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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7 / 32쪽 · 한 쪽 20개

말기야가 맡은 분문 수리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14절에 나오는 벧학게렘 지방의 지도자 말기야를 소개합니다. 말기야는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분문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분'이 오물이나 배설물을 뜻한다고 설명하며, 이 문이 똥문이라 불릴 만큼 궂은 자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리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팻말을 세우기는 어색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도 말기야는 이 자리를 기꺼이 맡았습니다. 설교자는 남들이 꺼리는 일을 맡은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사람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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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도 14절,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다 온 말기야의 이야기는 또 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14절을 자세히 보시면 그는 분문을 중수합니다. 한글로 분문 하니까 멋있어 보이죠? 여기서 ‘분’은 오물, 배설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덩 게이트’입니다. 예루살렘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던 문입니다. 똥문입니다, 똥문. 그거 지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여기 내가 지었음’이라고 팻말 하기 이상하잖아요. 그런데도 말기야는 여길 맡은 것이죠. 나중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의 거부와 드고아 사람들의 두 구간 수고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5절에 나오는 드고아 귀족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의 작은 성읍이었고, 귀족들은 공사를 돕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원문이 멍에를 매려 하지 않았다는 강한 거부의 표현을 쓴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다고 말하며, 교만이나 느헤미야에 대한 적대감 등을 가능성으로만 언급합니다. 반면 귀족이 아닌 드고아 사람들은 오히려 두 구간을 중수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통해 성벽 공사에 참여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은 헌신이었음을 적용합니다. 귀족들은 함께 세워지는 성벽을 보는 기쁨을 놓쳤다고 말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3–16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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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든 소도시 지도자들이 혹은 그 도시 귀족들이 이렇게 성벽 재건에 헌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5절에 드고아라는 지역의 귀족들이 나오는데요.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던 유다의 작은 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바로 이 드고아 도시 출신이에요. 그런데 그 드고아 귀족들은 공사를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저 분담하지 않았다 정도로 되어 있지만 원문으로 보면 훨씬 더 강력한 거부의 표현을 써요. 자기 목에 멍에를 매려고 하지 않았다, 멍에를 매고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표현입니다. 드고아의 일부 고위층은 성벽 건축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왜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교만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강 건너 페르시아에서 총독으로 온 느헤미야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죠. 아무리 그가 자기 동족이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 드고아 귀족들의 행동 덕분에 우리는 이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헌신이요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었겠습니까? 무거운 돌을 옮겨야 했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직업이 있었고 돌봐야 할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참여하지 않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이유들을 모두 작게 여긴 것이죠. 누군가는 목을 빼고 뒤로 물러섰지만 누군가는 기꺼이 자기 목에 멍에를 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일을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드고아의 사람들은 오히려 5절과 27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합니다. 므레못이라는 사람도 4절과 21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하고요. 므술람이라는 사람도 4절과 30절에서 두 구간을 중수합니다. 20절에 나오는 바룩이라는 사람은 한 구간을 중수했지만 성경은 그가 그것을 힘써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만 ‘힘써’라는 말이 나와요. 아마도 제일 어려운 구간을 공사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느헤미야 시대 성벽 완성과 백성의 다시 무너진 마음

설교자는 느헤미야 6장에서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도 불과 52일 만이었다고 설명하며 그 놀라움을 나눕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 마지막 13장에 이르면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안식일을 범하며, 하나님 앞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결국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책망하고 개혁해야 했습니다. 설교자는 무너진 성벽은 다시 쌓을 수 있었지만, 죄로 무너진 인간의 마음은 돌을 쌓는다고 회복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주 넘어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음을 새롭게 하실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결론짓습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26–2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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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벽이 다시 세워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 6장에 가면 성벽이 완성되죠. 그것도 불과 52일 만에 완성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지만 느헤미야서 마지막 13장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백성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깁니다. 질서가 무너지고 안식일을 범하고 하나님 앞에서 맺었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결국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서 그들을 책망하고 다시 개혁했어야 했죠. 무너진 성벽은 다시 쌓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무너진 인간의 마음은 돌을 쌓는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 오는 파고라에서 우산으로 복음 전도를 돕는 성도들

설교자는 지난주 새생명축제 때 비가 많이 와서 야외 파고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 어려웠던 일을 소개합니다. 파고라는 지붕은 있었지만 옆이 뚫려 있어서 빗물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김성훈 목사님에게서 들은 장면이 설교자에게 깊이 남았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는 테이블 뒤쪽에서 몇몇 성도들이 비닐우산을 들고 서 있었는데, 일부는 우산으로 빗물을 막고 일부는 몸으로 막아서 있었습니다. 우산 아래 하의는 다 젖었지만 그들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보며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달랐지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함께 바랐다는 점을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35–36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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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야외 파고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고라가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붕은 있어도 옆은 뚫려 있잖아요. 그래서 비가 막 들어왔습니다, 안으로. 그런데 우리 김성훈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참 잊히지 않는 그런 장면을 하나 소개받았습니다. 보시면 복음을 듣고 있는 분들의 테이블이 있고 그 뒤쪽으로 몇몇 성도님들이 우산을 들고 서 계시죠. 비닐우산이라 잘 안 보이지만 다 우산 들고 계신 겁니다, 지금. 일차는 비가 들어오는 걸 우산으로 막고, 이차는 자기 몸으로 막아서 서고 있는 것이죠. 비가 이렇게만 내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내리기 때문에 저렇게 서 계시면 우산 밑으로 하의는 다 젖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저게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것이구나.’ 비가 많이 왔지만 교회를 함께 세워 가니까 그것이 하나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어요. 누군가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진에서 누군가는 우산을 들고 그 비를 몸으로 막아서고 있습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함께 바라고 있었던 것은 똑같았죠. 저 테이블에 앉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갑상선과 맹장의 기능에 대한 과학적 오판

설교자는 몸의 각 부분에 저마다 기능이 있다는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사의 예를 듭니다. 그는 약 100년 전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갑상선에는 전혀 기능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기능이 밝혀졌다고 전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맹장에도 기능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그 기능을 모른다는 뜻일 뿐이며 매우 중요한 역할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몸 속에는 세포 하나, 머리카락 하나에 이르기까지 기능이 없는 것이 없고, 그것이 사소해 보여도 다른 것들과 함께 각자의 역할과 위치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는 교회 안에서 수동적으로 앉아만 있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교회의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졌으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기능이 있으며,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기능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는 작고 덜 눈에 띄는 역할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주신 기능이라면 중요하다는 적용으로 이 대목을 맺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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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에 대한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몸 속의 한 개의 입자조차도 기능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 기능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기능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과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00년 전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갑상선이 전혀 기능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무관절선들 역시 퇴화된 잔여물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맹장이 기능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기능을 모른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능이 매우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몸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세포 하나, 가장 작은 세포, 머리카락 하나, 아무것도 기능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래 보면 아주 사소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존재하고 있고, 다른 것들과 함께 작용하며, 각각의 역할과 위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오늘 아침 교회에 있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찾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교회 안에 침투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교회를 단순히 사람들이 앉아 설교와 강연을 듣는 건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요. 이는 전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본적인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서 각기 다른 구성원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능이 있고, 수동적으로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의 본질은 제가 말했듯이, 모든 부분과 입자, 모든 구성 요소가 각기 다른 특별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바라보면,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특권과 우리의 위치의 영광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형성하시는 이 놀라운 몸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역할과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요. 이제 저는 고린도전서 12장의 시작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기능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특별한 것이 하나씩 주어졌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믿고, 교회가 이 무서운 현대 세계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의 보존자이자 수호자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의무는 우리 각자의 기능을 알아내어 그것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릴 것처럼요.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각기 다른 것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은혜가 그리스도의 은사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다"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원칙은, 이 특별한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가 주는 것입니까? 사도가 이 점을 얼마나 신중하게 강조했는지 주목해 보세요. 사도는 그렇게 했습니다. 7절과 11절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은사의 분량에 따라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11절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수정된, 이 공인된 번역본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를 주셨다"고 읽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번역은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가 되게 하셨다"입니다. "그분께서는"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분"이 아니라 "그분께서는"입니다. 이는 강조의 표현입니다.

대가족 자녀들의 진로와 사역의 직업화

설교자는 예전 대가족에서 자녀들이 각기 다른 길을 걷는 관습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장남은 해군에, 차남은 육군에 들어갔고, 삼남은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사역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른 자녀들이 군인이 되는 것처럼 직업을 선택하는 마음가짐으로 사역에 들어갔습니다. 설교자는 이런 태도가 쌓이면서 교회가 얼마나 자주 쇠퇴했는지를 질문으로 던집니다. 그는 이 문제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사역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컨대 조용한 삶 속에서 문학을 읽고 시나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사역을 택하는 사람이 그 예입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부르심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런 모습이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혼란과 혼잡, 생명력과 능력의 부족이 나타난다고 말하며, 사역은 스스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5

설교 내 4–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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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 모든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제 이 문제의 가장 실용적인 측면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활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우리가 결코 넘어서지 못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드러나 있는 혼란의 대부분을 설명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부르심의 교리를 고찰할 것입니다. 교회 안의 남녀가 주님께서 주신 특정한 사역과 그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받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주제이며, 자주 오해받는 주제입니다. 저는 단순히 이 말씀 속에 드러난 원리들을 몇 가지 끄집어내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말해보겠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부르심 받은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갑자기 이나 저나 하는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즉, 자주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람은 갑자기 설교하거나 이나 저나 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부르심의 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교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하고 싶어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부르심 받은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사역이나 다른 어떤 일도 직업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역사와 교회 역사 속의 쇠퇴기를 보면, 이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이 그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가족에서 자녀들이 각각 다른 길을 걷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장남은 해군에 들어가고, 차남은 육군에 들어가고, 삼남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역에 들어간 사람들은 해군이나 육군에 들어간 다른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직업을 선택하는 마음가짐으로 사역에 들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얼마나 자주 쇠퇴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는 과거에만 한정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사역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인이 되고 싶어 하며, 조용한 삶을 살며 문학을 읽고 시나 소설을 쓸 시간을 가지려고 사역에 들어갑니다. 시골에서 살며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소득이 있고, 그 외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삶이 그에게 매력적입니다. 이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회가 오늘날 그러한 모습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서 부르심을 주신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간에 스스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과거에 자주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혼란과 혼잡, 생명력과 능력의 부족이 교회 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부르심 받은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필요가 부르심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정적인 진술입니다. 요즘 우리는 자주 ‘필요가 부르심이다’라고 말하지만, 필요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주님께서 필요 때문에 부르심을 주실 수는 있습니다. 필요 때문에, 또는 필요와 관련하여, 또는 필요가 있을 때 부르심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 자체가 부르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필요가 부르심이라면, 우리는 모두 그 필요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필요는 부르심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체 상황을 보시고, 교회 전체의 머리이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나 거기서나 동시에 여러 필요를 보십니다.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완벽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필요를 보고 ‘나는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주님의 뜻일 필요는 없습니다.

설교자가 받은 인도 의료 선교 제안 편지

설교자는 약 30년 전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며 복음을 전하려 하던 때의 일을 회상합니다. 그 무렵 외국 선교사단의 총무가 편지를 보내어, 그가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대신 인도의 병원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그 자리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편지를 보낸 이는 설교자가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설교자는 그 제안의 동기가 훌륭했고 그에게 깊이 공감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편지를 쓴 사람에게 성경적인 부르심의 교리를 믿는지, 주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선택하시고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신다고 믿는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그 점을 믿었기 때문에 인도에 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인 무례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교회나 필요가 사람을 특정 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고 적용합니다. 그는 사람을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5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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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나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실 수도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 우리는 이 성경에 어긋난 생각, 즉 필요가 부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주님만이 직접 부름을 주신다는 이 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말하겠는데, 교회는 부름을 주지 않으며, 교회가 사람을 특정한 일에 직접 부르는 일은 결코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이는 제 생각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우리 사랑하는 주님과 구주께서 직접 말씀하신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한 바를 뒷받침하고, 그 바탕을 세우고, 지지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졌으니,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사의 양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직접 어떤 사람을 사도로, 어떤 사람을 선지자로, 어떤 사람을 전도사로, 어떤 사람을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세요. 마태복음 9장 37절과 38절에 있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수확할 것이 풍성하나, 일꾼은 적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회가 사람의 손을 얹어 수확장에 내보내야 할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확할 것이 풍성하나, 일꾼은 적으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수확장에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우리가 그들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 그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우리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잊혀져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에게 이 일을 하라, 저 일을 하라, 이거나 저거나 하라고 제안합니다.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누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제안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로 사역하게 된 이유는 단지 어떤 나이 든 목사나 다른 누군가, 혹은 집사가 그들에게 '당신은 목회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약 30년 전, 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며 이 방식으로 사역에 들어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외국 선교사단의 총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제가 이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대신 인도에서 의료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에게는 당시 인도의 병원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저는 그 자리에 딱 맞는 인물이라고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었고, 그는 제가 인도의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의 동기는 훌륭했고, 저는 그분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단순히 한 가지 질문만 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적인 부름의 교리에 대해 믿습니까? 주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선택하시고,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신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 점을 믿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인도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거의 무례한 요소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무례 말입니다. 우리가 누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일에서도 실수를 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라고 서론을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사람에게 제안하는 일은 결코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은 더더욱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필요성이 강조되고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인상될 때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누가 자원할 사람인가?"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친구 여러분, 저는 이 문제를 이론적인 관심사로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들어보세요. 모든 젊은 기독교인의 의무는 선교장에 가는 것입니다. 부름 따위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필요가 곧 부름입니다.'

스푸전을 찾아온 자칭 부름받은 젊은이

설교자는 한 젊은이가 스푸전을 찾아와 자신이 성령께 부름을 받았으니 다음 주일 스퍼전의 회당에서 설교하겠다고 말한 일을 전합니다. 이에 스푸전은 매우 이상하다고 답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대답의 핵심을, 성령께서 일하실 때 한 젊은이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다른 지도자에게도 말씀하신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바울이 모든 일을 단정하고 질서 있게 행하라고 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교회에는 혼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사람은 충동에 휘둘리기 쉽고 적대자는 빛의 천사로까지 변신할 수 있으므로, 교회에는 이러한 주장을 점검하는 지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진정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교회 앞에 나아가 자신의 확신을 말하며 교회의 검토를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부르심은 개인의 주장만으로 확정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질서 있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5

설교 내 7–7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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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젊은이가 그에게 와서 자신이 영으로 부름을 받았고, 다음 주일 스푸어진의 회당에서 설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스푸어진의 대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그건 매우 이상하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는 젊은이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찰스 스푸어진에게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단정하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교회에는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질서 있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이러한 지침이 있습니다. 마치 어떤 점검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충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 약합니다. 적대자는 매우 교활합니다. 그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심지어 빛의 천사로까지 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리를 잡지 않습니다. 교회에 가서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부름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앞에 자신을 세우고, 교회가 그것을 검토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 일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 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완전히 다룰 수는 없고,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류와 위험이 네 방향에서 다가옵니다. 교회는 이 일을 영적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는 법적인 방식으로도, 고정된 방식으로도, 단순히 형식적인 방식으로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역사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 교회는 때때로 참혹한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정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교회가 "아니, 당신은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때 참혹하게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교회는 무오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자유와 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한편으로는 성령 안에 머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영향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역사가 종종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결국 부름을 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200년 전 영국 교회가 조지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면, 그 점이 잘 드러납니다. 당시 교회는 눈이 멀어 있었고,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분의 위대한 사역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교회는 틀렸습니다. 한편과 다른 한편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십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바로 이 은사를 주시는 방식을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주시는지, 불결한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수도승인 마틴 루터에게도, 법률가인 칼빈에게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십니다. 부르시고 주십니다. 교회는 항상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실수는 교회가 그 지점에서 성경적이지 않거나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만 부름을 주신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교회가 기관주의와 교회주의를 따르는 것은 사도의 교회 그림과는 전혀 거리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기계처럼 모든 것을 다루고, 너무나 뻔뻔해서 어디서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말입니다. 기관주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이 이 아름다운 단합을 이루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그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관주의와 교회주의는, 지금 다른 곳에서 보이는 혼란처럼 사람들이 스스로 자리를 잡고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만큼 교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를 대한 18세기 영국 교회

설교자는 200년 전 영국 교회가 조지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예로 듭니다. 당시 교회는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분의 위대한 사역에 보내신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보지 못했고, 설교자는 그 판단이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은사를 주셨는지를 덧붙여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마틴 루터, 칼빈 등 여러 인물을 들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은사를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교회는 항상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교회를 무시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합니다. 교회도 실수할 수 있으며, 그 실수는 교회가 그 지점에서 성경적이지 않거나 영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는 부르심은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주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기관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5

설교 내 7–7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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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젊은이가 그에게 와서 자신이 영으로 부름을 받았고, 다음 주일 스푸어진의 회당에서 설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스푸어진의 대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그건 매우 이상하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는 젊은이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찰스 스푸어진에게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단정하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교회에는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질서 있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이러한 지침이 있습니다. 마치 어떤 점검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충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 약합니다. 적대자는 매우 교활합니다. 그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심지어 빛의 천사로까지 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리를 잡지 않습니다. 교회에 가서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부름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앞에 자신을 세우고, 교회가 그것을 검토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 일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 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완전히 다룰 수는 없고,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류와 위험이 네 방향에서 다가옵니다. 교회는 이 일을 영적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는 법적인 방식으로도, 고정된 방식으로도, 단순히 형식적인 방식으로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역사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 교회는 때때로 참혹한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정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교회가 "아니, 당신은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때 참혹하게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교회는 무오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자유와 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한편으로는 성령 안에 머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영향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역사가 종종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결국 부름을 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200년 전 영국 교회가 조지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면, 그 점이 잘 드러납니다. 당시 교회는 눈이 멀어 있었고,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분의 위대한 사역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교회는 틀렸습니다. 한편과 다른 한편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십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바로 이 은사를 주시는 방식을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주시는지, 불결한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수도승인 마틴 루터에게도, 법률가인 칼빈에게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십니다. 부르시고 주십니다. 교회는 항상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실수는 교회가 그 지점에서 성경적이지 않거나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만 부름을 주신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교회가 기관주의와 교회주의를 따르는 것은 사도의 교회 그림과는 전혀 거리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기계처럼 모든 것을 다루고, 너무나 뻔뻔해서 어디서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말입니다. 기관주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이 이 아름다운 단합을 이루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그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관주의와 교회주의는, 지금 다른 곳에서 보이는 혼란처럼 사람들이 스스로 자리를 잡고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만큼 교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도시』와 미국 실용주의

설교자는 1960년대 대학원 시절 신학계를 뒤흔든 책으로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소책자 『세속의 도시』를 소개합니다. 이 책은 하버드 코스의 이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됩니다. 저자는 미국 사회의 현대적 세속화를 사회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는 미국 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미국이 본래 가진 유일한 철학적 체계인 실용주의라고 정의했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실용주의는 인간이 궁극적 진리를 이해할 능력에 회의적인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하버드 대학의 형이상학 클럽에 속해 있었으나 형이상학적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은 포기하고, 대신 궁극적 진리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 체계에서 선과 진리는 '그것이 효과적인가'로 정의되며, 설교자는 이것이 미국식 실용주의의 출발임을 짚습니다. 이 소개는 뒤에 나오는 본문의 가이파스가 보여주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실용주의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덧붙이며 이후 논의를 엽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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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복음에 대한 공부를 계속할 것이며, 오늘은 열한장 사십오절에서 열두장 팔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성경 말씀을 읽기 위해 교인 여러분께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믿었으나, 일부는 바로 안식일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회의를 모아 말했다. ‘우리가 이 사람을 그냥 두면 모두가 그를 믿게 되고, 로마 사람들이 우리 땅과 나라를 빼앗아갈 것이다. 이에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이파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며, 또 이 일이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이 나라가 멸망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 말은 가이파스가 자기 뜻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 대제사장이었던 그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죽으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며, 단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산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시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유대인들 가운데 공개적으로 다니지 않고, 그곳에서 들로 가서 에브라임이라는 마을에 계시며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다. "유대인들의 제사장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고,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 전에 성지에 올라 자신들을 정결케 하였다. 그들이 성전에서 서며 서로 말했다. ‘그분이 이 유월절에 오지 않을까?’ 이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행방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를 고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유월절 전 여섯 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있는 베다니에 이르셨는데, 그분께서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키신 분이셨다. 거기서 그분께 잔치를 베풀었고 마르다가 응접을 하였으며,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마리아는 귀중한 진귀한 향유 한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을 기름으로 문지르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으며, 집 안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제자 중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오테, 시몬의 아들이며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말했다. ‘이 귀한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왜 이렇게 낭비했겠는가?’ 그가 이 말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돈주머니를 맡아 보관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담긴 돈을 훔치려 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그녀를 놔두어라. 이 향유는 나의 장례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열린 이에게, 들으라. 기도하자. 아버지, 방금 들은 이 말씀을 우리의 이해와 교훈으로 열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앉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1960년대 대학원 시절, 신학계를 뒤흔든 책 중 하나가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소책자였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세속의 도시』였습니다. 이 책은 하버디 코스의 이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 책에서 그는 미국 사회의 현대적 세속화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이고 신학적인 분석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 문화의 형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이 본래 가진 유일한 철학적 체계인 실용주의(pragmatism)가 미국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정의했습니다. 실용주의라는 철학적 체계는 인간이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할 능력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의 철학자들과 선구자들은, 희이로운 일이지만 하버드 대학의 형이상학 클럽에 속해 있었지만, 형이상학적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은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우리가 궁극적인 진리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체계에서는 선과 진리는 ‘그것이 효과적인가’로 정의됩니다. 물론 미국식 실용주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럼즈펠드의 워싱턴 평가

설교자는 도널드 럼즈펠드가 최근 워싱턴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합니다. 럼즈펠드는 워싱턴 D.C.를 친구들이 가슴을 찌르는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통해 워싱턴이 신뢰와 우정이 쉽게 무너지는 권력의 장소임을 드러낸다고 전합니다. 이어서 그는 미국 교회가 예약지 안으로 밀려나 있다는 말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고, 믿음을 사모하며, 교회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공의 장소로 나아가 믿음을 고백하려 하면 예약지를 벗어나는 것으로 여겨져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현실을 공적 영역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경고로 제시합니다. 그는 이어질 사례들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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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 사역을 맡기신 사람들, 그들은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방 나라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또 로마인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협했습니다. 도널드 룸스펠드가 최근 워싱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워싱턴 D.C.는 친구들이 가슴을 찌르는 곳입니다.” 또한 미국 교회는 예약지로 놓여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여전히 믿음을 사모할 수 있으며, 여전히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로 예약지를 벗어나 믿음의 고백을 하려 하면 안 됩니다. 최근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국가 행사에서 기도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 기도를 마치며 그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는 큰 비난과 적의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기도한 것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그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것에 화를 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런 기도조차도 예의 바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 세상의 분노가 일어날 때, 프랭클린 그레이엄 같은 사람을 가장 많이 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예약지를 벗어나 복음을 공공의 장소에서 선포하면, 예약지의 평화를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적의의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사람을 그냥 두면 우리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며, 로마인들이 우리를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와 우리 민족 전체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며,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가야바스에게 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가야바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아주 어리석군요.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합니다. 나라를 위한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폰티우스 페يلا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들어간 이유를 궁금해해 보셨나요? 폰티우스 페يلا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신앙 고백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포함되지 않았고, 아나니아스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가야바스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폰티우스 페يلا는 포함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예수를 판단하며 “보소서, 이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고,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직무 수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폰티우스 페يلا가 스스로 예언자가 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를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했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원하는 대로 말씀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는 망아지와, 구스의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야바스가 여기서 예언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 일을 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앙 있는 유대인과, 특히 대제사장이 해야 할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묻는 질문은 “무엇이 실용적인 일을 할까?”였습니다. 몇 년 전 저는 교회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분열 위기에 처해 있었고, 장로회 연합회에서 조사위원회를 보내었으며, 저는 그 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위원장이 말했습니다. “좋아, 이제 보자. 목사, 부목사, 장로회원, 그리고 교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했고, 모든 조사가 끝난 후 그가 말했습니다. “좋아, 이제 보자.”

프랭클린 그레이엄의 국가 행사 기도

설교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최근 국가 행사에서 기도를 맡았던 일을 소개합니다. 그는 기도를 마치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그는 큰 비난과 적의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기독교인에게 기도를 부탁해 놓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화를 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런 기도조차 예의 바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분노의 결과로 가장 많이 해를 입는 이는 프랭클린 같은 사람이며, 결국 기독교인들 자신이 그를 해친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예약지를 벗어나 공공장소에서 복음을 선포하면, 평화를 누리던 다른 이들도 적의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례는 공적 자리에서 복음을 말하는 부담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는 적용으로 제시됩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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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 사역을 맡기신 사람들, 그들은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방 나라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또 로마인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협했습니다. 도널드 룸스펠드가 최근 워싱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워싱턴 D.C.는 친구들이 가슴을 찌르는 곳입니다.” 또한 미국 교회는 예약지로 놓여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여전히 믿음을 사모할 수 있으며, 여전히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로 예약지를 벗어나 믿음의 고백을 하려 하면 안 됩니다. 최근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국가 행사에서 기도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 기도를 마치며 그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는 큰 비난과 적의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기도한 것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그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것에 화를 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런 기도조차도 예의 바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 세상의 분노가 일어날 때, 프랭클린 그레이엄 같은 사람을 가장 많이 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예약지를 벗어나 복음을 공공의 장소에서 선포하면, 예약지의 평화를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적의의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사람을 그냥 두면 우리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며, 로마인들이 우리를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와 우리 민족 전체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며,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가야바스에게 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가야바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아주 어리석군요.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합니다. 나라를 위한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폰티우스 페يلا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들어간 이유를 궁금해해 보셨나요? 폰티우스 페يلا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신앙 고백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포함되지 않았고, 아나니아스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가야바스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폰티우스 페يلا는 포함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예수를 판단하며 “보소서, 이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고,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직무 수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폰티우스 페يلا가 스스로 예언자가 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를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했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원하는 대로 말씀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는 망아지와, 구스의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야바스가 여기서 예언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 일을 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앙 있는 유대인과, 특히 대제사장이 해야 할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묻는 질문은 “무엇이 실용적인 일을 할까?”였습니다. 몇 년 전 저는 교회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분열 위기에 처해 있었고, 장로회 연합회에서 조사위원회를 보내었으며, 저는 그 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위원장이 말했습니다. “좋아, 이제 보자. 목사, 부목사, 장로회원, 그리고 교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했고, 모든 조사가 끝난 후 그가 말했습니다. “좋아, 이제 보자.”

교회 분열 위기의 조사위원회 경험

설교자는 분열 위기에 놓인 한 교회의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나눕니다. 그 교회는 분열 위기에 있었고, 장로회 연합회가 조사위원회를 보냈으며 설교자도 그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위원장은 목사, 부목사, 장로, 교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자고 제안했고, 조사가 끝난 뒤 그는 자료를 살펴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실제 갈등이 있으며 목사, 부목사, 집사, 교인을 각각 보호할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정리했습니다. 설교자는 손을 들고 우리의 주된 임무는 진리와 은혜에 따라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늘 있어 온 실용주의와 즉결주의의 정신이라고 비판합니다. 설교자는 두려움과 갈등 회피로 결정을 내리는 자신과 사람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카이파스와 비교합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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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 사역을 맡기신 사람들, 그들은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방 나라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또 로마인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협했습니다. 도널드 룸스펠드가 최근 워싱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워싱턴 D.C.는 친구들이 가슴을 찌르는 곳입니다.” 또한 미국 교회는 예약지로 놓여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여전히 믿음을 사모할 수 있으며, 여전히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로 예약지를 벗어나 믿음의 고백을 하려 하면 안 됩니다. 최근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국가 행사에서 기도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 기도를 마치며 그는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는 큰 비난과 적의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기도한 것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그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것에 화를 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런 기도조차도 예의 바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 세상의 분노가 일어날 때, 프랭클린 그레이엄 같은 사람을 가장 많이 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예약지를 벗어나 복음을 공공의 장소에서 선포하면, 예약지의 평화를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적의의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사람을 그냥 두면 우리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며, 로마인들이 우리를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와 우리 민족 전체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며,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가야바스에게 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가야바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아주 어리석군요.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합니다. 나라를 위한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폰티우스 페يلا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들어간 이유를 궁금해해 보셨나요? 폰티우스 페يلا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신앙 고백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포함되지 않았고, 아나니아스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가야바스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폰티우스 페يلا는 포함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예수를 판단하며 “보소서, 이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고,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직무 수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폰티우스 페يلا가 스스로 예언자가 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를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했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원하는 대로 말씀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는 망아지와, 구스의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야바스가 여기서 예언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 일을 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앙 있는 유대인과, 특히 대제사장이 해야 할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묻는 질문은 “무엇이 실용적인 일을 할까?”였습니다. 몇 년 전 저는 교회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분열 위기에 처해 있었고, 장로회 연합회에서 조사위원회를 보내었으며, 저는 그 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위원장이 말했습니다. “좋아, 이제 보자. 목사, 부목사, 장로회원, 그리고 교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했고, 모든 조사가 끝난 후 그가 말했습니다. “좋아, 이제 보자.”

제너럴 모터스와 포르노그래피 보고

설교자는 한 전국적인 단체의 회장에게서 받은 편지를 인용합니다. 편지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포르노그래피를 유포하는 회사 중 가장 큰 회사가 제너럴 모터스라고 보고했습니다. 회장은 미국인들이 제너럴 모터스에서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전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포르노그래피 유포 업체는 AT&T의 자회사라고 설교자는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기업들이 우리 문화의 아이콘이면서도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불법'이라고 외치겠느냐고 묻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실용적인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교회 역사에서 복음이 과감하고 정확하게 선포될 때마다 박해가 뒤따랐다고 말하며, 자신이 박해 없이 사는 것이 헌신을 의심하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4–4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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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료를 살펴보자. 그는 말했다. "이 교회에는 진짜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목사를 도와주고 보호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는 것입니다. 부목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해결책도 필요하고, 집사들의 보호를 위한 해결책도 필요하며,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해결책도 필요합니다." 그가 이 목록을 다 돌았을 때, "이 외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손을 들어서 말했습니다. "네, 우리의 주된 임무는 진리와 은혜에 따라 정의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튼 그렇게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해온 실용주의와 즉결주의의 정신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세상 역사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분이 처형당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카이파스와 비슷한가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두려움으로 인해 결정을 내리는지 아시나요? 우리는 비합류자가 되고 싶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다른 리듬에 맞춰 걷고 있다고 보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적대감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침묵합니다. 저는 이번 주에 한 전국적인 단체의 회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포르노그래피를 유포하는 회사 중 가장 큰 회사가 제너럴 모터스라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야구, 사과파이, 그리고 포르노그래피입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제너럴 모터스에서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포르노그래피 유포 업체는 AT&T의 자회사입니다. 이 회사들은 우리 문화의 아이콘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업을 통해 엄청난 양의 수익을 얻고 있습니다. 누가 "불법"이라고 외칠까요? "불법"이라고 외치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고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실용적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복음이 과감하고 정확하게 선포될 때마다 항상 박해가 따랐습니다. 저는 박해를 찾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박해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제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저는 갈등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이파스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제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카이파스와의 대조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카이파스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처형하려 했습니다. 카이파스와 대비되는 인물로 라자루스의 누이인 마리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루스 집에서 저녁을 먹고 계실 때 마리아가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연봉에 해당하는 값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과감하게 사랑과 예배의 희생을 드리며 예수님의 발을 이 귀중한 향유로 문지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는 과감한 사랑입니다. 유다는 이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그 값이 얼마나 비싼지 아시지 않으십니까?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그가 인도주의적 고민에 따라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경은 유다의 마음속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그 돈이 보물창고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보물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들의 재정 책임자였고,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자 횡령자가었습니다. 이제 그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여인이 돈을 과도하게 쓰며 예수님의 발에 귀중한 향유를 부을 때 자신의 이익이 바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분께 과도한 선물을 드리는 일은 때때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과도한 예배의 표현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과도한 예배나 찬양, 영광 돌림은 무엇일까요? 이 방에 계신 분들 중 누구든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과도한 선물을 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유일한 정당성은 느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었을 때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클리블랜드 도심 목사의 사역 이야기

설교자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도심 빈민가에서 수십 년간 사역한 목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목사는 마약 중독과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이웃을 섬겼고, 한 번에 한 명씩 부목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부목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2년이었고, 2년이 지나면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는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고 마약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려 애썼지만 실망하여 우울해지고 좌절해 떠났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오래 남을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예수님의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가난을 없앨 생각이나 마약 밀매를 끝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면 다섯 명이 다시 빠져드는 현실을 알았고, 자신의 사명은 이 문제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그들이 있을 때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증거를 마리아의 태도와 연결하며, 마리아가 지금 그리스도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본다고 적용합니다.

R.C. 스프로울 · 2026-10-25

설교 내 5–5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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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내부 도심가난한 이웃에서 수십 년간 사역한 목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마약 중독과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한 번에 한 명씩 부목사를 데려오셨지만, 그 부목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두 년이었습니다. 두 년이 지나면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왜 그분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나요?”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실망을 했습니다. 신학교를 나와서 가난한 이웃에 나와 그리스도를 섬기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두 해 동안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마약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분은 이어가셨습니다. “그들이 우울해졌고, 좌절하여 떠났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당신은 이 긴 시간 동안 남아 있을 수 있었나요?”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말씀인가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들어본 바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을 핑계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왔을 때 가난을 없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클리블랜드에서 마약 밀매를 끝내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저는 교인들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이어가셨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가난한 이웃에서 한 사람을 구원할 때마다, 그 자리를 대체할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마약에서 구원하면, 이 가난한 이웃에서는 다섯 명이 다시 빠져듭니다. 그러나 제 사명은 가난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사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사명은 이 문제들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그들이 이곳에 있을 때, 제가 이곳에 있을 때 섬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마리아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장례에 쓸 것을 간직했지만, 이제 저는 이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내일, 모레, 또 그 다음 날에도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지만, 매일이 제가 그리스도께 애정을 표현할 기회는 아닙니다. 결국 이분은 제 형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낸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와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자로는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도한 허영이었을까요?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의 열 배를 가져와야 할 사람은 카이파스였습니다. 카이파스는 거기서 말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표적들을 보았습니다. 로마 군대가 오든 말든,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카이파스에게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에게도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 이 허영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지 2천 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이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행위, 이 예배의 행위, 이 찬양과 영광의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원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용주의와 즉흥주의 철학에 치명상을 입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실용주의 철학이 결국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어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바꾸어 놓겠는가?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당신의 명성인가? 당신의 편리인가? 일 년의 급료인가? 안전인가?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세상 전체를 합쳐도, 당신의 영혼의 가치를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우리는 마리아의 증거를 기뻐합니다. 우리는 카이파스의 예를 회개합니다. 주님, 우리가 종종 두려움과 자존심으로 인해 즉흥적인 길을 택하는 것을. 아버지, 첫 세기의 성도들이 실용주의를 거부하고 주님께 허영스럽게 봉사했던 용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로윈의 기원으로 소개된 켈트족 사윈 축제

설교자는 10월 31일이 오늘날 할로윈으로 알려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할로윈이라는 말의 어원부터 짚습니다. '할로윈'은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s Day)'의 전날을 가리키는 말로, 'Hallow'에 거룩함과 성인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할로윈의 뿌리는 고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 켈트족의 '사윈 축제'에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11월 1일을 정월 초하루로 여겼고, 10월 31일에 1년 동안 땅을 떠돌던 죽은 자의 혼이 머물 몸을 찾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이 자기 몸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귀신 분장을 하고 방을 춥게 하는 풍습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후 로마 가톨릭이 이 지역에 선교하면서 기존 날짜를 옮겨 11월 1일을 만성절로 지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설교자는 이것이 여러 설이 얽힌 가장 유력한 설명이라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죽은 자의 영혼이 떠돈다고 믿은 켈트족의 미신과 성인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로마 가톨릭의 행태가 모두 죽은 자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왔다고 적용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1–2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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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이렇게 남서울교회에 오게 되어 여러분과 함께 복음에 대해, 그리고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고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남서울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교회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신학의 충실한 목회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화종부 목사님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시지만, 저희 또래에서 늘 존경받고 또 본받고 싶었던 목회자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저와 함께 공부했던 많은 동료들이 실제로 남서울교회에 와서 사역을 배우고 오랫동안 섬기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저를 처음 보셨겠지만, 저는 남서울교회를 한 번도 낯선 교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제 주변에서 좋은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는 분이 계시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남서울교회를 추천해 왔습니다. 제 친한 동료 교수님도 따님에게 추천하셔서 등록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비록 이 교회의 성도는 아니지만, 남서울교회는 오래 전부터 제가 마음으로 친숙하게 여기고 늘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아 온 교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원선 목사님과 남서울교회 성도 여러분들을 이렇게 함께 만나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한 교회가 오랜 시간 건강한 복음 위에 세워지고, 새로운 목회적 섬김 가운데 그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종교개혁의 신앙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뜻깊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024년 7월부터 2년을 넘게 화종부 목사님께서는 로마서 말씀을 강해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그 설교를 들어왔고, 그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돌아가야 할 성경이 바로 이 로마서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죄와 구원의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씨름하다가 마침내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7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지난 시간 동안 강단을 통해 계속 들어오셨던 그 복음이 약 500년 전, 정확히는 509년 전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시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게 고백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진리가 얼마나 놀랍고 귀한 복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특강의 제목은 보시는 것처럼 ‘왜 하필 10월 31일이었을까’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면제부를 반박하는 95계조 논문을 발표한 사건을 우리는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출발점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필 10월 31일이었을까요? 왜 마르틴 루터는 다른 날짜가 아닌 10월 31일을 택했을까요? 그 날짜에는 당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고, 마지막에 다시 로마서 말씀으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이 다시 발견했던 복음의 본질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그림처럼, 오늘날 10월 31일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네, 할로윈이죠. 많은 사람들이 할로윈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할로윈이 원래 무슨 용어인지 아십니까? 이 말을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면 ‘만성절 전야’가 됩니다. ‘만성절 전야’. 영어로 ‘All Saints’ Day’를 ‘All Hallow’s Day’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 주기도문을 영어로 외워 보시는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Hallow’ 단어가 익숙하실 거예요.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그죠? ‘Hallow’란 말에는 ‘Holy’라는 어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말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성인’이라는 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All Hallow’s Day’가 되면 ‘모든 성인의 날’이고요. ‘모든 성일의 날’의 전날은 바로 우리가 아는 식으로 말하면 ‘할로우 이브’가 되겠죠. ‘Hallow’란 말이 스코틀랜드식으로 발음되다가 조금 변형되면서 ‘할로윈’이 되는 것입니다. 그니까 ‘모든 성인의 날’ 전날이 ‘할로윈’을 가르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는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닝’의 줄임말이거든요. 그런데 왜 ‘크리스마스 이브닝’을 우리가 ‘크리스마스 전날’이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크리스마스 2부’라는 용어를 쓰게 된 그 배경에는 독특한 유대-기독교적인 시간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우리가 근대 표준체를 쓰기 때문에 자정에서부터 하루가 시작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정했을까요? 여러분들은 언제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추측을 해 보세요? 성경 창세기 1장 5절을 보면 힌트가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유대-기독교 문화에서 하루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해가지고 나서, 일몰 후부터 그 다음 일몰 때까지를 기준으로 하루로 삼았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킬 때 금요일 저녁 해 지는 다음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표현은 사실은 ‘크리스마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기독교 문화권에서 축일을 지킬 때는 그 전날 저녁부터 하루 시작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기념해서 미사와 예배를 드려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올 홀로스데이’ 이전 ‘할로윈’이 중요한 날이 되었을까요? 오늘날의 ‘할로윈’이라고 하는 풍습은 사실은 매우 미신적인 풍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트릭 오어 트리트’를 외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축제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할로윈’이라고 하는 축제는 ‘사윈 축제’라고 하는 고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의 켈트족에서 지키던 하나의 풍습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11월 1일을 정월 초하루라고 생각했고, 10월 30일을 그 해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이 생각했던 여러 미신적 생각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의 혼이 곧바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1년 동안 땅을 떠돌다가 가게 되는데, 한 해의 마지막 해인 10월 31일에 그들이 머물 몸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이 내 몸에는 들어오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도 너희와 똑같은 귀신이야’라고 하면서 귀신 분장을 하고, 방을 춥게 하면서 지냈던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로마 가톨릭이 선교를 하고 들어가면서, 그 당시에 로마 가톨릭의 만성절이 원래 5월 13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5월 13일이었던 만성절을 선교적 목적으로 동화시키고, 모든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날이나 모든 성일을 기념한 날의 접점을 가지고 11월 1일을 만성절로 정해서 지켰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으로 모든 것이 정확하게 고정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설이 얽히면서 가장 유력한 설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할로윈 데이’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돈다는 미신을 믿었던 고대 켈트족 사람들이나, 소위 ‘성인’이라고 부르는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고 그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로마 가톨릭의 행태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똑같이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현재적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성인을 중요시 여겼을까요? 사실 루터가 있었던 비텐베르크의 그 성개조 논쟁이 붙었던 그 성의 교회 이름은 ‘오센치’였습니다. ‘모든 성인의 교회’, ‘만성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 날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수호해 주는 수호성인에게 기도하고 기념하고 그들을 공경하기 위해 모든 마을의 사람들이 나아와서 축제에 참여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날을 ‘만성절 전야’ 때 95계조 반박문을 붙인 것이라고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들에게 성인은 중요했을까요? 여러분들 주변에 가톨릭 신자들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죠. 처음 들어보는 성인들도 있고, 다양한 성인들, 머리 뒤에 둥근 헤일로가 있는 사람들을 성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요. 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가톨릭의 독특한 죄용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제가 가톨릭 신문에서 가지고 온 건데요. 이건 그 당시 정진석 주교(이제 돌아가셨음)가 교회법 전공자로서 교회법을 해설하면서 ‘고해성사를 받으려면 다섯 가지 요소를 채워야 한다’는 주제로 기사를 쓴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심령을 통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흘리신 피와 대신 당하신 고통,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이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죄용서 요건을 보면, 첫 번째는 성찰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살피는 것이죠. 두 번째는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니 죄를 지은 것이 있어서 ‘내가 정말 죄를 지었구나’ 하는 진정한 통회와 뉘우침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이제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생길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고해 신부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고해 신부에게 자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듣고 고해 신부는 "너가 너의 죄가 이러하니,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바로 마무리가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속입니다. 보속이란 보상하는 속죄 같은 개념입니다. 뒤에 PPT가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범죄로 인한 보상하는 선행과 죄책에 따른 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가톨릭의 죄와 벌에 대한 개념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이 주장하기로는, 용서는 죄는 없애 주지만 그 결과는 바꿔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운전을 하다가 앞차를 박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서 "괜찮아요,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라고 한다면, 사실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보험사에 전화해서 차량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개념을 빌리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갚기 위해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해 줍니다.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는 식의 보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심각할수록 보속도 더 무거워집니다. 문제는 보속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순결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오히려 더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오히려 작은 흠집들을 더 큰 죄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큰 죄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양심을 짓누르게 됩니다. 보속을 행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모든 보속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보속을 이행하는 중에 또 새로운 죄가 마음속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정도 죄를 저지르고 보속을 받았는데,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한 삶을 살면서도 고해 신부를 찾아가지도 않고 보속도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다시 누군가를 미워했다

앞차를 박은 사고에 비유한 보속 설명

설교자는 로마 가톨릭의 보속 개념을 쉽게 전하기 위해 운전 중 앞차를 들이받은 상황을 비유로 듭니다.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 용서한다고 말해도, 보험사에 차량 피해를 보상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사고가 마무리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빌려 가톨릭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남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해를 갚기 위한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하며,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나 선행, 성경 구절 암송 같은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보속 체계의 구조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청중이 이해하도록 돕고, 이 체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부담스러운지를 드러냅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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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생길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고해 신부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고해 신부에게 자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듣고 고해 신부는 "너가 너의 죄가 이러하니,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바로 마무리가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속입니다. 보속이란 보상하는 속죄 같은 개념입니다. 뒤에 PPT가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범죄로 인한 보상하는 선행과 죄책에 따른 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가톨릭의 죄와 벌에 대한 개념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이 주장하기로는, 용서는 죄는 없애 주지만 그 결과는 바꿔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운전을 하다가 앞차를 박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서 "괜찮아요,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라고 한다면, 사실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보험사에 전화해서 차량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개념을 빌리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갚기 위해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해 줍니다.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는 식의 보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심각할수록 보속도 더 무거워집니다. 문제는 보속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순결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오히려 더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오히려 작은 흠집들을 더 큰 죄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큰 죄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양심을 짓누르게 됩니다. 보속을 행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모든 보속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보속을 이행하는 중에 또 새로운 죄가 마음속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정도 죄를 저지르고 보속을 받았는데,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한 삶을 살면서도 고해 신부를 찾아가지도 않고 보속도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다시 누군가를 미워했다는 죄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보속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보속이 필요해지면, 결국 보속의 양이 무한대로 쌓이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이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갚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그래서 다 갚지 못한 벌을 잠벌이라고 합니다. 잠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잠벌을 해소하지 못한 신자들은 바로 연옥에 가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독특한 교리 중 하나인 연옥 교리가 필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잠벌을 해결하고 죽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가톨릭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한 신자가 가톨릭 신부에게 질문한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죽은 뒤 거의 천국은 못 간다고 하시더군요. 왜냐하면 치유해야 할 보속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경건하게 살고 훌륭한 삶을 살았는데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신부님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아주 성스러운 사람들조차도 완전하고 경건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치유되지 않은 상처, 슬픔, 아픔, 고통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걸 가져가서 천국에 가는 것이겠습니까?"였습니다. 연옥에서의 시간은 단지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닙니다. 단체의 신고를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단테의 『신곡』에 잘 나와 있듯이, 일곱 가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연옥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한 확신을 원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그러한 확신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독특한 교리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공로의 보고 교리입니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은 잉여 공로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충분한 공로를 쌓지 못한다고 보지만, 성인들, 순교자들, 사도들, 선지자들처럼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값을 치렀고, 그 외에도 잉여된 공로가 있다고 봅니다. 마치 은행에 예금된 돈처럼, 그 잉여 공로는 보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공로의 보고 교리는 가톨릭에게 매우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교황이 그 보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고, 보속을 다 갚지 못한 신자에게 그 공로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 사전에 들어가서 '대사'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대사는 바로 면죄부입니다. 면죄부를 줄 때 우리가 공수표를 날릴 수 없듯이, 면죄부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고입니다. 교회는 그 공로를 마음껏 나눠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공로의 보고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인들은 천국에 가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 공로가 있어, 부족한 신자가 성인들에게 매달리면 그 잉여 공로가 내려와 연옥에서의 고통이 줄어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공로의 보고 교리를 살리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사도신경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다르게,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모든 성인들이 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인들이 쌓은 공로나 지상의 신자나,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공로가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공로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전달될 수 있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벌부를 산다면, 그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공로를 얻기 위해서는 마리아 공경이 가장 큰 부분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고, 수많은 성인들을 공경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성인들이 남긴 성유물을 참배하는 것입니다. 성유물을 참배하려면 성지로 가야 합니다. 성지 순례를 많이 하였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면벌부를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용어는 면벌부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용서받았지만 잠벌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면벌부를 구입함으로써 자신의 벌을 면하게 되는 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유회는 지금도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너무 거룩해서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유회가 남겨져 교회당 안에 전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문에 실린 신자와 신부의 문답

설교자는 가톨릭 신문에 실린 한 기사를 가져와 신자와 신부의 문답을 인용합니다. 한 신자가 가톨릭 가르침에 따르면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어렵다고 하는데, 경건하고 훌륭하게 산 사람도 천국에 가는 경우가 없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신부는 대부분의 성스러운 사람들조차 완전하고 경건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답합니다. 신부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슬픔, 고통을 죽을 때까지 다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설교자는 이 대화를 근거로 연옥에서의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우 길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단테의 『신곡』을 언급하며 연옥의 고통이 얼마나 긴지 보여 줍니다. 설교자는 이 문답이 잠벌과 연옥 교리가 필요해진 배경이라고 말하며, 구원의 확신을 얻기 어려운 신자들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2–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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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생길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고해 신부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고해 신부에게 자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듣고 고해 신부는 "너가 너의 죄가 이러하니,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바로 마무리가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속입니다. 보속이란 보상하는 속죄 같은 개념입니다. 뒤에 PPT가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범죄로 인한 보상하는 선행과 죄책에 따른 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가톨릭의 죄와 벌에 대한 개념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이 주장하기로는, 용서는 죄는 없애 주지만 그 결과는 바꿔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운전을 하다가 앞차를 박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앞차 주인이 인자하게 내려와서 "괜찮아요,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라고 한다면, 사실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보험사에 전화해서 차량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하고, 병원비도 해결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개념을 빌리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피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갚기 위해 추가적인 실행이 필요하고, 이를 보속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 신부가 정해 줍니다. 가벼운 죄라면 교회 청소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는 식의 보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심각할수록 보속도 더 무거워집니다. 문제는 보속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순결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오히려 더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오히려 작은 흠집들을 더 큰 죄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전에는 큰 죄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양심을 짓누르게 됩니다. 보속을 행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모든 보속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보속을 이행하는 중에 또 새로운 죄가 마음속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정도 죄를 저지르고 보속을 받았는데,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한 삶을 살면서도 고해 신부를 찾아가지도 않고 보속도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다시 누군가를 미워했다는 죄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보속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보속이 필요해지면, 결국 보속의 양이 무한대로 쌓이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이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갚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그래서 다 갚지 못한 벌을 잠벌이라고 합니다. 잠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잠벌을 해소하지 못한 신자들은 바로 연옥에 가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독특한 교리 중 하나인 연옥 교리가 필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잠벌을 해결하고 죽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가톨릭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한 신자가 가톨릭 신부에게 질문한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죽은 뒤 거의 천국은 못 간다고 하시더군요. 왜냐하면 치유해야 할 보속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경건하게 살고 훌륭한 삶을 살았는데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신부님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아주 성스러운 사람들조차도 완전하고 경건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치유되지 않은 상처, 슬픔, 아픔, 고통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걸 가져가서 천국에 가는 것이겠습니까?"였습니다. 연옥에서의 시간은 단지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닙니다. 단체의 신고를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단테의 『신곡』에 잘 나와 있듯이, 일곱 가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연옥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한 확신을 원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그러한 확신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독특한 교리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공로의 보고 교리입니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은 잉여 공로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충분한 공로를 쌓지 못한다고 보지만, 성인들, 순교자들, 사도들, 선지자들처럼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값을 치렀고, 그 외에도 잉여된 공로가 있다고 봅니다. 마치 은행에 예금된 돈처럼, 그 잉여 공로는 보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공로의 보고 교리는 가톨릭에게 매우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교황이 그 보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고, 보속을 다 갚지 못한 신자에게 그 공로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 사전에 들어가서 '대사'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대사는 바로 면죄부입니다. 면죄부를 줄 때 우리가 공수표를 날릴 수 없듯이, 면죄부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고입니다. 교회는 그 공로를 마음껏 나눠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공로의 보고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인들은 천국에 가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 공로가 있어, 부족한 신자가 성인들에게 매달리면 그 잉여 공로가 내려와 연옥에서의 고통이 줄어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공로의 보고 교리를 살리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사도신경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다르게,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모든 성인들이 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인들이 쌓은 공로나 지상의 신자나,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공로가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공로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전달될 수 있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벌부를 산다면, 그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공로를 얻기 위해서는 마리아 공경이 가장 큰 부분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고, 수많은 성인들을 공경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성인들이 남긴 성유물을 참배하는 것입니다. 성유물을 참배하려면 성지로 가야 합니다. 성지 순례를 많이 하였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면벌부를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용어는 면벌부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용서받았지만 잠벌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면벌부를 구입함으로써 자신의 벌을 면하게 되는 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유회는 지금도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너무 거룩해서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유회가 남겨져 교회당 안에 전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테첼의 면벌부 설교

설교자는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로 요한 테첼을 소개합니다. 테첼은 헌금함에 금화가 떨어지는 그 순간 연옥의 영혼이 튀어 올라가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설교하며 다녔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면벌부에 적힌 문구도 함께 짚습니다. 면벌부는 모든 성인의 권한으로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한다고 적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열흘에 불과한 벌을 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를 되묻습니다. 평생 쌓아 온 보속을 해결하려면 자신의 재산은 물론 자식과 돌아가신 부모님까지 생각해야 할 만큼 무거운 보속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통해 평생의 보속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체계가 신자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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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김대건 신부 유해를 둘러싼 성지 이야기

설교자는 경기도 미린의 성지에서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현장을 소개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를 성당 한가운데 모셔 두고, 지하실에는 종아리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매우 기괴한 일이라고 말하며, 성인의 유해가 영험하다고 여겨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 여러 성당과 수녀원, 신부와 수녀에게 나누어졌다고 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척추뼈를,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를 가지고 있으면 성인의 영험한 효력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최근 김대건 신부의 척추뼈가 천만 원에 거래된 사건을 언급하며, 교회가 전수 조사를 했지만 관행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를 미신과 같은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과거 중세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고 적용합니다.

김현관 · 2026-10-25

설교 내 3–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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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인을 보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그 성인이 쌓아 놓은 잉여 공로가 나에게 오기 때문에, 이 성인들이 저런 상태로 계속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세 번째, 저 빨간색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으로 상상이 되세요? 바로 아래 턱뼈입니다. 혹시 누군가의 아래턱뼈를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분명히 성인의 아래턱뼈죠. 보시면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미린의 성지라고 하는 곳에서 김대건 신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고, 그 김대건 신부에게 기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래턱뼈를 모셔 놓고, 바로 성당 한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종아리뼈까지도 그 지하실에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이게 엄청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성인의 유회가 너무나도 영험하고 효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걸 누구 하나 혼자 갖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조각조각 수백 조각으로 나눕니다. 보시면 여러분들, 어떤 성당, 어떤 수녀원, 어떤 신부, 어떤 수녀 이렇게 기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척추뼈, 어떤 사람은 종아리뼈, 다 수백 개를 쪼개 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이 성인의 어떤 그 영험한 효력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미신과 같은 생각, 즉 우상숭배를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옆에 보시면 번개장 보이시죠?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의 척추뼈를 팝니다. 천만 원에 누가 올렸어요? 저 조그만 뼈조각을. 그래서 얼마 전에 이게 너무나 큰 사건으로 이슈가 터져 가지고, 이 천주교회에서 전수 조사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례나 이러한 어떤 행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성지를 가야 우리가 성인들의 유회라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은 성지 순례를 많이 떠났습니다. 이 성지순례야말로 정말 중요한 대사 면벌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중세 때 가장 중요했던 성지는 어디였냐면,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그 다음에 로마.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그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 그 다음에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산티아고. 이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중세 누군가 8세기쯤에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교황청에서 인정함으로써 성 야고보의 유회가 저기에 있다고 전해지면서,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성지 순례길이 많은 여행자들에게 로망처럼 산티아고 솔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디포스텔라라는 이름으로. 근데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죠. 누군가의 주장이었습니다. 어떤 양측의 목동이 여기서 갑자기 야고보 성인이 나타났다. 자기에게 꿈에 나타났다. 봤더니 거기에 묻어 뼈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 여기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구나. 그 정도의 입증 절차였습니다. 중세 많은 사람들이 보시면, 정말 온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저렇게 중세 곳곳에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루트가 지금의 도시들을 만든 루트가 됐어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그 루트가 정말 엄청났습니다. 이 성지 순례가 너무 중요하고, 성지 순례주로 지정된 도시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 어떤 축기경 같은 정도의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그 마을 청년 회의에서 난리가 납니다. 누가 대타가 될 것이냐. 그러면 걸린 사람이 그날 밤에 그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순교지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유회가 묻혀 있는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지 순례라고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고, 저 중세 시대 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보시면 몇 년 전 일입니다. 보시면 이탈리아 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요청을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타격이 너무 크다.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우리 못 살겠다.라고 탄원을 하니까, 교황청에서 아, 그러면 이번 2021년 6월 며칠부터 9월 17일까지, 성지 순례하면 전대사를 주겠다. 이렇게 발표를 해요. 전대사는 뭐냐면, 모든 벌을 다 면해 주겠다. 모든 벌을 다 면해 주는 전대사입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여러분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사 대사를 한 번 봤다고 한들, 그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 내가 구원 얻기에 확신을 갖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쌓여가는 보속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갔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중세 루터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체계 안에서 전혀 자신의 구원의 확신, 죄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실제로 그 루터가 활동했을 당시에 가장 유명한 면제부 판매자 이름이 요한 태젤입니다. 요한 태젤이 했던 유명한 설교 중 하나가, 돈이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즉시 한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올라가서 천국으로 치행한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면벌부에 써 있는 말이, 모든 성인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그대를 불쌍히 여기며, 나는 그대를 모든 죄와 악행에서 사면하고 열흘 동안의 모든 벌을 면제한다. 열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봤자. 열흘 동안의 벌을 면제하노라. 그럼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자신의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여러 가지 보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보석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떠한 돈을 전재산을 다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보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중세 로마 가톨릭이 신자들의 양심을 유린하고 있을 때, 그때 루터라는 한 수도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보시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고,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경 교수가 됩니다. 참,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한 것도 재밌는 일화인데, 루터가 대학을 다닐 때 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숲을 지나가는데, 그 숲이 너무나도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이 몰아닥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루터가 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누구한테 기도했냐면, 성 안나시여, 혹시나 내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소원을 합니다. 여기서 성 안나가 누구냐면,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고,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는 그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어요. 그리고 루터가 있던 아이슬라브는 광산 도시였어요. 그리고 루터의 아버지도 유명한 광산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어릴 때부터 성 안나에게 기도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수도승이 된 것이죠. 그런데 루터는 자기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나 루터의 고해 신부의 기록인데, 너무나도 루터가 자주 찾아와서, 그 정도 죄는 고해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계속해서 고해 신부를 찾아가서, 내가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를 충분히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겠어요. 근데 그 상태에서도 루터는 명석한 두뇌로 대학을 잘 졸업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 교수로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루터로 하여금 첫 번째 성경 강의로 시편 강의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로마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히브리서 강해를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섭리는 루터로 하여금 이신칭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정확한 경로였습니다. 보시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뭐였을까요? 당연히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심판에 의하겠죠. 이 정도 높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남은 벌을 다 처리해야 되는 그런 의. 나에게 그 높은 고상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심판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시편을 연구한 다음에 강의하려고 한 구절, 한 구절 주의하다 보니까, 시편 3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지신다고 한 번에 1차의 의문이 생겼던 거예요. 두 번째로 시편 71편 2절 말씀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이쯤 되니까 루터가 너무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절들을 같이 병렬시켜 봤을 때, 루터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신이 배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의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직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리한 죄인들을 벌하신다는 뜻으로 그 의를 이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중세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나는 증오했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실제로는 그분을 증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를 건지고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