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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3 / 32쪽 · 한 쪽 20개

그늘 속으로 물러나는 정비사 비유

설교자는 바나바가 바울이 점점 앞서 나가면서 자신은 희미해지는 모습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 모습은 명성을 얻는 조종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항공기 정비사와 같다고 말합니다. 정비사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뒤에서 일하지만, 주목은 조종사에게 돌아갑니다. 설교자는 바나바가 바울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이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자신의 자리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태도가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지도자를 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겸손하게 뒤로 물러서는지를 적용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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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바나바는 점점 희미해지고, 바울의 그림자가 그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마치 명성을 얻는 조종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항공기 정비사처럼 말입니다.

엘루마 마술사와 사울의 책망 장면

설교자는 구브로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마술사 엘루마가 총독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 했고, 이때 사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설교자는 바나바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두 사람의 기질이 매우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둘 사이에 폭발이 있었고, 이 시점부터 사울은 바울이 되어 리더가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이후 사도행전에서 이름의 순서가 바뀌어 바나바가 언급되지 않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설교자는 이를 지도력이 바울에게 넘어가는 전환점으로 보고, 바나바가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적용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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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총독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한 엘루마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의 능력으로 폭발한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모든 의를 대적하는 자,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마귀의 자식아, 너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바나바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둘 사이에 폭발이 있었습니다. 그 시점부터 사울은 바울이 되고, 리더가 됩니다. 바나바가 아니라 바울이 리더가 됩니다. 이름의 순서가 바뀌는데, 13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그 일행이 바보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바나바는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16절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사람이 바나바가 아니라 바울입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때는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다만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몇 번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바울을 헤르메스라 부름

설교자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한 사람을 고친 사건을 전합니다. 이 일로 루가오니아 사람들은 크게 놀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존경받는 원로인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불렀고, 주로 말하던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설교자는 제우스가 신들의 왕이며,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전령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거의 모든 대화를 주도하는 모습 때문에 그를 헤르메스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과정에서 바나바의 전략이 일관되었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젊은 바울을 전도의 최전선에 있는 연사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14–15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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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보기를 원합니다. 바나바가 자신이 높여 주고 있는 이 사람 뒤의 그림자 속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보십시오. 14장입니다. 그들은 루스드라에 도착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한 사람을 고칩니다. 이것이 그곳의 루가오니아 사람들을 너무나 놀라게 하여, 11절과 12절에서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십시오. "무리가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주로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이며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로마 이름은 유피테르입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이고 전령입니다. 신들의 빠르고 열정적인 전령이며, 그의 로마 이름은 메르쿠리우스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 시민들이 이 바나바와 이 바울을 볼 때, 그들은 존경받는 원로와 가치 있는 사람을 보고 "바나바는 틀림없이 제우스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대화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열정적인 설교자 바울을 보며 그들은 "메르쿠리우스, 곧 헤르메스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바나바의 전략은 이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요한 문제로 갈라섬

설교자는 마가 요한이 첫 번째 선교 여행 도중 그들을 떠나 버린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두 번째 여행에 그를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를 데려가자고 고집했고, 그 결과 두 사람의 관계는 결렬되었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실패한 사람을 참아 주는 멘토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바나바는 사람의 실패 앞에서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려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지도자를 세우는 사람이 가져야 할 넷째 특징이라고 적용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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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로, 성경에 나오는 지도자의 멘토는 다른 사람의 실패를 참아 줍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사람은 물론 마가 요한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첫 번째 선교 여행 도중 그들을 떠나 버렸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여행에 그를 데려가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그를 데려가자고 고집했고, 그 결과 둘의 관계는 결렬되었습니다.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도구 됨

설교자는 요셉의 삶을 통해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려갔고,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설교자는 요셉이 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형통을 경험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화가 임한 것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 요셉은 결국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7년 대흉년이 닥쳤을 때 요셉은 이집트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 역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과정을 통해 고난이 단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일하실 수 있음을 붙들기를 권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하나님의 주권 쪽으로 옮겨 놓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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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요셉을 생각해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를 받고 노예로 팔려가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고난을 통하여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형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 임한 줄 알았는데, 그 일을 통하여 7년 대흉년이 왔을 때 이집트와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쫓김과 시편의 찬양

설교자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곧 왕이 되는 듯했으나, 사울 왕의 시기를 사서 십수 년 동안 쫓기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살인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 속에서 다윗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주목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노래와 고백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설교자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고난이 사람을 하나님께 향하게 만드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성도가 지나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설교자의 메시지입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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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다윗은 어떠합니까?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이제 왕이 되는가 싶었는데, 그 왕이 되는 것도 잠시, 사울 왕에게 시기를 사서 십수 년 동안 쫓김을 당하고 살인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수차례의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 다윗이 지나는 고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고난을 통하여 다윗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 많은 노래와 고백들이 저희가 잘 알고 있는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위로

설교자는 욥을 고난의 대명사처럼 떠올리며,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쳤다고 말합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 것 같았던 친구들에게서도 위로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고난 후에 욥이 하나님께 고백한 내용에 주목합니다. 욥은 이전에는 주를 귀로 들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백을 근거로, 하나님의 사람이 겪는 고난이 결국 사람을 하나님을 보게 만드는 길로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고난은 잠자던 영혼을 깨우는 경종과 같아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고 찬양과 감사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도 그 고난을 영혼을 울리는 경종으로 받아들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권면합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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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난 하면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욥이죠. 이 욥을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그에게 닥쳤습니다. 그리고 욥을 위로하러 온 것 같아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어떠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도 같은 어려운 일을 욥이 지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난 후에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전에는 주를 귀로 들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아시아 환난과 사형 선고 같은 고난

설교자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는 고백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그 고난이 힘에 겹도록 심했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일을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폭동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추정하면서도, 그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일이 위협을 받았고,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해 바울을 거의 죽이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 바울에게 주어진 깨달음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시며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소망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이 성도의 시선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리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소망하게 만드는 변화를 준다고 적용합니다.

안성준 · 2026-10-28

설교 내 28–29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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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도행전 19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아시아에 있는 수도와 같은 도시 중에 하나였던 에베소에서 있었던 폭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이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에베소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아데미 신전을 숭배하고,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서 파는 그 일들이 위협당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아데미 신상을 만들던 은장색이었던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 바울을 거의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 극심한 고난으로 인하여 정말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그 고난이 임했을 때예요. 그때에 사도 바울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게 어떠한 깨달음인가?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아멘." 네. 이렇게 거의 죽은 것과도 같은 고난이 임했을 때에 사도 바울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무엇이요? 고난이요.

영화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의 체포 장면

설교자는 최근 본 영화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를 언급합니다. 영화에서 예수께서 붙잡혀 가면서 얻어맞는 장면이 실감 나게 묘사되었다고 소개합니다. 한쪽 눈이 순식간에 붓고 절뚝거리며 안나스의 집까지 끌려가는 모습도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우리가 상상해 보아야 할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곱게 데려갔는지, 아니면 밀치고 주먹질하며 끌고 갔는지를 생각해 보자고 권면합니다. 체포 과정의 폭력성을 떠올리며 본문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 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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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두 곳에서 재판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어요. 첫째는 종교 재판입니다.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기 전에 안나스 집으로 먼저 끌려갔다는 것이죠. 오늘 보면 안나스 재판을 받고 묶인 채로 바로 가야바 뜰로 또 갔다는 걸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기 전에 종교 재판을 먼저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성경이나 또 최근에 우리가 보았던 영화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를 보면요, 예수님이 붙잡혀 가면서부터 얻어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실감 나게 묘사를 했어요. 그리고 떨어지고 이게 순식간에 눈 한쪽이 붓고 절뚝거리고, 그러면서 안나스 집까지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한번 상상해 봐야 될 영역이에요. 예수님을 붙잡고 그냥 곱게 데려갔겠느냐? 아니면 밀치고 주먹질하고 때리고 이러면서 데려갔겠느냐?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벗은 몸으로 도망간 청년

설교자는 마가복음 14장 51절과 52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순식간에 후다닥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그가 홑옷만 입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하며,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달아난 모습으로 전합니다. 그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고, 마가복음에 나오므로 마가 자신이 아니겠느냐는 얘기가 많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마가가 자기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핵심은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그 가운데 한 청년이 옷을 벗고 달아났다는 사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장면은 체포의 순간에 제자들이 얼마나 급히 흩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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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51절, 52절의 말씀을 나눠서 함께 보시겠습니다. 시작. 51절, 52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요한복음에는 그 표현이 안 나와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예수 제자들이 일단 순식간에 후다닥 도망을 갔고,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홑옷만 입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안에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그 사건이라니까 홑옷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 제자가 누구냐? 이게 궁금한데, 이것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이니까, 마가 자신이 아니겠냐는 얘기가 많습니다. 자기 이름을 넣을 수는 없고,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마가는 옷 벗고 도망갔다는 겁니다.

멀찍이 따라간 베드로와 늦게 오는 교인

설교자는 누가복음 22장 54절의 '멀찍이 따랐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자니 용기가 없고 도망가자니 양심이 괴로워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떨어져 갔다고 해석합니다. 말고의 귀를 칼로 깎았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우리 주변의 교인에게 적용합니다. 주님을 따르고 교회에 다니지만 확실히 믿자니 자신이 없고 떠나자니 벌을 받을 것 같아 교회에는 늦게 오고 일찍 가며, 행사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고 설교만 듣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베드로와 성향상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10–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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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누가복음 22장 54절에 아주 중요한 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 시작.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세,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멀찍이' 따랐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가까이 가자니 용기가 없고, 도망가자니 양심이 괴로우니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멀찍이 간 거예요. 왜 멀찍이 갔을까요? 갑자기 겁이 난 거예요.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깎았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주님을 따르고 교회를 다니는데 확실히 믿자니 자신이 없고, 교회를 안 다니자니 벌 받을 것 같고, 그러니까 교회 오긴 오는데 꼭 늦게 옵니다. 그리고 일찍 가십니다. 그리고 절대 교회 행사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설교만 듣고 가는 그런 형태의 사람이 이 베드로와 성향상 비슷합니다. 끼어들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게 됩니다.

겟세마네에서 잠든 제자들

설교자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고민하며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을 함께 읽으며,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돌아와 본 제자들은 마귀가 들린 듯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우시며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예, 주님' 하고는 또 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깨워 기도시켜도 다시 자는 모습이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땀을 피같이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과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강하게 대조하며,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위기 앞에서 준비되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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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을 제가 발견했어요. 기도해야 할 때 졸았어요. 기도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에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고민을 하셨는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죠. 예수님이 고민하여 죽게 되는데 너는 왜 자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죠.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통곡하며 기도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죠.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고, 예수님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하고 와서 제자들을 보면 이상해요. 마귀가 들린 듯 잠을 깊이 잡니다. 아주 확실하게 그냥 잤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깨우셨어요. 다 같이 기도 좀 하자. 그런데 베드로가 예, 주님, 그러고 또 잔 거예요. 몇 번씩이나 그랬냐면 세 번씩이나 그랬어요. 예수님은 깨워서 또 가서 기도하고 돌아보면 또 자고, 또 깨워서 기도시키면 또 자고 그렇게 됐어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그러셨는데,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땀을 피같이 흘리며 기도하는 것과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이 두 그림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종과 하속들 앞에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고, 그때가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 있었으며 베드로도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고 기록됩니다. 설교자는 이 여자가 대단하거나 무서운 인물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겁을 먹으면 상대가 굉장히 커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쩔쩔매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상태였고, 여자 문지기 앞에서도 신분을 숨기며 신앙 고백을 바꾸었다고 전합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옆에서 당신도 예수의 제자 같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나는 예수 제자가 아니라고 두 번째로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대제사장의 종 중 귀를 잘린 자의 친척이 동산에서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다그쳤고, 베드로는 다시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설교자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며 영적으로 비참해졌다고 말하며, 고난을 두려워하기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23–5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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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이 베드로가 첫 번째 '나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요'라고 부인을 합니다. 이 여자가 대단한 여자는 아닙니다. 무서운 여자도 아닙니다. 근데 사람이 한번 겁을 먹고 사람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이 굉장히 커 보여요.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도 쩔쩔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겁니다. 여자 문지기에게까지도 쩔쩔매고,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자기의 신앙 고백을 바꾸어 예수 나 안 믿는다, 나 예수 제자 아니라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발견하는 게 뭘까요? 두 가지. 그가 가진 믿음은 굉장히 좋은 믿음 같았는데, 사실 보니까 인간적인 믿음이었다. 육적인 믿음이었다는 거예요. 그게요, 보통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 들어오면 딱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러분에게 누가 욕을 바가지로 해 보면 알아요. 그리고 여러분을 막 오해하고 여러분을 막 힘들게 하면, 딱 그 순간에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적인 믿음인지 성령으로부터 온 믿음인지가 구분이 돼요. 제일 쉬운 예로,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릴 거냐 말 거냐, 이제 그런 거예요.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 리를 가고 이렇게 돼 있잖아요. 여기서부터 내가 가진 믿음이 인간적인 믿음이냐 인간적인 봉사냐,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냐 하는 것이 이제 드러나는 거예요. 베드로는 창피하게 다 드러난 거예요. 3년 따라다녀 봐야 말짱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수준이 그거니까. 그리고 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줄 알았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일부러 가서 기도하셨어요. 근데 그 아주 중요한 시간에 베드로는 졸았다 말이죠. 다른 제자들도 졸았다 말이죠. 그러니 영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때로는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들에게, 때로는 우리의 비즈니스에, 여러분이 일하는 직장에 위기가 올 수 있어요. 어쩌면 당신이 그 직장을 떠나야 될지도 몰라요. 다음 직장을 구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계속 가다가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런 불안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불안은 여러분을 점점 지배하게 될 거예요. 두려움은 점점 여러분을 지배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상상을 하지 못하고 나쁜 상상을 계속합니다. 최악의 상상을 하고, 나중에는 그 상상이 사실이라고 자기가 또 믿어요. 바로 이런 현상이 베드로에게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자, 요한복음 18장 19절부터 21절까지 쭉 읽겠습니다. 시작.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 제자들과 그 교훈을 물으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말하였노라. 내가 항상 회당과 성전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내게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자, 베드로가 그렇게 아주 겁에 질려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문지기 여자한테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시간에 재판과 질문이 시작된 거예요. 그 대제사장이 묻죠. 너는 제자들이 누구며 무엇을 가르쳤기에 여기까지 왔느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누구를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말이에요. 두려움이 없는 표정이에요. 왜 그럴까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거든요. 그날 밤에 금식하셨고, 그날 밤에 준비하셨고, 하나님하고 말씀을 많이 나누셨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거야.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은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되기를 축원하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세상에 어떤 사건이 생기고 누가 뭐래도 하나님하고 대화를 많이 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어. 아니 내가 어디 뭐 숨어서 얘기했냐? 다 공개적으로 얘기했는데 내가 하는 말은 숨길 것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고 싶으면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을 다 불러다 증인 삼아서 물어보면 알 거 아니냐. 아, 예수님의 그 태도가 얼마나 당당한지 몰라요. 그런데요, 또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당당한 사람을 꼴배기 싫어해요. 머리도 숙이고 손도 비비고 뭐 좀 이래야 권력자가 좀 이렇게 재미가 있는데 예수님이 안 그러시거든요. 요한복음 18장 22절 읽어 주십시오. 시작. 곁에 섰던 아랫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쳐서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말이 옳으냐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태도가 건방지다 이거예요. 어디서 딱딱거리고 대답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주먹이 하나 날아온 거예요. 여기 보니까. 근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도 또 흔들리지 않아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증거를 대라. 잘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자,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에 흔들림이 없었다는 거예요.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돈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폭력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않아요.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않지만 흔들리지도 않아요. 담담하게, 자유롭게, 불안하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없는 게 가장 불행한 게 아니라 흔들리는 게 불행한 겁니다. 여러분 집이 없는 게 불행한 게 아니고요. 여러분이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 휩쓸려 있는 게 불행한 겁니다. 미래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없는 이것이 문제지, 물질이 문제가 아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부 생활을 해 가면서, 사업을 해 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한두 번 있습니까? 그리고 이 어려운 문제가 지금 끝났다고 끝난 것입니까? 아니에요.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이 얘기를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환난이 와도 고난은 파도 같은 거예요. 저 또 왔다, 또 왔다, 또 왔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이 말이죠, 뚝을 넘지 않게 하기만 하면 돼요.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납니다. 물이 뚝 끝까지 왔다가 막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돼요. 근데 이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나요. 안나스 대제사장은 자기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사위인 가야바 대제사장에게로 예수를 보냅니다. 요한복음 18장 24절 읽어 주십시오. 시작.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더라. 자, 이제 카메라 앵글이 또다시 베드로에게로 왔어요. 지금까지는 베드로에게 있다가 이제 가야바에게로 갔다가 다시 앵글이 베드로에게로 돌아왔습니다. 25절 읽어 주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쬘 때에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도 그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더라. 이번에는 여자가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예수님 제자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다. 나는 예수 제자가 아니다라고 두 번 부인했습니다. 26절, 27절을 보십시오. 시작. 대제사장의 종 중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자의 친척 한 사람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너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하니,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매 곧 닭이 우는지라.

뚝을 넘지 않게 하는 물

설교자는 고난을 파도에 비유합니다. 고난이 와도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고, 또 왔다, 또 왔다 하며 거듭 닥쳐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들으면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뚝 끝까지 차올라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나고,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물이 뚝을 넘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환난이 와도 다시 가라앉을 수 있다는 적용을 전합니다.

하용조 · 2026-10-28

설교 내 44–44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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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환난이 와도 고난은 파도 같은 거예요. 저 또 왔다, 또 왔다, 또 왔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이 말이죠, 뚝을 넘지 않게 하기만 하면 돼요. 뚝을 넘으면 홍수가 납니다. 물이 뚝 끝까지 왔다가 막 찰랑거리고 난리를 쳐도 다시 내려가면 돼요. 근데 이 뚝이 무너지거나 물이 넘치면 사고가 나요.

태양 빛과 하나님을 바라봄

설교자는 태양을 비유로 들어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합니다. 태양빛으로 사물을 보면서도 태양 자체는 너무 강렬해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들여다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디모데전서 6장 16절을 근거로 하나님이 홀로 능력 있는 통치자이시며 완전하시고 홀로 불멸하신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불멸성은 하나님의 존재에 내재한 것이며,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불멸을 얻지만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방인도 영원히 살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지는 못한다는 구별도 덧붙입니다. 이어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했고 볼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설교자는 이 태양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빛나는 본성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2–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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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홀로 능력 있는 통치자이시며, 왕들의 왕, 주들의 주,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하십니다. 이것이 16절 첫머리의 진술이 가진 의미입니다. 그분만이 홀로 불멸하십니다. 그분의 불멸성은 그분의 존재에 내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면, 디모데후서 1장 10절 몇 구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생명과 불멸이 복음을 통해 드러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불멸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도 일종의 불멸성이 있습니다. 그들도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홀로 불멸하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믿는 자가 생명의 샘에서 마시며 불멸을 발견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불멸하실 뿐 아니라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십니다. 태양과 같아서 우리는 그 빛으로 보기는 하지만, 너무도 강렬하게 빛나기 때문에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셋째로,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다고 우리는 듣습니다. 그분은 불멸하시고 또한 보이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본 하나님의 뒷모습

설교자는 디모데전서의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출애굽기 33장의 장면을 떠올립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하자, 주님은 모든 선하심을 그 앞에 지나가게 하시며 자신의 이름 여호와를 선포하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없기에 얼굴은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바위 위에 서게 하고 바위 틈에 두신 뒤, 영광이 지나갈 때까지 손으로 그를 덮으셨습니다. 손을 거두자 모세는 주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근거로 하나님은 불멸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접근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기준에 맞춰 가둘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3–3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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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님의 보이지 않으심을 생각할 때, 바울이 출애굽기 33장의 장면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하심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내 이름 곧 여호와를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내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사람이 나를 보고 살 수 없음이니라."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바위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기까지 내 손으로 너를 덮으리라. 그리고 내가 손을 거두면 너는 내 뒷모습을 보게 되리니,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소설 속 인물 쉴라의 '작은 신'

설교자는 책 속 등장인물 쉴라의 말을 인용합니다. 쉴라는 '나에게는 나만의 작은 신이 있어'라고 말하며, 그 신을 쉴라라고 부르고 자신의 종교를 쉴라이즘이라 부릅니다. 설교자는 이것과 참된 신앙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단지 우리 자신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면, 그분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우리만의 신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설교자는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지으신 주 우리 하나님 앞에 무릎 꿇자'라고 고백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차를 운전하면서도 마음으로 예배하고 엎드리기를 바라며, 기도 가운데 정기적으로 무릎 꿇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또한 기도 중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만이 은혜로 다시 두 발로 일으켜 세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고 나눕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4–4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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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 이 놀라운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닫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의 경험 어느 지점에서든, 특히 예배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것에 마음을 쏟는지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단지 우리 자신의 연장선쯤으로 생각한다면, 그분은 마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우리만의 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인 쉴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작은 신이 있어. 그 신을 쉴라라고 부르고, 나의 종교는 쉴라이즘이라고 해." 글쎄요, 그것과 이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예배하러 나아갈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경배하고 엎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 우리 하나님 앞에 무릎 꿇자." 여러분은 차를 운전하면서도 마음으로 예배하고 엎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 가운데 정기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바랍니다. 이는 그분께 복종하는 행위이며, 제가 기도 가운데 무릎 꿇을 때 오직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다시 제 두 발로 일어서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체스터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구경꾼

설교자는 유럽의 작은 프랑스 마을이나 영국 체스터처럼 길의 높이가 사람 머리 위에 있는 곳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길보다 약 15피트 위의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은 아래로 걷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저 사람은 왜 혼자 걸을까, 어디로 갈까' 하고 이런저런 추측을 합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질문이 이론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길 아래에서 걷는 여행자에게는 같은 질문이 즉시 적용해야 할 실제 문제가 됩니다. 나는 혼자 걷고 있는가, 언제 길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잘 가고 있는가, 시간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적용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추측에 게을러서 발코니에 앉아 답 없는 질문을 던지기를 좋아한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태도가 게으르고 결국 헛되다고 경고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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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드리고 나니, 그것을 제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제 자신의 빈약함을 느낍니다. 개인적 적용으로서 세 가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림 하나를 그려 보면서 이것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어디든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유럽의 어느 곳이라고 해 봅시다. 제가 떠올리는 장면은 작은 프랑스 마을들 중 하나와 비슷합니다. 길을 걸을 때 길의 높이가 실제로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있는 곳입니다. 약 15피트쯤 됩니다. 그러니까 이층짜리 구조와 같습니다. 영국의 체스터에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 걸어가는 여러분보다 15피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발코니 층에 있습니다. 그리고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길에서 걷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오, 저 사람은 걸음걸이가 이상하네. 왜 혼자 걷고 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하네." 구경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질문과 잠재적 문제들은 이론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길 아래에 있다면, 그 질문들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것들은 한가한 추측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시 적용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혼자 걷고 있는가? 나는 언제 이 길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나는 잘 가고 있는가? 나는 시간을 지키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두 중대합니다. 이는 여행자에게는 구경꾼에게 중요하지 않은 방식으로 중요합니다. 이제 이것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추측에 있어 게으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발코니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답을 얻지 못하는 온갖 질문들이 있고, 때때로 그것들을 그저 던져 보기를 좋아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정탐 보고

설교자는 민수기 14장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간 열두 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땅을 살피고 돌아온 열 명은 '거기 가지 마라. 거기 거인들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했고, 모두가 그 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는 확실히 올라가서 이 땅을 취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이유가 거인이 없거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고 온전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어떤 이는 거인의 크고 키 큰 모습을 보았고, 어떤 이는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보았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이 그 모든 일 안에 계심을 보았습니다. 설교자는 이 차이가 곧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관점을 만든다는 적용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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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열두 명이 가나안을 정탐하러 갔을 때, 숙제로 민수기 14장을 읽어 보실 수 있는데, 그들이 땅을 살피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열 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 가지 마라. 왜냐하면 거기 거인들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등등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점에 동의합니다. 아무도 그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올라가서 이 땅을 취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거인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어려움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양에서 말하듯이, 어떤 이는 거인들이 크고 키가 큰 것을 보았고, 어떤 이는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았으며, 두 사람은 하나님이 그 모든 일 안에 계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차 뒤 범퍼 스티커 문구

설교자는 기독교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하며, 세상을 보는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강조합니다. 이어 자동차 뒤 범퍼에 붙은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다'는 문구를 예로 듭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뉴에이지식의 넌센스이자 완전히 헛소리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그것의 청지기로 세우셨다는 진리를 대비합니다. 설교자는 차 안에서 그 문구를 보면 스스로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하며, 거기서 설교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 하루를 살며 세계관의 흐름이 머리를 재배열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적용을 덧붙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8

설교 내 14–14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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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을 바로 세웁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거꾸로 봅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우리 세상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세계관 전체의 흐름이 여러분의 머리를 재배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차 안에서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믿으십시오, 차 뒤의 범퍼 스티커에 대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뒤에 이런 문구가 보입니다.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다." 거기서 설교를 시작하십시오. 얼마나 많은 넌센스인지. 그것은 완전히 헛소리입니다. 저는 그것이 헛소리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왜 저 사람은 혼잣말을 하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그것의 청지기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차 뒤의 그 뉴에이지 넌센스를 저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로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