 말씀 기억합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정말 주님을 의지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내 생명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굉장히 많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정말 많고, 누릴 수 있는 것도 많고,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 착각할 수 있는 그 너무 쉬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손에 맡겨라'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지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나는 오늘 어떤 것을 의지하는지를 살펴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기도하실 때에, 어 나의 삶을 한번 좀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들, 내가 고집하고 있는 것들, 그것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오늘 기도하시면서 우리 인생을 한번 돌아보고, 정말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맡기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면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신약 인용과 바울이 기독교를 반대한 이유에 대한 설명

설교자는 바울이 기독교를 극렬히 반대한 이유를 자신의 자랑이 무너진 데서 찾습니다. 바울은 평생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유대교 동료들을 능가하려 애썼지만, 율법의 행위로는 공로가 없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그 삶이 무의미해졌다고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필리피서 3장의 구절을 인용하며, 바울이 그래서 이 종교에 모든 힘을 다해 반대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는 바울이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파하려 했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다마스쿠스로 떠나는 바울의 모습을 그리며, 너무 헌신적이고 공적인 인물이 마음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몰리 야드가 프로라이프 운동가가 되거나, 매달린 머리 머레이 오하이어가 예수님을 믿거나, 사담 후세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선교사가 되는 가정적인 예를 듭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에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도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존 파이퍼 · 2026-10-22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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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여러분께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신 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방식은 오늘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나와 여러분을 위해 선택하셨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보자고요. 1티모데 1장 15절 말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 없으나, 이 까닭으로 내가 자비를 입었노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울에게 자비를 베푸신 이유입니다. “내 안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분의 완전한 인내를 보여주셨으니, 이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바로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에 해당한다고 믿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너희를 위해 행한 것이니, 너희가 이 증거를 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아침에 제가 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내와 오래 참으심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이 오래 참으심의 증거를 앞에 두고 있다면, 오늘 아침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과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필요가 있음을 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제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바울의 전도를 바라보는 렌즈도 바로 이 관점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9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렌즈를 통해 바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울이 전도를 받은 것도 여러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1991년 1월 9일, 저는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에 대한 증거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삶의 어떤 부분이 오늘 이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의 어떤 부분이 오늘 이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부분을 알아차리고, 저는 최선을 다해 그 증거를 드리겠습니다. 1티모데 1:1을 통해 바라보는 이 전도에 대해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바울의 전도는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헌신한 반대자였던 사람의 전도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헌신한 반대자였던 사람의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에 제가 성경을 펼치면 바로 이 구절이 나옵니다. “사울은 교회를 파괴하며 집집마다 들어가 남녀를 끌어내어 옥에 가두었노라.” 그리고 9장 1절과 2절에서 루가는 그가 단지 위협을 했던 것이 아니라, 위협을 숨 쉬었다고 기록합니다. 왜 루가는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그는 위협을 숨 쉬었습니다. 이는 박해가 그가 숨 쉬는 공기와 같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단지 위협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위협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는 이 종교를 완전히 반대하고 뿌리뽑으려는 데 완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위협과 살인을 숨 쉬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기독교에 대해 그렇게 단호하고 극단적이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그의 후에 쓴 서신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즉, 기독교가 믿음으로 구원을 선포하고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삶은 쓰레기와 같았습니다. 필리피서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삶은 쓰레기 더미일 뿐이다.” 사람들이 나의 삶을 쓰레기 더미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평생을 바라며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유대교의 동료들을 능가하려고 노력한 삶이, 이 가치 없는 어부들이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때문에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바로 인해 저는 삶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종교에 대해 모든 힘을 다해 반대할 것입니다. 저는 유대교에서 의미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 극단적으로 반대했던 이유입니다. 이 종교는 그의 자랑의 토대를 뽑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파하려 했습니다. 즉, 그는 정말로 이 종교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마스쿠스로 150마일 떨어진 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종교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전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사람을 전도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헌신적이기 때문에, 너무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적으로 이 입장을 밝혔습니다. 수천 명이 그가 이 일에 헌신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모두가 “아, 저 사람은 변덕스럽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헌신적이며, 너무나 공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마음을 바꿀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몰리 야드가 프로라이프 운동가가 되어 퍼거에서 생명을 구한다면, 혹은 매달린 머리 머레이 오하이어가 예수님을 믿고 전국에 기도를 퍼뜨린다면, 혹은 가장 극단적인 예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기독교 선교사가 되었다면, 누군가 이 일을 위해 기도할까요? 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 이 이야기,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이 명령은 우리에게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돌을 던지던 사울의 변화

설교자는 스데반의 죽음이 있던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옷을 맡고 있던 청년 사울이 그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처참한 상황에서, 당장 눈앞에는 기도의 응답이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순간 순종을 통해 사울이 등장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훗날 사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근거로 남편, 자녀, 부모님과 시부모님을 위해 드리는 눈물의 용서의 기도도 당장 변화가 없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기도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격려합니다.

양현서 · 2026-10-21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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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두 번째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도이지 않습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 묵묵히 서서 못박히신 예수님의 기도와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돌이 날라오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분노로 맞서지 않고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라고 하면 내 마음에 맺혀진 것이 조금씩 풀려가야지 용서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억울한 마음들이 다 풀리고 상대방의 마음이 조금씩 풀려지는 것이 스데반의 모습이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그 사람이 지은 죄를 그냥 없던 일로 덮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기도의 진짜 의미는 내 손에 쥐고 있었던 그 용서할 판단의 마음을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린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판단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이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저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저 사람을 판단하고 벌하시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립니다라는 것이 스데반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용서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용서할 일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면,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계속 지적하면서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그 판단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판단을 내가 하지 않고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몫으로 올려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입니다. 이 위대한 용서의 기도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서 돌을 다시 내려놓고 '아니야, 죄송합니다'라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고, 당장 눈앞에는 내 기도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순종을 통해 누가 나타났습니까? 바로 사울이 등장했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옷을 맡고 있던 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 훗날 사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만약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없었으면 우리는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도망가서 살아남았더라면 사도 바울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위해,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시부모님을 위해 우리가 눈물과 용서의 기도를 드려도, 당장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변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 우리의 삶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기도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들, 나에게 깊은 원상처를 준 원수들은 저 멀리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입니다. 내게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도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 내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마음속에 밉고 원망스러운 그 사람의 이름을 한 번 조용히 불러 보세요.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세요. '나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그 마음을 올려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억지로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 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손에 쥐고 있던 용서의 판단과 재판하려는 마음들을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입니다. 주여,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 마음으로 나아가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날아오는 돌 가운데 스데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 같았으면 화를 내고 도망가고 맞서 싸웠을 것 같은데,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 충만하여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 내가 당장은 할 수 없지만, 당장은 나의 모든 상황이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 마음으로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금요 기도회 중 걸려 온 아기 응급 전화

설교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금요 기도회로 교회에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아기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대학 병원으로 빨리 가야 한다고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설교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병원으로 운전해 가는 길에 그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했지만, 차가 막혀 제때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화를 내며 혼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 경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이 당장 오시기를 바랐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기대와 연결됩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 사람이 느끼는 당혹과 답답함을 설교자는 자신의 이야기로 나눕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두 자매의 심정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삼도록 청중을 이끕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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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 금요 기도회에 교회에 있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기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갔고, 선생님이 대학 병원으로 빨리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하고 황당해서 믿기지 않았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며 기도했지만, 차가 막혀서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화를 내며 혼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품 안을 떠나는 자녀 이야기

설교자는 부모가 자녀를 품 안에 두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부모의 팔힘이 세서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자녀가 품 안에 있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녀는 결국 떠나고, 부모가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거나 밥을 먹여 줄 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녀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모가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남편을 지키는 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가정 모두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라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하용조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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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꼭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제자가 내 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속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고요?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고요. 여러분의 아내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에요. 여러분을 속이려는 친구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는 이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축복해 주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일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자라 부르면,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을 시키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훈련시키고 전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사랑이었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고 미숙해도, 그걸 다 껴안고, 이 사람이 언젠가 성숙해질 때까지 예수님 죽고 나서 성령 받을 것을 아시고, 그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사랑했던 것이 제자 훈련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 훈련을 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는데,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시겠습니다. 11절 한번 같이 읽어 주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어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 기도가 나와요.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이고요. 두 번째는 '아버지여 하나님이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먼저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사람의 본능, 죄인의 본질이 분열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얼마 가지 못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평가하고, 서로 비판하고 헤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 놔두면 꼭 인간은 헤어지게 되 있어요. 가만 놔두면 인간이 서로서로 이렇게 사랑하고 협동하고 하나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인간은 서로 헤어지지 못해서 앙탈을 합니다. 그게 인간의 죄성이고 본능이에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에요. 가만 놔두면 서로 미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사랑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라 소유예요. 자꾸 가지려고 해요. 주려고 하지 않고, 자꾸 내 것을 만들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에요. 처음에는 평화한 거 같지요. 처음에는 나누어 줄 것 같지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그 본질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인간은 일치하기보다는 자꾸 분열해요.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가만 놔두면 싸우고 비판하고 헤어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 뿌리가 있기 때문에,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는 처음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지나가면 인간 안에 죄성의 뿌리가 이렇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람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소유의 욕망,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욕망, 사람을 믿지 않는 의심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하나됐다고 하다가 또 편가르게 하고 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일 큰 숙제가 동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는 사람 보면 머리 숙이고 싶어요. 그게은 어렵습니다. 꼭은 나중에 헤어집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싸우고요. 이게 어디까지 싸울까요? 교회도 싸워요. 그 교회 싸우는 거 보셨어요? 아, 뭐 많이 받겠지요. 안 싸우는 교회가 없고요. 분열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사랑에서 서로 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파송해서요. 근데 인간은 자꾸 이렇게 싸워서 헤어져요. 성령은 연합과 일치의 영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틀린 것도 하나로 만들고, 다른 것도 새롭게 하나로 만드는 영이 성령의 영입니다. 사탄의 영은 분열과 미움과 비판과 싸움으로 결론을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화목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부탁한 게 뭐예요?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화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트라블 메이커가 되지 마시고 피스메이커가 되십시오. 싸우면 붙여주고, 이혼하면 붙여주고, 나가면 돌아오게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화해자의 특징이 뭔줄 아세요? 십자가 짓는 거예요. 그냥 있어서는 화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처럼, 화해자의 대가는 언제나 십자가를 짓는 것입니다. '주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기도였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12절에 있는 11절에 있는데, 11절 12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우선 12절을 읽겠습니다. 12절 시작.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오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이는 멸망할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 예수님의 관심은 11절에도 12절에도 보존하게 해 달라. 제자들을 지켜 달라. 보호해 달라, 보존해 달라.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고, 12절에도 똑같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여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이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고, 12절에는 '내가 저들을 보존하여 지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도의 보존, 안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내가 나를 아무리 지켜도 잘 안 돼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성입니다. 성.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거예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성을 쌓다 보면 무슨 결과가 오느냐? 성을 높이 쌓다 보면, 타인의 공격에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다 보면은 타인과 단절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외로움이란 누가 외롭게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 거예요. 여러분 외롭다는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나는 외로워' 이런 거. 뭘 외로워요? 자기가 외로움을 만들었지. 이 사람 끊었지. 저 사람 끊었지.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집 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안 내려올 방법이 어디 있어요? 외로운 사람 제가 말합니다. 이불을 팍 차고 나오십시오. 아멘. 그리고 나가 사람 만나세요. 그럼 안 외로워져요. 이래서 뭐 싫고 절에서 싫고 다 [한숨] 스스로 외로움을 만나는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성을 쌓으면 첫째 타인과 단절되고요. 두 번째 또 뭐가 있어요? 스스로 성 안에 갇치는 거예요. 그리고 홀로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도, 술 먹고 뒤에서 박는데 어떻게 해요? 내 노력으로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아요. 내 노력 내가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보호. 시편 23편 1절부터 4절에 보면은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놓이시며, 잔잔한 시내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이게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보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녀요. 여러분, 여러분이 팔이 힘이 세 가지고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 품안에 있어요. 근데 이 아이들이 품 안에 오래 있지 않아요. 다 떠납니다. 쫓아다니면서 잔소리 하겠어요.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여 주겠어요. 하나님이 보호해 줘야지요. 그래서 꼭 기도해야 돼요. '나는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남편을 다 어떻게 지켜요? 술직 가는데 하나님이 지켜 줘야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에도 하나님이 지켜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여 지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1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교리는 기쁨의 교리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고요. 좌절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의 종교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권사님이 초청한 편모 가정 모녀의 변화

설교자는 지난 주일 세대 축제 때 만난 한 권사님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권사님은 예배에 참석한 설교자를 보고 급히 달려와 편모 가정의 엄마와 딸을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설교자는 상황을 들은 뒤 두 사람을 만나 기도했고, 딸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 뒤 권사님과도 함께 기도했으며, 그날 오후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문자에는 자매가 3주 전부터 교회에 나와 치유와 회복을 얻고 있다는 말과 함께, 딸이 왕따로 힘들어했고 치료 센터도 효과가 없어 그만두려 한다는 사정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딸의 얼굴이 밝아지고 웃음을 되찾았으며, 교회에 대한 호의와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마음이 생겼다고 전해졌습니다. 설교자는 웃는 딸을 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지 생각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며, 그를 기다려 주는 마음, 위해 기도하는 마음,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설교자는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고 느꼈다고 나눕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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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시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난 주일 세제 때 만났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한 권사님이 예배를 오셨는데, 제가 있는 모습을 보고 막 뛰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분을 초청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편모 가정의 엄마와 딸이 함께 오는 과정이었습니다. 몇 가지 상황을 듣고 기다리다 엄마와 딸을 만났습니다. 딸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부모로부터 상황을 듣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고 나서 권사님과 함께 기도를 드렸고 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그 문자를 읽어드리면, "목사님,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매님은 20년 전 순원의 친정 언니로, 영육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라 3주 전부터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치유와 회복을 얻고 있습니다. 특성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딸도 여기 왔으면 해서 오늘 오게 되었습니다. 딸은 왕따로 힘들었고, 최근에는 중동 문제로 치료 센터를 다녔지만 효과가 없어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 후 얼굴이 밝아지고 웃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초청을 했기 때문에 초청자의 마음을 알잖아요. 예배 때 와서 하나님이 만져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교회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움을 겪고, 엄마의 마음이 위로받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갔을 때, 아이의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변화되었고, 대화를 나누며 그 웃는 얼굴을 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까 생각하니, 저 또한 마음이 포근해졌던 주일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다시 보며 위로를 받고 기뻐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참 거창한 일이 아니구나. 그분을 기다려 주는 마음, 그분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초청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와서 그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초대하고 사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브라보 시니어를 섬기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자녀의 신앙을 위해 오랫동래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대 축제에 좋은 자리가 있지만, 그 자리에 초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초청했음에도 거절당하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믿음을 가진 사람도 지칩니다. 누군가를 열심히 초청하려 노력하지만, 그분이 세대 축제 때 지쳐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대 축제를 보내고 오후에는 많은 분들이 초청자들과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며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낙담한 성도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또 기회가 있겠지만, "이번에 오지 않으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제 마음이 치졸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때로는 버티는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로 잡았습니다.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어떤 분들은 잘 산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떤 분들은 지금 견디고 있고, 버티고 있습니다. 버티는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봤을 때, 어머니의 한마디가 제 마음속에 박혔습니다. "하나님 없었으면 나 그때 죽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예수님,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 예배의 자리, 때로는 예배에 못 나오는 가나안 성도, 옛 추억, 찬양,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 찾아오는 생각은, "내가 지금 이 상태인데 누군가를 전도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본이 되지 않는 모습인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가자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이 떳떳하지 못한 것 같고, 믿음이 약한 것 같아 스스로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전서입니다. 2,000년 전 소아시아의 한 마을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일상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한 성도는 낮에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 앞에서는 웃으며 믿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도들을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2장 9절에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라고 극찬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믿음을 떨어뜨리는 이웃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신앙 상담을 받을 때, 내 믿음으로 설명하더라도 낙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포기하고 믿음을 포기하면 좋은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일일까?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왜 더 힘들어지는 걸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을 한 인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보면, 실루아노를 통해 기록된 내용 중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도 있고, 소아시아 교회에 이름 없이 믿음을 지키려 하며 갈등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때로는 오해를 받고, 선을 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잘 초청된 분들도 있지만, 전도 대상자 명단은 적게는 900명, 많게는 1,300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 오는 분은 주에 300명 내외입니다. 초청되지 못한 많은 분들에 대해 실망하고 넘어진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쓴 이야기

설교자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도 내 만족을 위한 쾌락으로 쓰일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그 예로 탕자의 이야기를 듭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가서 모두 허랑방탕하게 써 버렸습니다. 설교자는 야고보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한 말씀과 이를 연결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도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할 때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리기보다 내 뜻을 정해 놓고 알려 드리는 기도를 돌아보자고 권합니다. 탕자의 장면은 받은 것을 나를 위해 써 버리는 마음을 경계하는 자리에서 쓰였습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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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

설교자는 원하는 것을 구하되 그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기도의 모범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듭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간절히 구하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라는 기도의 모습을 함께 제시합니다. 눈물로 구해도 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두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듣는 성도들이 자기 기도의 중심을 점검하기를 권합니다.

한경진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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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싸울까요? 가정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교회에서도 싸웁니다. 큰 소리가 오가는 싸움만 싸움이 아니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또 웃는 얼굴로 싸우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싸우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싸움은 우리와 때려와 뗄 때려도 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서 화평을 이야기하던 야고보는 싸움이 어디서 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왜 싸웠냐고 묻죠. 그때 대부분은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말투가 기분 나빴고 또 눈치가 없고,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죠. 자기밖에 몰라서 싸웠다고 합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저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눈을 돌려서 저쪽에서 싸움의 원인을 찾는 동안,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운다는 말은 군대가 전투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욕망이 군대처럼 전혀를 갖추고 행군하고 있습니다. 내 몸속, 내 지체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지체들 사이로 번지죠. 그렇다면 모든 갈등이 다 내 탓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죠. 오늘 본문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를 가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뭐가 싸우고 있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이 싸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절 같이 보실까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함으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인합니다. 시기해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죠. 물론 우리 중에는 직접 손을 대서 사람을 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런 마음도 살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찾아다니면서 하소연은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는 가지 않습니다.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또 구하는 걸 기뻐하시는 분인데 말이죠. 결핍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아니면 내가 직접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건 아버지가 인색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면 다 주실까요? 어, 그건 또 아닙니다.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정욕은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만족, 내 쾌락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사하여 허의하면서 써버렸듯이, 하나님께 받아서 내 쾌락과 내 만족에 써 버리려고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만큼 무엇에 쓰려고 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중심에 제가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엿부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려 드리는 기도를 하는 거죠. 같은 간절함이어도 다른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또 눈물로 구해도 됩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뒤에 둡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죠. 그러나 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자리에도 아마 오랜 시간 또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30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2년 전에 응답을 받았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 잘못 구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는 응답을 들었죠.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서운하고, 또 하나님이 나는 덜 사랑하시는 거 같고, 또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는 그런 서운함이 올라오지는 않으신가요? 내 기도가 거절된 그 자리에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했는지, 내 욕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자기 중심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이죠.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교회 성도들에게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라고 하셨죠. 신약은 그 신랑이 그리스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신부가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계신 집에서 한 신부된 지체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신랑의 뜻은 묻지 않고 자기 목만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세상이 정해 주는 대로 따라갑니다. 세상이 지어준 잣대를 들고 뭐가 모자라고 못 미치는지 따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교회로도 들어옵니다. 몇 명이 왔는지, 효과는 있었는지, 효율과 숫자를 제일 앞에 갔다 대죠.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 벗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세상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스쳐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쪽으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습니다. 집에도 매일 들어오죠. 그래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압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아픕니다. 5절이 바로 그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시기 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시기 질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시기 질은 남이 가진 게 탐나고, 또 남이 잘 되는 게 배 아픈 시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속하는 마음입니다. 신부가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신랑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질투는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속이 바짝바짝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신부답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는 은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6절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는 간음한 아내를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했느냐.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바로 이 소리입니다. 내 쫓는 책망이 아니라 붙드는 책망입니다. 아내를 갚고 다시 찾아온 그 일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신다. 어, 이것만큼 무섭고 또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는 줄도 모르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닙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하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하고 열어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낮은 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은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연달아서 명령이 나옵니다. 전부 은혜를 받은 너희에게, 또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종하고 대적하십시오. 우리 속의 욕망은 군대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마귀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때,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싸울 때 가장 좋아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형제를 향하던 공격을 이제 그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비방을 향해 서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면서 마귀를 대적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고 약속합니다. 탕자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보고 달려나오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그분께 걸어가십시오. 내가 돌아서서 발을 떼면 그분은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손은 행동이고, 마음은 동기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내 욕심을 준 사람을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셋째, 슬퍼하며 낮아지십시오. 9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뭘 이렇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웃음을 멈추란 거죠. 우리의 울음은 벌받을까 봐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는 울음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낮아지면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싸움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자비의 천사와 빈 그릇이 없는 장막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비유로 들어 자비의 천사를 묘사합니다. 자비의 천사는 풍성한 뿔에 귀중한 축복을 담아 들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막 위를 때때로 날아다닙니다. 그는 장막 근처에 멈추어 부드러운 날개를 펼치고 잠자는 자 곁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막 안을 둘러보아도 축복을 부어 줄 빈 그릇을 찾지 못하면 그냥 떠나 버립니다. 설교자는 그러다 결국 다른 장막을 발견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그 장막의 주민들은 잠자기 전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빈 그릇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자비의 천사는 그 그릇들을 하나하나 채우고, 사람들이 깨어났을 때 자신들에게 풍부하게 부어진 은혜에 놀라게 됩니다. 설교자는 약한 갈망과 작은 요청,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큰 갈망과 진심 어린 기도, 강한 믿음과 높은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그 믿음대로 받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는 교회가 낮과 밤으로 빈 그릇들을 준비해 둔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공동체에 풍부히 채워지지 않겠느냐고 청중에게 묻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21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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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러한 죄악적인 침묵에 참여할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빈 그릇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 가져가지 않습니다. 왜 당신은 이토록 고집스럽게 어리석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에게 "고민을 그분께 맡겨라. 그분이 당신을 돌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그것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의 죄, 필요, 고민을 계속 짊어지고 다니겠습니까? 이러한 걱정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채워져야 할 빈 그릇들입니다. 아, 형제들아, 왜 우리는 더 큰 갈망과 더 넓은 기대를 갖지 못합니까? 우리의 믿음에 따라 그분께서 주실 것입니다. 자비의 천사가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막 위를 날아다니며, 풍성한 뿔을 들고 귀중하고 풍요로운 축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그는 장막 근처에 멈추어 부드러운 날개를 펼치며 잠자는 자 옆에 머뭅니다. 그는 장막 안을 둘러보지만, 축복을 부어 줄 빈 그릇을 찾지 못하고 떠납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장막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서 주민들은 잠자기 전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빈 그릇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는 자비로운 은혜의 뿔을 들고 하나하나 그릇들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나면, 자신들에게 풍부하게 부어진 은혜에 놀라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약한 갈망, 작은 요청, 부족한 기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기도를 드리며, 그들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은 큰 갈망, 진심 어린 기도, 강한 믿음,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따라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풍요로워집니다. 아, 교회에서 낮과 밤으로 빈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이 공동체에 풍부히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바울의 기도 생활

설교자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에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원수는 감방의 문을 잠그고 사슬을 채우며 창문에 쇠창살을 달 수 있지만, 겸손한 믿는 자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막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진리가 세계 곳곳에서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힌 기독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병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도 무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감옥에서도 여러 교회와 그 안의 개인들을 끊임없이 기도로 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헝가리와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우리가 매일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묻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그 시간을 이 기도에 바치라고 권면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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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여러분의 주의를 끌고 싶은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서 3장 14절과 15절에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의 에베소서 3장 14절과 15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무릎을 꿇어 기도하노니,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가족이 이름을 받은 분이시니라.’ 이제, 수정역이나 개정 표준역을 보고 계신 분들은 이 공인역에 있는 몇몇 단어들이 수정역에는 없는 것을 알아차리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므로 내가 아버지께 무릎을 꿇어 기도하노니,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가족이 이름을 받은 분이시니라.’라고 읽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다루려던 주제를 다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절을 살펴보았을 때, 그 절이 ‘이러므로’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4절 역시 ‘이러므로’로 시작됩니다. 그는 15절 이후로 이어지는 말씀을 하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묘사하면서,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해 장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다루는 삽입문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는 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고난을 인하여 실망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는 너희 영광이 됨이니라.’라고 말하며 그 삽입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삽입문은 우리가 보았듯이 매우 가치 있었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도가 이 편지에서 이 시점에서 가졌던 주된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삽입문을 마친 후, 그는 다시 처음에 말하려던 내용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14절의 ‘이러므로’는 1절의 ‘이러므로’처럼, 두 번째 장의 말미에 이르렀던 말씀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볼 이 말씀을 설명할 때, 이전에 말했던 내용과의 연결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기억하실 것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이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완전한 단일성을 이루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완전히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로부터 이방인이었고, 약속의 언약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희망이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 그는 ‘이제 너희는 이방인이나 낯선 자가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노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석이 되셨으니, 그 안에서 모든 건물이 잘 맞물려 성령 안에서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고, 너희도 거기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로 이러한 높은 개념과 묘사입니다. 이제 ‘이러므로’는 그 진리에 비추어 사도가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연결고리입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가 이전에 말했던 내용을 이해하지 않는 한, 지금 말하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새로운 진리는 이 에베소 교인들이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집의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고,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그들의 위치에서 비롯된 기도입니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둔 채, ‘이러므로’ 사도는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는 그들에게 기도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무릎을 꿇어 기도하노라.’ 이제 오늘 아침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사도가 이 거대한 기도를 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제시할 때, 그가 어떻게 이 기도를 소개하는지를 몇 가지 주석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해야 할 첫 번째 점은 그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맥락에서 이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교훈입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감옥서신 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로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에 갇혔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적이 그를 붙잡아 가두고, 에베소에 가서 설교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서 전도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해서, 그의 육체적 활동과 사역에 많은 제약을 가하더라도, 적이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가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적은 그를 감방에 가두고 문을 잠그고, 문을 막을 수 있습니다. 문에 사슬을 채울 수 있습니다.

미시간 주립대 기숙사에서 드린 기도

설교자는 미시간 주립대학교 1학년 때 겉으로는 훌륭한 기독교 청소년으로 보였지만, 속마음은 차갑고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시던 아버지는 아들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하셨고, 주님은 그 과정을 통해 설교자의 마음을 깨닫게 하셨다. 어느 날 기숙사 방에서 혼자 무릎을 꿇은 설교자는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시려면 제가 할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 이후 그는 브라질에서 여름 선교 활동을 했고, 그 다음 해에는 애슐랜드 애비뉴 교회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19살이 되기 직전부터 이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이후의 삶과 사역의 방향으로 이어졌음을 자신의 이야기로 나누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1

설교 내 8–10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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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저는 사역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미시간 주립대학교 1학년 때, 제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제가 훌륭한 기독교 청소년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이 차갑고, 제 삶은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제 아버지는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셨고, 저는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느끼게 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제 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시간 주립대학교 1학년 때, 저는 기숙사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시려면 제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음. 그 후, 저는 브라질에서 여름을 보내며 선교 활동을 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애슐랜드 애비뉴 교회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19살이 되기 직전부터 이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조지 뮬러의 고아원과 기도 일기

설교자는 영국의 목회자 조지 뮬러를 소개합니다. 뮬러는 젊은 시절 도둑질, 거짓말, 도박, 사기 등으로 교도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독일 할레대학에서 기도회에 함께 가 본 뒤 회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는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많았고, 뮬러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려 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재정적 도움을 부탁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뮬러는 기도한 내용과 응답을 일기처럼 기록했고, 그 기록에 응답된 기도가 오만 번 이상이라고 설명됩니다. 한번은 고아들을 식탁에 앉혔는데 빵이 없었지만, 그는 빵을 주심을 감사한다고 기도했고 곧 빵 실은 차가 들어왔습니다. 설교자는 사고로 빵을 전달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덧붙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증거라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45–5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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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또 한 분을, 기도라는 말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림을 보셨죠? 이 그림 누구 아세요? 보통 식당 같은 데 붙어 있고 할 텐데, 조지 뮬러라고 하는 영국의 목회자예요. 독일에 가서 할레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그때까지는 도둑질하고 못된 짓 다 하고 그렇게 살던 사람인데, 독일의 할레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누가 권해서 기도회에 한번 같이 가 보겠느냐? 가자고 하니까 갔대요. 여기 보면 성경책과, 입에 풀칠한다고 수프 한 잔하고 빵 한 개, 참 소박한 기도 같아요. 그러고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데, 얼마나 기도해서 얼마나 응답받았는지 책이 있어요. 오만 번 기도해서 응답받은 사람, 조지 뮬러. 어떻게 해서 이분이 오만 번이나 응답받았느냐? 1805년에 태어나서 1898년까지 영국의 목회자였는데 고아의 아버지라고. 이분이 왜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되냐면 고아를 한 삼십여 명의 여자아이들 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떼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져서 버려진 아이라든지 부모 없는 아이가 너무 많아. 그래서 그런 아이들 중에서 여자아이를 거두어서 먹이고 입혀야 되는데, 자기가 목사로서 가진 게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이분도 자기 경험이 뭐냐면 한 번도 누구를 찾아가서 내가 고아원을 하고 있으니까 재정적으로 좀 도와 달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냥 기다리고 있어. 더 놀라운 것은 왜 이분이 오만 번이냐? 기도한 것마다 일기를 써요, 기도 일기를. 몇 년도 몇 월 며칠 몇 시에 무슨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응답되면 응답된 기도를 다 쓰고 그렇게 한 거예요. 옛날 젊은 시절에는 도둑질, 거짓말, 도박, 사기 등으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방탕아 중에 방탕아인데, 할레대학에서 기도회에 참여해서 회심하게 돼요. 그리고 신학 공부해서 전도자로 살았는데, 영국으로 건너와서 브리스톨 지역에서 기드온 채플하고 베데스다 채플이라고 하는 교회를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거두고 챙기고 섬기는데 오만 번이나 응답을 받았대요. 어떤 때는 때가 되어서 고아들을 다 식탁에 앉으라고 해. 빵 없어, 지금. 지금 먹으려고 침을 삼키면서 김칫국 마시고 있는데 빵이 없어. 제가 그 책을 읽어서 놀랐던 게 빵이 지금 없는데 감사해요. 빵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입장이 곤란해요. 빵이 없는데 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기도하는데 빵차가 들어온 거야, 빵 실은 차가. 그 내용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어떤 경우는 사고가 나서 빵을 가져갈 수가 없어. 배달될 곳에 못 가는 거야. 갖다 내버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가져왔다 그러면서 가져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렇다고 하나님이 교통사고를 낸 건 아닙니다. 자칫하면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그러니까 오만 번 중에는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란 말이야. 그래서 고아들을 챙기는 일은 누군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데 하나님이 직접 못 하니까 누군가 하나님 대신에 해야 될 일이고, 뮬러 목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 보실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인 거야. 뮬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아까 봤죠? 빵하고 수프 하나하고 그렇게 검소하게 살고, 70이 넘어서 87세까지 40개국을 다니면서 전도해서 300만 명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온 내 삶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헨리 누원의 2026년 9월 16일 묵상글

설교자는 헨리 누원의 일일 묵상 웹사이트에 2026년 9월 16일에 실린 글을 인용합니다. 그 글은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의 존재에서 떨어지면 굶주림, 불의, 폭력, 전쟁, 외로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머무르게 되고, 그 결과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글은 이 문제들이 중요하며 기독교인들이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원천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글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답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이 우리 주변을 보게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인용을 미스티시즘적 방향을 보여주는 예로 제시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4–4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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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라,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라고 바울이 말했지만,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바라보는 유일한 이유가 되면 문제가 됩니다. 이는 바로 자유주의 기독교의 전개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는 신교나 가톨릭, 다른 어디든 간에, 예수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그분의 실제적 인격과 사역을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렸으니 이 점이 분명해 보이지만, 저는 아직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기독교는 정말로 이 길로 가고 있는 것이죠. 이는 모방과 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윤리는 선택적으로 적용됩니다. 이보다 다른 것들보다 이 윤리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 전체의 핵심은 100% 교리입니다. 특히 복음의 교리입니다. 규칙입니다. 이는 영적 형성의 한 방식이죠. 미스티시즘입니다. 이는 종종 인기를 끄는 주제이며, 때때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저는 몇몇 저자들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저는 헨리 누원의 일일 묵상 웹사이트를 살펴봤습니다. 2026년 9월 16일, 누원의 묵상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의 존재와 떨어지면, 우리는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불의를 해결하거나 폭력을 물리치거나 전쟁을 멈추거나 외로움을 없애는 것만 보게 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중요하며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우리는 엄청난 부담을 느낍니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우리 주변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겠습니다. 틸러 스탠턴은 그의 책 『기도하는 수도사처럼 살며 미친 사람처럼 사는 법』에서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책은 유진 페테르슨이 중간 지점에서 기도하는 것을 따릅니다. 능동태: '나는 행동하는 자이다.' 수동태: '나는... 내가 받는다.' 아닙니다. 간접적 측면에서 우리는 참여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며 간접적 음성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행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여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모든 상호작용은 이 간접적 음성, 참여의 음성에서 일어납니다. 이 두 저자는 모두 미스티시즘적 성향의 기독교 저자입니다. 미스티시즘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방금 읽은 구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미스티시즘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 단어가 때때로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전체적인 인상은, 이는 중개자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하려는 충동, 밀어붙이는 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제안한 두 구절 모두에서 정신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요. 저는 이 구절들 중 일부 표현의 의미가 확실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이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이는 고전적인 미스티시즘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중개자들을 없애고, 이 것들을 덜 중요한 것으로 보며, 직접적인 만남에 집중하자.' 저는 몇 년 전 로버트 듀발이 출연한 영화 『아포스텔』을 봤습니다. 저는 그 영화에 대해 거의 기억이 없어서 아마도 그 영화에 나쁜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추천하지 않지만, 저는 그냥 '알겠네. 대단하네. 알겠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가 트럭에서 내리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가 '주님, 이끌어 주소서. 내 다음 발을 어디에 둘까요? 다음 단계는 어디인가요?'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그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며 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이런 충동을 느꼈습니다. '경험하고 싶어. 하나님과 직접, 중개 없이 만남을 느끼고 싶어.' 저는 이 충동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충동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원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분을 아는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위해 중개자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려 한다면, 성경은 이차적 만남이 되고, 인간 언어도 이차적 만남이 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많은 미스티시즘 저자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영적 삶에서 더 나아가 다른 것들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해에 신클라어 퍼거슨이 쓴 새 책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나왔습니다. 매우 간단하고, 『전체 그리스도』보다 짧습니다. 저는 믿는 자가 영광을 받기 전에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현재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위로가 됩니다.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에 비유한 확신

설교자는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예로 듭니다. 도움을 주던 사람의 손이 떨어진 첫 순간에는 누구나 주저하고 불확실하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혼자 거리를 달리고 언덕을 오르며 내리막도 걱정 없이 내려올 수 있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 자신감이 반복된 경험의 결과이며, 연설자가 처음의 긴장을 지나 점점 자신감을 얻는 모습도 같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과 확신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결론이라고 적용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접근권 안에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0

설교 내 3–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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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그들에게 기뻐하게 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전에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성전의 의식과 제사 그리고 대제사장 등을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자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유대인들이 늘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목적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늘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최고봉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모든 축복 중에서도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부 사항을 다루기 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담함과 접근권을 얻었노라'는 말씀에서 '우리'라는 말을 주목해 주세요. 즉, 제가 말하려는 것은 사도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생활에 전념한 특정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진리의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고에서 영원히 버려야 할 것은 가짜이고 성경적이지 않으며, 사실은 죄악적인 이원론입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리에서 자주 보는 것처럼 신도와 평신도로 나누는 것은 말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사도요, 너희는 이전에 이방인이었으나,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께 대담함과 확신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이제 이 진리를 실생활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해 볼까요? 당신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기도 생활의 성격은 어떤가요?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일어나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때 어떤 느낌인지 말해달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도를 즐기십니까? 자유롭게 느끼십니까? 확신이 있습니까? 안정감이 있습니까? 기도할 때 어떻게 지내십니까? 당신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당신의 기도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사도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기독교 기도는 대담함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 기도입니다. 이제 이 두 단어를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대담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두려움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불안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악의 감각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대담함은 어떤 형태의 억제나 두려움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용감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는 바로 앞으로 걸어갑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강력한 적이 있어도, 용감한 사람은 가슴을 펴고,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걸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대담함'의 본질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억제도 없습니다. 억눌림을 느끼지 않으며, 주저하거나 의심하거나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대담함은 바로 그런 모든 것의 반대입니다. 첫 번째 단어는 '대담함'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접근권'입니다. 이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약 편하게 말하자면, 이 단어는 '입장권' 또는 '입장의 기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표현을 씁니까? '저는 거기 입장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죠.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지만, 저는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입장을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입장을 위한 특권, 즉 허가를 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집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접근권'의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그분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접근권'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이 단어는 이전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장을 위한 권리, 즉 입장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사도는 이 단어를 이전에 이미 사용한 바 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 단어는 2장 18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확신'이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보세요, 사도는 이 진리를 전달하려는 데 매우 신경 썼습니다. 마치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중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도는 이걸 강조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진리를 배우는 데 얼마나 느리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었고, 기도에서의 실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강조하고 반복하며, 또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확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확신은 어떤 과정의 끝에 오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당신이 무언가를 해왔고, 그 과정의 결과로 지금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상상해 보세요. 도움을 주던 사람의 손이 떨어진 첫 순간, 당신은 주저하고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을 얻게 되고, 이제 거리에서 혼자 걸을 수 있고, 모퉁이를 돌고, 언덕을 오를 수 있으며, 내리막길도 걱정 없이 내려올 수 있게 됩니다. 자신감은 과정의 결과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처음에는 긴장하고 주저하지만, 그 일을 반복할수록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연사는 처음 말을 시작할 때 긴장할 수 있지만, 몇 마디를 말한 후에는 긴장이 사라지고 자신감을 얻습니다. 누군가가 말할 수 있습니다. "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겪은 과정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접근권 안에서 자신감과 용기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제 당신은 성경 전서를 찾아 기도에 대해 살펴보세요. 어디에서나 항상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이 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입니다. 당신은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이 외의 다른 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는 용기와 접근, 자신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0장에서 본 바로 그 예시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자신감을 얻고, 용기를 얻으며, 심지어 심판의 날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이 접근 방식은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기도에 대해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두 번째 원리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접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즉 이 용기와 자신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는 이 구절에서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용기와 자신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강조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그분이 믿음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용기와 자신감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완전히 생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명백한가요? 이는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주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라 오는 자는 누구든지 죽지 아니하리라." 이에 사도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한 분뿐이시니, 곧 사람 그리스도 예수시니라." 그분이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항상 그분 안에서,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기도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있습니다. 세상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사람들의 지혜가 끝나갈 때마다 "기도는 어때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어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일을 이루신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다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자기에 대한 묘사를 떠올려 보세요. 그분의 거룩함, 영원함, 위엄, 능력을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분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삼키는 불입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교육이나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께 대한 쉽게 접근하는 친밀함이 영성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옛 언약하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든 그런 지시를 주셨을까요? 왜 그들은 성막을 짓고 나중에는 성전을 지어야 했을까요? 왜 그 안을 여러 구역과 구획으로 나누었을까요? 왜 그 안에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이름의 내부 공간이 있었을까요?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예수께 가져간 일

설교자는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이 머리 베인 뒤 그 시체를 들고 예수님께 알린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들이 슬픔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주님께 소식을 전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근거로, 어떤 어려움이든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불행을 감추지 말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는 억누를 필요가 없으며, 차갑게 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잔혹하게 배신하지 않으실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 믿음직한 분이시며 거절하지 않는 친구이시므로, 모든 것을 말씀드리면 좋은 희망이 있다고 격려합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예수님께 찬송을 부르고 모든 것을 말씀드리라는 권면으로, 주님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신앙의 자세를 강조하며 이 대목을 맺습니다.

찰스 스펄전 · 2026-10-19

설교 내 6–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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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고 자랑스럽거나 말 많은 젊은 소녀들은 병으로 인해 자비롭고 온화해지며, 예수님의 발 앞에서 앉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시인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고난을 당함으로 주의 계명을 배우는 것이 좋았도다.' 그러므로 존경받고 복된 여인들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 칼이 찔리는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 병들고 죽는 일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익이 됩니다. 라자로는 사도들이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병들고 죽었습니다. 그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라자로의 병이 있은 지 19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든 믿는 자들이 그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의 병과 죽음으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선한 자들의 고난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관심한 자들이 깨어나고, 의심하는 자들이 확신을 얻으며, 악한 자들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병 중에 우리가 전하는 증언을 통해 슬퍼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과 약함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우리가 친구들이 우리에 대해 '주님, 보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그 사실에 대한 메시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동생들이 예수님께 알리기 위해 보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주님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유지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예수님께 찬송을 부르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말해야 합니다. 기쁨이든 불평이든,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지만, 그분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그 선생이 머리 베인 것을 보고 시체를 들고 예수님께 알렸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든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불행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차갑고 자랑스럽게 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잔혹하게 배신하지 않으실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시는 믿음직한 분이시며, 우리를 거절하지 않는 친구이십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말하면 좋은 희망이 있으며, 그분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지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전능하신 주님, 내가 왜 병들었는지 알려 주소서'라고 묻는다면, 내가 건강할 때는 유용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알려 주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알려 주지 않으신다면, 그분께서는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인내심 있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통해 당신을 격려하고, 당신의 임재로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예상치 못한 위로를 보내거나 고난 속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경고를 보냈다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도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사와 약을 거부하면서 허황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도살장이나 옷감 장인을 해고하고 믿음만으로 먹고 입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을 아예 잊고 사람만 의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치유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물을 사용하지만, 그 약물은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고통, 점점 사라지는 힘, 그리고 약해지는 기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 하나님께 묻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머리가 아프면 예수님께 그 아픔을 치유해 달라고 감히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세셨으니, 머리 속의 맥박과 압력을 완화시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큰 일은 크신 하나님께는 작고, 우리의 작은 일은 더 작을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자녀들 중 누구의 가장 작은 고통이나 필요를 잊지 않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와 크기의 증거입니다. 숨쉬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폐와 생명을 주셨으시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약해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가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은 무릎, 고름이 생긴 손가락, 뻐근한 목, 또는 삐진 발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몸의 모든 부위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속량하셨으며, 그 모든 것을 무덤에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즉시 가서 '주님, 보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라자로의 사건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소식을 보낼 때, 그들은 메신저가 예수님께 도착하자마자 라자로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틀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고,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야야 유대지방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무관심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치유를 위한 기도가 항상 응답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친구나 가족, 지인이 기도해 주는 모든 사람이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