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9 / 32쪽 · 한 쪽 20개
중국 왕 회장의 6대 신앙 계보
설교자는 언어인팅에서 중국 CBMC의 왕 회장님을 만난 일을 소개합니다. 왕 회장님은 여성 분이었고, 스스로 6대째 크리스천이라고 밝혔습니다. 설교자가 최초의 조상이 누구에게 예수를 믿었는지 묻자, 그분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복음을 받았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영국에서 중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 허드슨 테일러가 OMF를 만들었다는 배경을 덧붙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한국에도 언더우드나 셀라 같은 선교사들이 와서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우고 여성 해방 운동도 펼쳤던 역사를 떠올립니다. 그 과정에서 최초의 세례자들이 생겨났고, 그 복음이 이어져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설교자의 이해입니다. 설교자는 이 흐름을 예수님이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기억하며 중보 기도하신 일과 연결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제자들만이 아니라 지금의 여러분과 나에게도 직접 해당된다고 적용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본문 발췌 보기
요한복음 17장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장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과거형으로만 알고 있지, 믿음으로 현재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재형이고, 은혜는 과거형입니다. 이미 만들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과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 채널이 있는데, 그 채널이 바로 기도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기도의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은혜가 폭발합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가 문을 열기 시작하고 잠금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참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거짓된 신앙은 거짓된 기도를 합니다. 허황된 기도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아예 할 수 없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절대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어떤 기도냐에 따라 진짜 참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냐가 여러분의 기도 속에 다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이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세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첫 번째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나에게 믿음을 주시사, 아버지여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옷입히시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복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자신,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를 따라다녔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을까요? 시작.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의 그 기도 속에 '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도 있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분들을 가르쳐 제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특별히 이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다섯 가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이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연합과 일치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여 저들도 나와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두 번째 기도는 12절인데요. '주여 저들을 지켜 주십시오.' 보존해 주십시오. 보호와 인도와 양육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세 번째 '주여 저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기쁨과 감동과 능력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는 '악에게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제자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주여 저들이 악에게 빠지지 말고 시험에 들지 말고, 사탄과 싸워서 이기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다섯 번째는 17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주여 저들로 하여금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비전을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이런 기도는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이 다섯 가지 기도를 하십니다.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보존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저들이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이 제자들을 향한 기도가 다 여러분에게 응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분열하지 말고 하나되십시오. 아멘.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예수님의 보호와 양육과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기쁨과 감동과 능력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이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거 다 외우세요. 예. 다음에 신문에 이거 나오면 다 외우세요. 왜냐하면 이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기도였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 예수님의 기도는 아주 중요하고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방향이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뭐냐면, 이제 세 번째로 예수님이 중보 기도의 대상을 바꿔요. 첫째는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고요.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셨다면, 세 번째 대상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할 텐데, 전도하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터인데, 앞에서는 아니지만 앞으로 예수 믿게 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게 굉장히 놀랍습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 예수님은 그걸 염두해 두셨어요. '너희들이 나가서 이제 나를 증거할 터인데, 내 증거를 받고 누군가 어느 민족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중보 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20절이 그 말씀입니다. 20절 함께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비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을 위함이다.' 자, 제자들만으로서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저희 말로 인하여 나를 믿게 될 사람들이 생길 터인데, 그 사람들을 예수님이 염두에 두면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그 사람이 누굴까요? 여러분과 나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잖아요. 사도들이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200년 동안 전도하다가 그 복음이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물론 영국에서 토마스도 왔고 다 왔지만, 주로 선교사님들이 100년 전에 한국에 오셔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주었지요. 제가 이번에 언어인팅에서 중국의 CBMC 회장님을 만났는데, 왕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분이세요. 그분이 6대 크리스천이에요. 그 당신의 최초의 조상이 누구한테 예수 믿었냐고 물으니, 허드슨 테일러한테 복음을 받았대요. 그 6대째인 사람이 크리스천이에요. 어, 그분이 이번에 오셨어요. 그니까 영국에서 허드슨 테일러라는 사람이 OMF를 만들었는데, 영국 가서 중국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예수 믿은 사람이 우리나라 같은 면은 언더우드나 셀라 이런 사람들이 오셨을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고, 이런 걸 많이 여성 해방 운동도 하고 다 그러셨어요. 그때 최초의 세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다 예수 믿어서 오늘 누구까지 이루는 거예요? 나까지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을 예수님이 마음에 계산하시고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게 오늘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 기도는 여러분하고 나하고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놓고 생각을 해 보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예수 믿기의 망정이지. 예수 믿기 전에 굉장한 분들 많잖았어요. 그렇죠? 여러분이 예수 믿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박담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박담 목사님 친구분을 내가 저기 저저기서 만났어요. 그 화랑 있는 데서 만났다. 박담 목사님이 목사 됐더니까 쇼크를 먹더라고요. 아니, 박담 목사님이 목사가 됐냐고. 그 사람이 목사되면 내가 하나님 믿어야 된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제가 목사님이랑 둘이 같이 웃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나는 도대체 예수를 믿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 가정의 배경이나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배경에서 보면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기적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됐어요.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때문도 아니고, 여러분을 위해서 전도해 준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에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중보 기도 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당신한테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됐다는 결론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한국이 예수 믿은 것도 바로 그런 거예요. 제가 오래 전에 한번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만은, 제가 80년대 영국에 한 3년 가서 살았을 때, 거기에 마이클 그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예배드리러 갔다가, 거기에 머리 허연 70이 넘으신 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분을 만나 버렸어요. 그래서 그 노인 어 할머니를 내가 만났더니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뭐 그냥 죽은 사람 만났듯이 내 손 잡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하냐고 물으니, 이분이 625 전쟁 때부터 한국을 위해 기도했대요. 그래서 어떻게 당신이 한국을 위해서 전도해 기도하냐고 물으니, 625 전쟁 때 뉴스 난 걸 보고 자기가 기도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럼 한국 가 보셨느냐고 물으니, 가 본 적 없대요. 한국 한 번도 안 가 보신 분이 지금까지 평생 코리아를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아유, 그냥 몸이 엇싸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아, 한국이 예수 잘 믿고, 한국이 그 지옥 같은 그 일제 시대와 유기요화와 버리고개와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이만큼 살만하게 된 게 바로 이 할머니의 기도 때문이구나. 그래서 이 사람은 한국에 와 본 적도 없고, 한국의 친구도 없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그 자체 하나 때문에 저를 굉장히 환영해 줬던 그런 기억이 있어요.
박담 목사님 친구의 놀람
설교자는 교회의 박담 목사님 친구분을 우연히 만났던 일을 전합니다. 설교자는 그 만남이 화랑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기억합니다. 박담 목사님이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친구분은 크게 놀라며 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분은 박담 목사님이 목사가 되었다면 자기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목사님과 함께 웃었다고 회상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여러분이 예수 믿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분들이 많지 않느냐고 물으며 공감을 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가정 배경이나 살아온 삶으로 보면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았지만 기적적으로 믿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그 이유가 여러분이나 전도한 사람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는 결국 기도에서 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요한복음 17장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장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과거형으로만 알고 있지, 믿음으로 현재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재형이고, 은혜는 과거형입니다. 이미 만들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과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 채널이 있는데, 그 채널이 바로 기도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기도의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은혜가 폭발합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가 문을 열기 시작하고 잠금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참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거짓된 신앙은 거짓된 기도를 합니다. 허황된 기도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아예 할 수 없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절대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어떤 기도냐에 따라 진짜 참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냐가 여러분의 기도 속에 다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이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세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첫 번째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나에게 믿음을 주시사, 아버지여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옷입히시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복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자신,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를 따라다녔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을까요? 시작.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의 그 기도 속에 '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도 있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분들을 가르쳐 제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특별히 이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다섯 가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이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연합과 일치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여 저들도 나와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두 번째 기도는 12절인데요. '주여 저들을 지켜 주십시오.' 보존해 주십시오. 보호와 인도와 양육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세 번째 '주여 저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기쁨과 감동과 능력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는 '악에게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제자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주여 저들이 악에게 빠지지 말고 시험에 들지 말고, 사탄과 싸워서 이기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다섯 번째는 17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주여 저들로 하여금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비전을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이런 기도는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이 다섯 가지 기도를 하십니다.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보존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저들이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이 제자들을 향한 기도가 다 여러분에게 응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분열하지 말고 하나되십시오. 아멘.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예수님의 보호와 양육과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기쁨과 감동과 능력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이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거 다 외우세요. 예. 다음에 신문에 이거 나오면 다 외우세요. 왜냐하면 이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기도였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 예수님의 기도는 아주 중요하고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방향이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뭐냐면, 이제 세 번째로 예수님이 중보 기도의 대상을 바꿔요. 첫째는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고요.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셨다면, 세 번째 대상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할 텐데, 전도하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터인데, 앞에서는 아니지만 앞으로 예수 믿게 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게 굉장히 놀랍습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 예수님은 그걸 염두해 두셨어요. '너희들이 나가서 이제 나를 증거할 터인데, 내 증거를 받고 누군가 어느 민족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중보 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20절이 그 말씀입니다. 20절 함께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비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을 위함이다.' 자, 제자들만으로서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저희 말로 인하여 나를 믿게 될 사람들이 생길 터인데, 그 사람들을 예수님이 염두에 두면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그 사람이 누굴까요? 여러분과 나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잖아요. 사도들이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200년 동안 전도하다가 그 복음이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물론 영국에서 토마스도 왔고 다 왔지만, 주로 선교사님들이 100년 전에 한국에 오셔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주었지요. 제가 이번에 언어인팅에서 중국의 CBMC 회장님을 만났는데, 왕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분이세요. 그분이 6대 크리스천이에요. 그 당신의 최초의 조상이 누구한테 예수 믿었냐고 물으니, 허드슨 테일러한테 복음을 받았대요. 그 6대째인 사람이 크리스천이에요. 어, 그분이 이번에 오셨어요. 그니까 영국에서 허드슨 테일러라는 사람이 OMF를 만들었는데, 영국 가서 중국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예수 믿은 사람이 우리나라 같은 면은 언더우드나 셀라 이런 사람들이 오셨을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고, 이런 걸 많이 여성 해방 운동도 하고 다 그러셨어요. 그때 최초의 세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다 예수 믿어서 오늘 누구까지 이루는 거예요? 나까지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을 예수님이 마음에 계산하시고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게 오늘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 기도는 여러분하고 나하고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놓고 생각을 해 보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예수 믿기의 망정이지. 예수 믿기 전에 굉장한 분들 많잖았어요. 그렇죠? 여러분이 예수 믿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박담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박담 목사님 친구분을 내가 저기 저저기서 만났어요. 그 화랑 있는 데서 만났다. 박담 목사님이 목사 됐더니까 쇼크를 먹더라고요. 아니, 박담 목사님이 목사가 됐냐고. 그 사람이 목사되면 내가 하나님 믿어야 된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제가 목사님이랑 둘이 같이 웃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나는 도대체 예수를 믿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 가정의 배경이나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배경에서 보면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기적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됐어요.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때문도 아니고, 여러분을 위해서 전도해 준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에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중보 기도 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당신한테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됐다는 결론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한국이 예수 믿은 것도 바로 그런 거예요. 제가 오래 전에 한번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만은, 제가 80년대 영국에 한 3년 가서 살았을 때, 거기에 마이클 그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예배드리러 갔다가, 거기에 머리 허연 70이 넘으신 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분을 만나 버렸어요. 그래서 그 노인 어 할머니를 내가 만났더니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뭐 그냥 죽은 사람 만났듯이 내 손 잡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하냐고 물으니, 이분이 625 전쟁 때부터 한국을 위해 기도했대요. 그래서 어떻게 당신이 한국을 위해서 전도해 기도하냐고 물으니, 625 전쟁 때 뉴스 난 걸 보고 자기가 기도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럼 한국 가 보셨느냐고 물으니, 가 본 적 없대요. 한국 한 번도 안 가 보신 분이 지금까지 평생 코리아를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아유, 그냥 몸이 엇싸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아, 한국이 예수 잘 믿고, 한국이 그 지옥 같은 그 일제 시대와 유기요화와 버리고개와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이만큼 살만하게 된 게 바로 이 할머니의 기도 때문이구나. 그래서 이 사람은 한국에 와 본 적도 없고, 한국의 친구도 없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그 자체 하나 때문에 저를 굉장히 환영해 줬던 그런 기억이 있어요.
한 번도 한국에 가 보지 않은 영국 할머니
설교자는 80년대 영국에서 3년간 살던 때 마이클 그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던 일을 전합니다. 그곳에서 머리가 허연 70대 이상의 할머니를 만났는데, 설교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할머니는 죽은 사람을 만난 듯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설교자가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625 전쟁 때부터 한국을 위해 기도해 왔다고 답했습니다. 전쟁 뉴스를 보고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한국에 친구도 없고 직접 와 본 적도 없는 분이 평생 한국을 위해 기도해 온 사실에 깊이 감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예수를 잘 믿고, 일제 시대와 가난을 지나 이만큼 살만하게 된 것이 이 할머니 같은 분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설교자를 따뜻하게 환영했다고 회상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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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장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과거형으로만 알고 있지, 믿음으로 현재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재형이고, 은혜는 과거형입니다. 이미 만들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과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 채널이 있는데, 그 채널이 바로 기도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기도의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은혜가 폭발합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가 문을 열기 시작하고 잠금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참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거짓된 신앙은 거짓된 기도를 합니다. 허황된 기도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아예 할 수 없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절대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어떤 기도냐에 따라 진짜 참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냐가 여러분의 기도 속에 다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이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세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첫 번째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나에게 믿음을 주시사, 아버지여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옷입히시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복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자신,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를 따라다녔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을까요? 시작.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의 그 기도 속에 '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도 있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분들을 가르쳐 제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특별히 이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다섯 가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이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연합과 일치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여 저들도 나와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두 번째 기도는 12절인데요. '주여 저들을 지켜 주십시오.' 보존해 주십시오. 보호와 인도와 양육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세 번째 '주여 저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기쁨과 감동과 능력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는 '악에게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제자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주여 저들이 악에게 빠지지 말고 시험에 들지 말고, 사탄과 싸워서 이기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다섯 번째는 17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주여 저들로 하여금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비전을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이런 기도는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이 다섯 가지 기도를 하십니다.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보존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저들이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이 제자들을 향한 기도가 다 여러분에게 응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분열하지 말고 하나되십시오. 아멘.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예수님의 보호와 양육과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기쁨과 감동과 능력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이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진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거 다 외우세요. 예. 다음에 신문에 이거 나오면 다 외우세요. 왜냐하면 이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기도였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 예수님의 기도는 아주 중요하고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방향이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뭐냐면, 이제 세 번째로 예수님이 중보 기도의 대상을 바꿔요. 첫째는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고요.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셨다면, 세 번째 대상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할 텐데, 전도하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터인데, 앞에서는 아니지만 앞으로 예수 믿게 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게 굉장히 놀랍습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 예수님은 그걸 염두해 두셨어요. '너희들이 나가서 이제 나를 증거할 터인데, 내 증거를 받고 누군가 어느 민족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중보 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20절이 그 말씀입니다. 20절 함께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비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을 위함이다.' 자, 제자들만으로서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저희 말로 인하여 나를 믿게 될 사람들이 생길 터인데, 그 사람들을 예수님이 염두에 두면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그 사람이 누굴까요? 여러분과 나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잖아요. 사도들이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200년 동안 전도하다가 그 복음이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물론 영국에서 토마스도 왔고 다 왔지만, 주로 선교사님들이 100년 전에 한국에 오셔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주었지요. 제가 이번에 언어인팅에서 중국의 CBMC 회장님을 만났는데, 왕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분이세요. 그분이 6대 크리스천이에요. 그 당신의 최초의 조상이 누구한테 예수 믿었냐고 물으니, 허드슨 테일러한테 복음을 받았대요. 그 6대째인 사람이 크리스천이에요. 어, 그분이 이번에 오셨어요. 그니까 영국에서 허드슨 테일러라는 사람이 OMF를 만들었는데, 영국 가서 중국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예수 믿은 사람이 우리나라 같은 면은 언더우드나 셀라 이런 사람들이 오셨을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고, 이런 걸 많이 여성 해방 운동도 하고 다 그러셨어요. 그때 최초의 세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다 예수 믿어서 오늘 누구까지 이루는 거예요? 나까지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을 예수님이 마음에 계산하시고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게 오늘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 기도는 여러분하고 나하고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놓고 생각을 해 보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예수 믿기의 망정이지. 예수 믿기 전에 굉장한 분들 많잖았어요. 그렇죠? 여러분이 예수 믿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박담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박담 목사님 친구분을 내가 저기 저저기서 만났어요. 그 화랑 있는 데서 만났다. 박담 목사님이 목사 됐더니까 쇼크를 먹더라고요. 아니, 박담 목사님이 목사가 됐냐고. 그 사람이 목사되면 내가 하나님 믿어야 된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제가 목사님이랑 둘이 같이 웃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나는 도대체 예수를 믿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 가정의 배경이나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배경에서 보면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기적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됐어요.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때문도 아니고, 여러분을 위해서 전도해 준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에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중보 기도 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당신한테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됐다는 결론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한국이 예수 믿은 것도 바로 그런 거예요. 제가 오래 전에 한번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만은, 제가 80년대 영국에 한 3년 가서 살았을 때, 거기에 마이클 그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예배드리러 갔다가, 거기에 머리 허연 70이 넘으신 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분을 만나 버렸어요. 그래서 그 노인 어 할머니를 내가 만났더니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뭐 그냥 죽은 사람 만났듯이 내 손 잡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하냐고 물으니, 이분이 625 전쟁 때부터 한국을 위해 기도했대요. 그래서 어떻게 당신이 한국을 위해서 전도해 기도하냐고 물으니, 625 전쟁 때 뉴스 난 걸 보고 자기가 기도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럼 한국 가 보셨느냐고 물으니, 가 본 적 없대요. 한국 한 번도 안 가 보신 분이 지금까지 평생 코리아를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아유, 그냥 몸이 엇싸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아, 한국이 예수 잘 믿고, 한국이 그 지옥 같은 그 일제 시대와 유기요화와 버리고개와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이만큼 살만하게 된 게 바로 이 할머니의 기도 때문이구나. 그래서 이 사람은 한국에 와 본 적도 없고, 한국의 친구도 없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그 자체 하나 때문에 저를 굉장히 환영해 줬던 그런 기억이 있어요.
무디를 위한 두 사람의 회심
설교자는 무디가 두 사람을 위해 평생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얘기가 있다'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무디가 죽기 한 달 전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무디가 죽고 난 한 달 뒤에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 일화를 들어, 기도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기도는 응답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청중에게 전도하면 사람은 반드시 믿는다는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설교자는 안 믿는 사람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전도하라고 강하게 격려합니다. 그는 이 말을 비유적으로 강조하며, 그만큼 복음의 결실을 확신하라는 뜻을 전합니다. 설교자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사실을 믿고 계속 기도하라는 메시지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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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그 사람은 꼭 믿습니다. 전도하면 믿어요. 아멘. 안 믿으면 다리 하나 불어 뜨려 가지고도 믿게 하세요. 꼭 믿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무디가 두 사람을 위해서 평생 기도했는데, 한 사람은 무디가 죽기 한 달 전에 예수를 믿었고, 한 사람은 무디가 죽고 난 한 달 후에 믿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런 얘기가 있어요. 당신이 죽어도 그 기도는 응답돼요.
남편의 사랑 고백에 빗댄 믿음의 표현
설교자는 부인들에게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좋은지, 말로 들려주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입으로 말해 주는 것이 훨씬 좋다고 답합니다. 설교자는 여기에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하면 더 구체적이 된다고 덧붙입니다.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고 선물로 표현할 때 그 사랑이 분명해진다는 설명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믿음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믿음이 관념에 머무는 까닭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 실체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도 기분이 나쁘면 배신할 수 있는 것은 표현된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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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특징은 상속권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특징은 보호받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자녀는 보호받고, 양육받고, 인도함을 받습니다. 예, 이것이 개런티돼 있어요. 부모가 내 등록금을 대준 것을 가지고 여러분이 죄송해요.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밥 안 기 얻어 먹는 걸 가지고 ‘부모님, 오늘 나에게 밥 한 그릇을 동양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밥을 그냥 맡겨 놓은 것처럼 떳떳하게, 이것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런 관계예요. 관계는 특권이기도 하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고아가 아니에요. 미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약속 있는 자녀들입니다. 아멘. 족보 있는 자녀예요. 아멘. 주소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자녀예요. 자녀답게 사십시오. 아멘. 자녀의 특권을 누리십시오. 아멘. 자녀의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아멘.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인도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나인 것처럼, 너와 나는 하나가 됐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내 가족이다. 하나님 우리 한 가족이요.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 내용이 21절입니다. 21절 다시 보세요.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이거예요. 이 중보 기도 내용이 아주 참, 어떻게 보면은 굉장히 막연한 것 같지만, 굉장히 본질적인 것을 딱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 ‘주여, 저들이 나와, 저들이 하나된 것을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해 주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가족이 됐다는 말이에요. 이런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해 준 성경 본문이 하나 있는데,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부터 22절까지 내용이 바로 그겁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에베소서 2장 19절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아니,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거기 보세요. 집에서 너희는 외국인도 아니에요. 우리 애들 죄도 아니에요. 외국인도 아니에요. 우리는 아웃사이더가 아니에요. 너희는 손님도 아니야. 손도 아니야. 이렇게 돼. 손님도 아니요. 우린 주인이에요. 손님 아니요. 너희들은 성도들과 동일한 뭐예요?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주민 등록 중이 아니라, 나는 여러분의 지갑의 시민권 중에 하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민권이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뭐예요? 권속이란 말은 가족이란 말이에요. 20절 보십시오. 시작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되리 되셨다.’ 여러분 우리 족보가 뭐냐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이에요. 그런 전통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무법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도들과 선지자들 터 위에서 세워졌고, 건물로 따지면 예수님은 우리 건물에 뭐가 됐어요? 모퉁이 돌이에요. 21절 읽어 주세요.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었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이에요. 우리는 몸이 아니라, 육체가 아니라,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아,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해 보세요. 가슴 이렇게, 이건 다 몸뚱아리가 아니라고요. 그냥 마귀가 여러분 몸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 몸을 사용하여 그것을 집으로 쓰신 것입니다. 아멘. 이건 완성된 집이 아니에요. 이제 집이 완성되어 가고 있어요.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나는 공사 중이다.’ 현재는 공사하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건물을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을 완전히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22절 읽어 주세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비밍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여섯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사도와 선지자들 터 위에 세워졌고, 우리의 집에 건축의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 자신이 성전이고, 예수와 함께 지어져 간다. 지금이 시간에요. 여러분보다 내가 더 훨씬 은혜받았을 거예요. 왜냐면 나는 말하고 있고, 여러분은 듣고 있기 때문에, 이걸 자기 입으로 말하면 은혜가 됩니다. 자기 입으로 말하고 선언하면, 내 말을 내 귀에 들어. 기도는 뭐냐면, 내 말을 내 귀에 듣는 것입니다. 그게 선언의 의미가 있어요. 혼자 생각하고 우물우물하는 것하고, 입에서 말을 해서 그 말이 공기를 통해 내 귀에 전달되는 것은 달라요.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이, 그냥 속으로 믿으면 됐지 뭘. 에이, 그 달라요. 입을 열어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고 선포하세요. 아멘. 그럼 능력이 됩니다. 그게 아멘. 여러분 부인들에게 내가 물어보세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그냥 속으로 생각하는 게 좋아요? 입으로 말해 주는 게 좋아요? 예.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면 돼요. 다 뭐 다 사랑하는 거지. 우리는 아니에요. 입으로 말해야 돼요. 그냥 말만 하는 게 좋아요. 장미꽃 한송이 갖다 주는 게 좋아요. 이게 다르죠. 부인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선물에도 하나 쏴들고 가면, 이게 좀 더 구체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관념적인 까닭은 구체화 안 시키기 때문에, 언어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실체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기분 나쁘면 얼마든지 배신할 수가 있잖아요. 표현을 안 했기 때문에 증거가 없거든요.
언어인팅 장로님들의 화장실 청소
언어인팅 특별 집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화장실 청소와 주차 안내 봉사였습니다. 설교자는 장로님이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장로님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물에 손을 넣어 깨끗하게 청소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세미나 참석자들은 '강의보다 더 위대한 설교였다'고 말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놀라워했고, 돌아가서 자기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섬김이 '저희로 하여금 보게 하옵소서, 알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와 이어진다고 적용합니다. 또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그리스도인들과 장애인을 돕는 교인들의 헌신을 예로 들며, 그것이 진짜 예배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섬김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용조 · 2026-10-24
설교 내 18–18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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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25절 26절 보십시오. 시작. '오신 하나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도 아버지를 부르신 것 같으의 이름을 저희로 알게 하여 또 알게 하리니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 아 지난번에요, 우리 언어인팅 때 우리 장로님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임무가 화장실 청소였습니다. 그리고 주차 안내 봉사였어요. 물론 장로님이 화장실 청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특별한 집회 때 우리 장로님들이 앞치마를 두르시고 고무 장갑을 끼고 화장실 물에 손을 넣어서 짓고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일을 했어요. 이번 세미나에 오셨던 분들이 그걸 보고 뭐라 그런 줄 아세요? '강의보다 더 위대한 설교였다' 그러더라고. 그걸 보고 놀란 거예요. 그리고 다 말없이 '와, 교회는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가?'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 그리고 그분들이 자기 교회에 가서 또 그 비슷한 일을 하시더라고. 이게 뭐냐면 '저희로 하여금 보게 하옵소서. 저희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나라가 어려움이 생기고요. 지진이 나고 재앙이 남기면 제일 먼저 뛰어가는 사람들이 사실 그리스도인들이에요. 전 세계 전쟁 지역에 뛰어들어가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면 '와, 종교는 달라도 저 사람들은 참 좋은 일을 한다'는 말이에요. 당신의 희생, 당신의 포기, 당신의 헌신. 근데요. 화장실 청소하는 거 쉬워요? 안 쉬워요? 안 쉽지요. 매연 가스가 많은 주차장에서 빨간 등 들고 왔다 이거 하는 거 쉬워요, 안 쉬워요? 안 쉽죠? 그데 그거를 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감동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쓰레기 짓는 모습을 보고요. 요즘 저희 교회 JDS가 많이 생겼는데, 내가 늘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감동하는 건요. 그거 섬기려고 그냥 뭐 보 딱 보 씌우고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뒤에서 그걸 하더라고요. 빛도 안 나는 일인데, 아무튼 그거 열심히 해요. 근데 가서 이렇게 보고 있으면 '와, 와, 참 좋다, 참 아름답다, 참 감동적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교회 안에 그런게 많아요. 장애인들 돕는 사람들 보면요. 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그 수고하고, 남멀리 가서 도와주고, 휠어 밀어 주고, 그들 앞길을 만들어 주는 걸 이렇게 보면요. 저게 진짜 예배지. 저게 예배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거예요. '세상이 당신들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아테네에서 바울이 본 다신교의 현실
설교자는 에베소서 4장 6절의 '한 하나님과 모든 자의 아버지'라는 진술을 설명하면서, 먼저 이교 세계가 한 분뿐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8장을 인용해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에게는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도의 말을 상기시킵니다. 이어서 여러 신이 있는 곳에서는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피터를, 어떤 사람은 머큐리우스를,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신을 숭배했고, 도시와 마을은 수많은 신들의 사원으로 가득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었고, 사람들이 저마다 따르는 신이 다르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와 대비하여 사도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에 신자들 사이에도 필연적으로 단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삼위일체 교리를 세 분의 신이 아니라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그 한 분 되심이 곧 단일성의 원리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구원의 끝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같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라는 점도 함께 강조합니다. 그는 신자들이 이 아름다운 교리를 바라보며 영의 단일성을 평화의 결속 속에서 지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4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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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가 이 단일성의 원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도와주는가? 먼저 사도를 따라가 보자. 그가 처음 말하는 것은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심이다. 이 말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만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전도했던 이교 세계는 이 점을 믿지 않았다. 사도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이 진리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억하겠는가? 4절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알기로,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이 없음을 알기로 하였노라." 여기서 사도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한다.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신들이 많고 주들이 많으나, 우리에게는 한 분뿐이신 하나님, 즉 모든 것을 주신 아버지와 한 분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이 계신 것뿐이니, 우리가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을 얻는다." 이처럼 사도는 이미 한 분뿐이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신이 있다면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주피터를, 또 다른 누군가는 머큐리우스를,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신을, 또 누군가는 그 위대한 알 수 없는 신을 숭배할 것이다. 그들의 도시와 마을은 수많은 신들을 위한 사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그랬고,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따르는 신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도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만이 계신다고 말한다. 한 분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단일성이 있어야 한다. 그는 단지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세 분의 신이 아니라, 한 분의 하나님, 삼위로 된 한 분의 하나님, 복된 삼위일체이시다. 유대인들이 보존하고 보호해야 했던 가장 큰 보물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이라는 진리와 교리였다. 하나님은 한 분이심이다. 그래서 초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시자, 이는 두 분의 신을 믿는다는 의미라고 어려움을 느꼈다.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이해할 수 없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바로 그 진리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의 신격이시지만, 그 신격 안에 세 분의 인격이 계신다. 세 분의 신이 아니라, 삼신론이 아니라, 일신론이다. 한 분의 영원한 신격 안에 세 분의 인격이 계신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도의 마음속에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성령을 인정하고, 아들을 인정하고, 아버지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 분이 한 분이심을 말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어보면 분명히 이 진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읽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읽는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셨다고 읽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같은 일을 하셨다고 읽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아버지께서 같은 일을 하셨다고 읽는다. 이는 바로 세 분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 영원한 신격 안에는 세 분의 인격이 계신다. 삼위로 된 하나님, 복된 삼위일체이시다. 이는 단일성 안의 삼위일체, 즉 삼일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시금 우리는 단일성의 원리를 강조하고 강화하게 된다. 세 분의 인격이 한 분이시듯이, 우리가 그분들을 숭배하고 그분들께 속한 자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우리는 한 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삼위일체 교리를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고, 놀라워하며, 영의 단일성을 평화의 결속으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이 진리에서 더 실용적인 결론들을 도출해 보자.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시다"라고 사도가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끝이 바로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한 바를 기억하라.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 진리를 계속 반복하고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구원의 끝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일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엔진으로 움직이는 차량의 비유
설교자는 믿는 자들 안에 같은 생명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기계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 능력의 놀라운 크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먼저 짚습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 능력은 죄와 범법으로 죽어 있던 사람을 살리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에너지이며, 구원받은 뒤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속시키시고 계속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는 이어서 우리 모두 안에 같은 에너지, 같은 생명, 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며, 그 상태를 같은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것에 빗댑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엔진으로 움직이듯, 신자들도 같은 하나님의 에너지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립보서 2장 13절을 인용해 너희 안에서 원하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그분의 기쁨이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그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 됨을 이룬다고 권면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4
설교 내 8–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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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지혜의 눈이 열려,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분의 유산의 영광의 풍요가 무엇인지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능력의 놀라운 크기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신 그분의 강력한 능력에 따라 일합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능력의 크기, 그 놀라운 크기입니다. 믿는 자들 속에 있는 그분의 힘과 능력의 에너지입니다. 바로 이 힘이 어둠에서 생명으로 당신을 이끌었습니다. 당신이 죄와 범법으로 죽어 있을 때, 그분께서 당신을 살리셨고, 죽은 자들 중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에너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분이 살리시고, 일으키십니다. 2장에서 우리가 이 일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고 그만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속시키시고, 계속 움직이게 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능력의 놀라운 크기를 아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 모두 안에 같은 에너지, 같은 생명,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 있습니다. 마치 같은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같은 에너지에 의해 이끌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찬송가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빛으로 당신의 속량받은 백성 위에 쏟으시며, 어둠과 공포를 멀리 쫓아내시고, 우리가 걷는 모든 길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 여정의 목적지는 하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 우리의 소망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에너지가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떨며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너희가 원하고 행하게 하시는 것은 그분의 기쁨이기 때문이니라." 성화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관통하시고, 그분은 모든 것을 위에 계시며, 그분은 모든 자 안에 계십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죠.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나 객이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정의 동포이며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속한 자들이 되었노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머릿돌이시니, 그분 안에서 온 집이 잘 맞물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되어가고 있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미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이 일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로 오셔서 그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로 오셔서 그와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놀라움과 경이로움과 영광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묵상하고 깨닫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대제사장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 되기를 원하노니,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려 함이니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들이 우리가 하나 된 것처럼 하나 되기를 원하노라.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나 안에 계시니, 그들이 완전히 하나 되게 하소서.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셨음을 알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모든 자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것을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관통하시며, 모든 자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밖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속량하셨고, 우리를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셨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친구여, 당신은 이 큰 진리를 묵상해 보셨습니까? 당신은 속량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당신은 이것이 우리가 하나 되는 이유임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광경을 잡고, 오늘 아침에라도 이를 조금이라도 보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모든 교리의 끝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지식이 이로 인해 이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모세와 기드온의 겸손한 응답
설교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을 낮춘 두 인물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모세가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기드온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용감한 장군이라 부르셨을 때, 기드온은 자신이 가난한 집안의 막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이사야 66장 2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이 겸손하고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설교자는 시험을 피하거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적용합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9–9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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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랑심과 교만, 자기 확신,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나 배경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견디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내가 바로에게 가라'고 하자,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에요. 제 형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만 하고 능력은 없어요.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바로, 저는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용감한 장군이여, 너를 보냈다'고 하자, 기드온은 '말씀하신 분이 저를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을 보세요. '주께서 보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시되, 영혼이 겸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원리가 드러납니다. 시험을 피하면 축복을 놓치고, 우리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정의상 부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대해야 할지를 보면, 바울이 2코린도서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내가 머리가 커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바울은 사도이니 머리가 커질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교만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훌륭한 배경, 훌륭한 대학, 훌륭한 신학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 배경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이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인칭으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끌려 올라갔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육체에 박힌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보세요.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북미의 현대적 복음주의의 방향을 따르며, 영웅들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강조하며,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면, 바울은 2코린도서 8장과 9장에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죠. 그러나 그는 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앱이 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바울의 앱입니다. '곤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 나는 너희를 보며 혼란스럽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박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독교인을 사냥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격투나 권투 경기처럼 말입니다. 맨발로 서 있는 권투 선수, 그의 직업은 싸움입니다. 그는 모든 주먹에 의해 쓰러지고 상처 입으며,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 나는 떠나야겠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제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던 한 분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커다란 체구를 가진 콜린스 씨입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맨발의 권투 선수 비유
설교자는 바울이 겪은 네 가지 고난, 곤경과 혼란, 박해와 쓰러짐을 설명하기 위해 권투 경기의 장면을 듭니다. 맨발로 링에 선 권투 선수는 싸움이 직업이지만, 모든 주먹에 쓰러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는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싸우는 사람이 여전히 링 안에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청중에게 이런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설교자는 쓰러짐이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싸움 가운데 겪는 현실이라고 설명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9–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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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랑심과 교만, 자기 확신,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나 배경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견디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내가 바로에게 가라'고 하자,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에요. 제 형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만 하고 능력은 없어요.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바로, 저는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용감한 장군이여, 너를 보냈다'고 하자, 기드온은 '말씀하신 분이 저를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을 보세요. '주께서 보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시되, 영혼이 겸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원리가 드러납니다. 시험을 피하면 축복을 놓치고, 우리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정의상 부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대해야 할지를 보면, 바울이 2코린도서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내가 머리가 커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바울은 사도이니 머리가 커질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교만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훌륭한 배경, 훌륭한 대학, 훌륭한 신학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 배경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이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인칭으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끌려 올라갔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육체에 박힌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보세요.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북미의 현대적 복음주의의 방향을 따르며, 영웅들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강조하며,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면, 바울은 2코린도서 8장과 9장에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죠. 그러나 그는 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앱이 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바울의 앱입니다. '곤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 나는 너희를 보며 혼란스럽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박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독교인을 사냥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격투나 권투 경기처럼 말입니다. 맨발로 서 있는 권투 선수, 그의 직업은 싸움입니다. 그는 모든 주먹에 의해 쓰러지고 상처 입으며,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 나는 떠나야겠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제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던 한 분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커다란 체구를 가진 콜린스 씨입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콜린스 씨의 지팡이 일화
설교자는 20대 초반에 스코틀랜드에서 큰 두려움을 주었던 콜린스 씨를 떠올립니다. 큰 체구의 콜린스 씨는 설교자의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설교자는 그분의 집을 자주 방문해야 했는데, 어느 오후 콜린스 씨는 설교의 일부 요소를 두고 설교자를 꾸짖었습니다. 그분은 의자 옆 지팡이를 들고 말했습니다. '스니, 성경 말씀만 꾸준히 붙잡고 가세요. 만약 교회에서 이상한 말을 하시면, 저는 이 지팡이를 들고 성도석에서 일어나 이단이라고 소리치겠습니다.' 설교자는 감사하다고 답했고, 차에 타면서 이분은 자신을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교자에게 콜린스 씨는 도움을 주는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일화를 통해 칭찬보다 바른 지적과 책망이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적용합니다. 칭찬만 받는 사람은 자신도 남도 돕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9–1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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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약함과 겸손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랑심과 교만, 자기 확신,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나 배경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견디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내가 바로에게 가라'고 하자, 모세는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선택이에요. 제 형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말만 하고 능력은 없어요.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바로, 저는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굽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용감한 장군이여, 너를 보냈다'고 하자, 기드온은 '말씀하신 분이 저를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을 보세요. '주께서 보시는 이는 누구인가 하시되, 영혼이 겸손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원리가 드러납니다. 시험을 피하면 축복을 놓치고, 우리의 약함을 감추려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랑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정의상 부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대해야 할지를 보면, 바울이 2코린도서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반복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내가 머리가 커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바울은 사도이니 머리가 커질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교만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훌륭한 배경, 훌륭한 대학, 훌륭한 신학과 율법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 배경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이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3인칭으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끌려 올라갔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육체에 박힌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보세요.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북미의 현대적 복음주의의 방향을 따르며, 영웅들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강조하며,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면, 바울은 2코린도서 8장과 9장에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죠. 그러나 그는 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앱이 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바울의 앱입니다. '곤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 나는 너희를 보며 혼란스럽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박해'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독교인을 사냥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곤경, 혼란, 박해, 쓰러짐. 격투나 권투 경기처럼 말입니다. 맨발로 서 있는 권투 선수, 그의 직업은 싸움입니다. 그는 모든 주먹에 의해 쓰러지고 상처 입으며, 분노와 고통 속에서 '나는 떠나야겠다. 나는 떠나야겠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링 위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제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던 한 분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에서 전설이 된, 커다란 체구를 가진 콜린스 씨입니다. 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저는 그분 댁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찾아뵙곤 했습니다. 한 차례 오후에 그분이 제 설교의 일부 요소에 대해 저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분은 의자 옆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니, 내가 말할게요. 성경 말씀만 꾸준히 붙잡고 가세요. 만약 교회에서 이상한 말을 하시면, 저는 이 지팡이를 들고 성도석에서 일어나 이단이라고 소리치겠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콜린스 씨. 감사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차에 타며 "이분은 제 편이에요. 이분은 저를 도와주려고 하는 분이에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제게 도움을 주는 많은 분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난, 혼란, 박해, 그리고 쓰러짐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뛰어난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지만 꺾이지 않았고, 혼란을 겪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1장에서 보았듯이, 근접한 위험 속에서도 결국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지만 버려지지 않았고, 쓰러졌지만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증거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생과 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몸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맡겨지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간단히 말해, 바울은 죽음 속에서 생명이 발견되고 드러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생명을 구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며, 나와 복음 때문에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임스 데니는 기독교인에게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때,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증거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겠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인내를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서신서에서는 다시 다루겠습니다. 바울 자신의 증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한 가지 적용점을 제시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의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부정하거나 감추려 하면, 우리는 다양한 위험에 노출됩니다. 다양한 유혹에 노출됩니다. 사실 우리는 칭찬보다 비판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일부 분들은 "저는 좀 칭찬받고 싶어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제 집사님들께요. 국경을 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칭찬받고 싶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망과 눈물 속에서 더 많은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사람들이 우리가 받을 만하지 않은 칭찬을 해주면, 그들은 자신을 도와주지도 않고 우리를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결코 도와주지 않죠. 제 초기 시절의 상사는 데릭 프라임이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아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알게 되면, 그들은 당신을 절대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일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이죠, 아닙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로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유혹받고 있는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쉽게 여러 가지에 빠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의 일부 남성들은 우리가 목회 사역에 부름받았기 때문에, 마치 세상을 보지 못하는 듯이 다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여자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꼈는지, 공항에서 지나칠 때 그 잡지를 보지 못했는지, 그런 것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런 것들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런 유혹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네, 우리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정하거나 감추려 하며,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만들려는 환상을 만든다면, 우리는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들을 해칩니다. 오직 영원한 것의 빛 속에서만 우리가 일시적인 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도 데릭이 한 말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지 못할 때 별들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사람에 집착할 때 사람들을 더 신경 씁니다."
데릭 프라임의 충고
설교자는 초기 사역 시절의 상사였던 데릭 프라임이 항상 상기시켜 주었던 진리를 전합니다. 데릭 프라임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아는 만큼 당신을 알게 되면 그들은 당신을 절대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로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유혹받고 약한지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 안의 일부 남성들이 목회자는 세상의 유혹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목회자도 유혹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감추고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는 환상을 만들면,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도 해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데릭의 또 다른 말도 전합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지 못할 때 별들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사람에게 집착할 때 사람들을 더 신경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일시적인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영원한 것의 빛 속에 서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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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분 댁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찾아뵙곤 했습니다. 한 차례 오후에 그분이 제 설교의 일부 요소에 대해 저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분은 의자 옆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니, 내가 말할게요. 성경 말씀만 꾸준히 붙잡고 가세요. 만약 교회에서 이상한 말을 하시면, 저는 이 지팡이를 들고 성도석에서 일어나 이단이라고 소리치겠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콜린스 씨. 감사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차에 타며 "이분은 제 편이에요. 이분은 저를 도와주려고 하는 분이에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제게 도움을 주는 많은 분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난, 혼란, 박해, 그리고 쓰러짐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뛰어난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지만 꺾이지 않았고, 혼란을 겪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1장에서 보았듯이, 근접한 위험 속에서도 결국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지만 버려지지 않았고, 쓰러졌지만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증거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생과 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몸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맡겨지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간단히 말해, 바울은 죽음 속에서 생명이 발견되고 드러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생명을 구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며, 나와 복음 때문에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임스 데니는 기독교인에게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때,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증거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겠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인내를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서신서에서는 다시 다루겠습니다. 바울 자신의 증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한 가지 적용점을 제시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의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부정하거나 감추려 하면, 우리는 다양한 위험에 노출됩니다. 다양한 유혹에 노출됩니다. 사실 우리는 칭찬보다 비판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일부 분들은 "저는 좀 칭찬받고 싶어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제 집사님들께요. 국경을 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칭찬받고 싶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망과 눈물 속에서 더 많은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사람들이 우리가 받을 만하지 않은 칭찬을 해주면, 그들은 자신을 도와주지도 않고 우리를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결코 도와주지 않죠. 제 초기 시절의 상사는 데릭 프라임이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아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알게 되면, 그들은 당신을 절대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일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이죠, 아닙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로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유혹받고 있는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쉽게 여러 가지에 빠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의 일부 남성들은 우리가 목회 사역에 부름받았기 때문에, 마치 세상을 보지 못하는 듯이 다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여자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꼈는지, 공항에서 지나칠 때 그 잡지를 보지 못했는지, 그런 것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런 것들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런 유혹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네, 우리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정하거나 감추려 하며,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만들려는 환상을 만든다면, 우리는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들을 해칩니다. 오직 영원한 것의 빛 속에서만 우리가 일시적인 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도 데릭이 한 말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지 못할 때 별들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사람에 집착할 때 사람들을 더 신경 씁니다."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인용
설교자는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에서 인용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소개합니다. 인용문은 세상이 나아지는 데에는 역사에 남지 않은 작은 행동들이 부분적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은 것은 은밀히 믿음으로 살아가며 묵직한 무덤에 묻힌 수많은 이들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역사에 한 줌의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할지라도 이 연약함과 일시적인 존재의식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는 바로 이 연약함과 일시성 속에서 진정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바울의 삶을 보며 '나는 경주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입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4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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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시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충분함 안에서 쉬게 됩니다. 말을 마치며, 우리가 이 말을 피하지 말자고 요청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모습, 즉 오래된 진흙 항아리라는 사실을요. 우리 모두가 평범함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서 인용한 말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이 나아지는 데에는 역사에 남지 않은 작은 행동들이 부분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은밀히 믿음으로 살아가며 묵직한 무덤에 묻힌 수많은 이들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역사에 한 줌의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가족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지라도, 이 연약함과 일시적인 존재의식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이 연약함과 일시적인 존재의식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마침내 '나는 경주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믿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소서. 나는 싸움을 했습니다. 아마도 다음 며칠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우며, 누군가가 '나는 수요일까지 견디고 집에 가서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할 만큼 지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9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꽤 흥미롭습니다. 지금은 『진리로 사는 삶』 주말 특집, 알리스터 벡 목사와 함께합니다. 곧 다시 돌아와 오늘 방송을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모든 나이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위로받아야 합니다. 특히 50대나 60대 분들, 또는 가까운 친구나 가족 중에 그러한 분이 있다면, 특별히 추천드릴 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노년도 아니고 젊음도 아닌, 끝나지 않은 시기: 예수님을 따르는 50대와 60대』입니다. 저자는 크리스토퍼 애시이며, 이 책은 이 시기의 삶을 성경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실용적인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 시기는 단순히 은퇴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지속적인 성장과 열매 맺는 섬김을 위한 시간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 책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웹사이트 truthforlife.org를 방문해 주세요. 다시 알리스터 벡 목사의 말씀을 들려드립니다.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 비판
설교자는 1972년에 출판된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를 소개하며, 이 책이 예수님을 정치 권력에 위협이 된 인물로 보는 관점을 취한다고 설명합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사회적 평등과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제시하셨기 때문에 정치 권력이 그분을 억압해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논리가 일정 부분 흥미롭게 들릴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가 누가복음 본문의 내용과 정반대되는 주장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누가는 헤롯과 빌라도를 가장 편집증적인 인물들로 그립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정치적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자의 머리를 베어버릴 수 있는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면 본문에서 그려진 그들의 태도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설교자의 논지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정치적 의미를 성급하게 해석하기보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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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분이 당신에게 그런 일을 했겠는가? 그리고 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겁니다. 왜? 분명히 복음서의 모든 저자들이 이 말이 완전히 애매모호하면서도 균형 잡힌 진술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을 그대로 보존했고, 모든 복음서에 넣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질문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런 식의 질문도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묻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저 궁금한데, 당신은 소득세 신고에서 속이지 않았나요?' 이제 당신이 '네' 또는 '아니요'로 직접 대답하면, 만약 당신이 결코 세금을 속이지 않았다면, '네' 또는 '아니요'로 대답하는 것이 오히려 제가 잘못 이해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어떤 질문은 그 자체로 구성되어 있어서, 직접적인 대답이 오히려 더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기서 문제되는 점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페레가 '메시야십니까?'라고 일반적인 의미로 묻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입니까?'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 또는 '아니요'로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권력을 대하는 완전히 독특한 접근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루가가 무엇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라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만약 '예'라고 하신다면, '네, 저는 지금 군대를 조직하고 있고, 당신들을 몰아내려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은 이 사건에 대한 매우 긴 기록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페레에게 질문을 받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제 제자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라고 하신다면, '네, 저는 단지 정치인입니다. 저는 여기서 로비를 하고, 표를 얻고, 칼을 얻고, 병사를 얻고,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아니요'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니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신다면, 그분은 '저는 단지 영적 인물일 뿐입니다. 저는 개인의 내적 평화를 주고, 삶의 모든 영역이나 현실의 모든 차원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단지 당신의 개인적인 삶에서 평화와 행복을 주려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듣고 싶어 합니다.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네, 저는 정치적입니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니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께서는 좁은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매우 정치적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느 의미에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으시고, 어느 의미에서는 매우 정치적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저, 팀 켈러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균형 잡힌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균형 잡힌 접근법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접근법은 제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보다 더 균형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어느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동시에 '네, 저는 정치적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루가는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고, 그분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전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잘 쓰여진 책들을 좋아하지만,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이 쓴 1972년에 출판된 『예수의 정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정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평등과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평등과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는 정치 권력에 매우 위협적이며, 그들은 예수님을 억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점은 이 텍스트에 있는 모든 내용과 정반대되는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루가는 헤롯과 페레가 두 명의 가장 편집증적인 인물들이라고 보여줍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정치적 위협이라도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들은 당신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입니다.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에서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한 인물입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아들, 딸, 아내 중 하나라도 정치적 위협이라도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 사람의 머리를 베어 버렸습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한 번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존 기대 수명은 헤롯의 돼지보다 헤롯의 자식보다 더 좋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헤롯, 즉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헤롯 대왕 가문의 편집증과 아우구스투스의 말
설교자는 헤롯 대왕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여긴 사람이라면 아들, 딸, 아내라도 가차 없이 제거했던 인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들을 학살한 헤롯 대왕의 잔혹함을 떠올리게 하며 그 가문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헤롯의 돼지가 헤롯의 자식보다 생존 기대 수명이 더 좋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말은 헤롯 가문이 자식들에게조차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소개됩니다. 설교자는 헤롯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가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헤롯 역시 편집증적인 권력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이 예화는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거나 조롱하는 배경을 설명하는 데 쓰입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2
본문 발췌 보기
왜 그분이 당신에게 그런 일을 했겠는가? 그리고 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겁니다. 왜? 분명히 복음서의 모든 저자들이 이 말이 완전히 애매모호하면서도 균형 잡힌 진술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을 그대로 보존했고, 모든 복음서에 넣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질문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런 식의 질문도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묻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저 궁금한데, 당신은 소득세 신고에서 속이지 않았나요?' 이제 당신이 '네' 또는 '아니요'로 직접 대답하면, 만약 당신이 결코 세금을 속이지 않았다면, '네' 또는 '아니요'로 대답하는 것이 오히려 제가 잘못 이해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어떤 질문은 그 자체로 구성되어 있어서, 직접적인 대답이 오히려 더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기서 문제되는 점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페레가 '메시야십니까?'라고 일반적인 의미로 묻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입니까?'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 또는 '아니요'로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권력을 대하는 완전히 독특한 접근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루가가 무엇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라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만약 '예'라고 하신다면, '네, 저는 지금 군대를 조직하고 있고, 당신들을 몰아내려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은 이 사건에 대한 매우 긴 기록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페레에게 질문을 받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제 제자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라고 하신다면, '네, 저는 단지 정치인입니다. 저는 여기서 로비를 하고, 표를 얻고, 칼을 얻고, 병사를 얻고,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아니요'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니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신다면, 그분은 '저는 단지 영적 인물일 뿐입니다. 저는 개인의 내적 평화를 주고, 삶의 모든 영역이나 현실의 모든 차원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단지 당신의 개인적인 삶에서 평화와 행복을 주려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듣고 싶어 합니다.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네, 저는 정치적입니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니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께서는 좁은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매우 정치적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느 의미에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으시고, 어느 의미에서는 매우 정치적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저, 팀 켈러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균형 잡힌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균형 잡힌 접근법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접근법은 제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보다 더 균형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어느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동시에 '네, 저는 정치적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루가는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고, 그분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전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잘 쓰여진 책들을 좋아하지만,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이 쓴 1972년에 출판된 『예수의 정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정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평등과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평등과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는 정치 권력에 매우 위협적이며, 그들은 예수님을 억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점은 이 텍스트에 있는 모든 내용과 정반대되는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루가는 헤롯과 페레가 두 명의 가장 편집증적인 인물들이라고 보여줍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정치적 위협이라도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들은 당신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입니다.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에서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한 인물입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아들, 딸, 아내 중 하나라도 정치적 위협이라도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 사람의 머리를 베어 버렸습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한 번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존 기대 수명은 헤롯의 돼지보다 헤롯의 자식보다 더 좋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헤롯, 즉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유배 글: 힘의 왕국과 사랑의 왕국
설교자는 나폴레옹이 삶의 마지막에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고 솔직하게 밝힙니다. 다만 그가 삶을 마감한 뒤 유배 생활 중에 쓴 글 가운데 일부가 놀라웠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글에서 나폴레옹이 '나는 힘으로 왕국을 세웠고, 그것은 사라져갔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인용합니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은 사랑으로 왕국을 세우셨고 그것은 여전히 서 있으며 영원히 서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함께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비를 통해 강요하는 권력은 결국 사라지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 밀어붙이는 힘과 자기 열기, 자기 희생을 통해 변화를 이끄는 힘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후자야말로 진짜 권력이라고 적용하며 청중이 권력을 이해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합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15–15문단 · 예화 3
본문 발췌 보기
당신은 변화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통제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짜 권력이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짜 권력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열고, 비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실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의 관계를 보세요.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싶습니까? 그들이 당신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싶습니까? 그들의 성품이 형성되기를 원합니까?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습니까? 진정으로 그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취약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사생활을 내려놓고, 그 사람을 당신 삶 속으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당신은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취약함을 품어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안전하게 머물려 하고, 약점은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인정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지만,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통제와 자기 드러내기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변화와 자기 열기, 자기 희생, 취약함, 그리고 부, 시간, 체면을 잃는 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조롱했겠습니까? 그들은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당신을 때리는 것을 멈춰라"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진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한 것은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아닙니다. 종교인들은 거기서 권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권력을 미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그 권력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정치인들은 그 권력을 조롱하고, 기독교를 비웃고, 그리스도를 비웃습니다. 그리고 "진짜 권력은 당신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때리고 있는 사람을 멈추게 하세요.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멈추게 하세요. 나를 맹목하게 하거나,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세요."라고 말합니다. "멈추게 하세요. 무언가 하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정치 시스템의 최대 조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그들이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셨지만, 자신은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역설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치적 권력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먼저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침을 뱉고, 가시덤불로 머리를 찌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약해지셨고, 이것이 바로 최고의 권력입니다. 당신이 강할 때도, 자발적으로 약해지고,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권력입니다.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에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저는 그가 삶을 마감한 후 유배 생활 중에 쓴 글들을 읽어봤습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알려주고 싶다면, 책을 주고 도와주길 원한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할 것은, 그가 쓴 글들 중 일부는 놀라웠습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힘으로 왕국을 세웠고, 그것은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으로 왕국을 세우셨고, 그것은 여전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때리지 않으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인간 정치 시스템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행동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진짜 권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권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진짜 권력이 아닙니다. 강요하는 권력은 사라져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 강요하는 권력은 사라지지만, 자기 열기와 자기 희생을 통해 변화를 이끄는 권력은 진짜 권력입니다. 큰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시도가 예수님 앞에 서 있고, 예수님께서 비시도의 손에 생명을 맡기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주위 사람들을 향해 의지의 가장 작은 손가락만 살짝 들어올리셨다면, 그의 쇠사슬은 부러지고, 불이 떨어져 병사들의 웃음을 사라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은 바닥에 죽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할 일은 그저 그들을 죽이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시는 바와 같이,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이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정치적 권력, 좁은 의미의 정치적 권력, 강요의 권력, 공적 정책의 권력,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는 권력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표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력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께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첫째, 실용적인 적용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정치적 정책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내려놓은 이야기
설교자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가 담긴 옥합을 풀어드린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 여인이 성관계를 통해 폐쇄감, 안전감, 수용감을 얻으려 했다고 해석합니다. 여인은 처음에 성관계가 영성과 관련된 것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에는 예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성생활에서 찾으려 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 발 앞에 자신의 성생활을 내려놓았습니다. 설교자는 그녀가 더 이상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성관계는 더 이상 그녀를 움직이는 힘이나 정체성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이를 정치에 적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묻지만, 정치 뒤에 종교가 있으며 사람들은 정치를 통해 하나님께만 주실 수 있는 사명과 영향력을 얻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치를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16–16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화가 나는 것은, "잠깐, 잠깐, 나는 이쪽이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에 대해 약간 걱정이 됩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저를 이쪽이나 저쪽으로 움직일까 봐 두렵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정치적 입장을 알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이걸 믿어야 하고 저걸 믿어야 하며, 이 후보를 지지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미리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당신이 통제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정치적 입장을 주셔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게 해주셨다면, 그분은 진정한 왕이 아닙니다. 당신이 왕입니다.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치적 입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먼저 나와 관계를 맺어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내가 이와 같아야 하거나, 그 입장을 가져야 할지 알고 싶겠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당신이 알겠는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당신은 여전히 당신 삶의 왕좌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왕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모호하게 말씀하시므로 당신이 진정히 그분을 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의 새로운 권력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당신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은 당신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저는 정치적 입장을 예수님으로 인해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든 간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여러분, 한 가지 더 들어보세요. 저는 당신이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묻겠지만, 오늘은 질의응답이 없으므로 빠르게 설명하겠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지적해 드리겠습니다. 왜 인간의 정치는 그런 식일까요? 자기 홍보, 절대 흔들리지 않는 모습,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강압적인 것이야말로 진짜 권력인가요? 정치를 그렇게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것처럼 보일까요? 정치는 성관계와 비슷합니다. 당신은 항상 그런 줄 알았죠. 누가 7장에서, 간음을 한 여자가 예수님께 알루에 오일을 붓은 유리병을 풀어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영성은 성관계와 관련된 줄 알았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성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성관계는 영성과 관련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성생활을 통해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폐쇄감, 안전감, 수용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제 성생활을 통해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 발 앞에 제 성생활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그녀의 정체성도 아니며, 이제는 그녀가 성관계에 종속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질문합니다. "이 교회는 정치적으로 무엇을 믿습니까?" 즉, 종교는 여기에 있고, 정치가 그 뒤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정치는 여기에 있고, 그 뒤에는 종교가 있습니다. 정치에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통해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영향력, 중요성, 사명감을 원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많은 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정치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보수주의자라면 시장이 신이 되고, 진보주의자라면 국가가 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폐쇄감을 얻으려는 것처럼, 정치를 통해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사명과 영향력을 얻으려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되, 먼저 그 여자가 알루에 오일을 내려놓은 것처럼, 비야도 자신의 scepter를 내려놓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비야는 정치에서 그렇게 망쳤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더 이상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시는 것일까요?
바라바와 '두 예수'의 이야기
설교자는 바라바가 반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진짜 혁명가였으며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유월절에는 관례적으로 죄수 한 명을 석방했고, 다른 세 복음서는 이 제안이 빌라도의 것이었다고 전한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바 중 누구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군중은 바라바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설교자는 바라바라는 이름이 '아버지의 아들'을 뜻한다는 점을 짚으며, 빌라도가 사실상 두 명의 예수님을 제시한 셈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바라바가 예수님께서 받으실 형벌을 실제로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상상을 통해 감옥의 바라바가 밖의 외침을 듣고 자유를 선포받는 장면을 그립니다. 바라바는 그 십자가와 못, 죽음이 자신의 것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복음이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라바와 같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17–17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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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한편으로 예수님은 "네, 나는 정치적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져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가 어디로 가는지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분이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아니요,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라고 하지 않으셨지만 "아니요"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시고 싶으시다면,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헤롯과 비拉두가 예수님을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누가가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정치인도 아니시며, 정치적 존재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전부 정치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편으로 이 이야기 속에는 세 번째 정치인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세 번째 정치적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세 번째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묻으시겠죠, "알겠습니다. 비라두와 헤롯이 있고, 세 번째 정치적 인물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라바입니다. 네, 바라바는 진짜 혁명가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고, 유월절에는 관례적으로 한 죄수를 석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세 복음서는 이 아이디어가 비라두의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비라두가 와서 말하길, "나는 이 사람을 죽이기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렇게 하죠. 당신들은 그를 유죄로 판단하고 싶지만, 한 죄수를 석방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요." 바라바는 진짜 혁명가였습니다. 말하자면, 바라바는 예수님께서 곧 받으실 형벌을 실제로 저지른 사람입니다. 비라두는 약간 실망했고, 이것이 역효과를 끼쳤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비라두는 두 명의 예수님을 그들에게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바라바의 이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바라바라는 말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명의 아버지의 아들을, 두 명의 예수님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비라두가 묻습니다. "어느 예수님을 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은 "바라바를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도 한 가지 의미에서 혁명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종류의 혁명가입니다. 매우 다른 종류의 혁명가입니다. 보세요, 바라바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처럼 드러나는 이유는 바라바가 바로 우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바가 범한 죄들 때문에 죽으시고, 바라바는 석방되니, 어떤 그림을 보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는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서를 쓴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바라바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바라바를 상상해 보세요. 바라바는 감옥에 갇혀 있고, 곧 십자가에 못 박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질식할 것을 생각하고, 손에 못 박힐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치는 군중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 하느님, 곧 그때가 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병사들이 들어와 문을 열고 "당신은 자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오, 하느님, 곧 그때가 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이 말합니다. "자유입니다." 바라바는 "왜 내가 자유일 수 있습니까?"라고 묻겠죠. 병사들은 매우 거칠고 멍청한 태도로 "아, 여기 와 보세요."라고 하며 그를 데리고 나갑니다. 바라바는 "잠깐, 그 십자가는 내 십자가입니다. 그 손에 박힌 못은 내 못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내 죽음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이 말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분이 주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으며, 나는 석방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바라바를 석방했다"는 말을 보셨습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을 죄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이유를 아시나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때리게 놔두신 이유를 아시나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형벌을 내리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하셨고, 우리에게 충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이 깊이 받아들이고,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당신이 지금 어떻게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단순히 죄가 사함을 받게 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바라바의 그림을 통해 신학자들이 말하는 "이중 계산"이라는 것을 당신은 얻게 됩니다. 이중 계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당신의 죄가 그분에게로 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유와 의가 당신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마치 이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처럼 대우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혁명적입니다. 완전히 혁명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정체성, 당신의 진짜 부, 당신의 진짜 시민권, 당신의 진짜 인종, 민족, 문화, 계급 지위는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존재이신가에 비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노예 해방 개념과 18세기 말 복음주의 깨달음 운동
설교자는 노예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어떤 장소나 문화에서도 저절로 나올 수 없는 개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마침내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 개념이 생겨났다고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시간이 있다면 반역의 역사에서 노예 해방 운동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말하고 싶다고 밝힙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출처가 18세기 말의 복음주의적 깨달음 운동이었다고 제시합니다. 이 예화는 복음 이해가 개인의 믿음을 넘어 사회 제도를 바꾸는 힘을 가졌다는 사례로 쓰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복음이 정치적으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예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그는 세속적 권력 싸움보다 복음 이해가 역사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둡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20–2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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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있다면, 반역의 역사에서 노예 해방 운동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잘못된다는 생각은 아무도, 아무 곳도, 아무 문화에서도 결코 나올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 사람들이 마침내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때 비로소 그 개념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확실히 그 출처는 18세기 말의 복음주의적 깨달음 운동에서 나왔습니다.
톰 스카이너 목사의 어바나 선교 컨퍼런스 설교
설교자는 1970년 일리노이주 어바나 선교 컨퍼런스에서 톰 스카이너 목사가 전한 설교를 테이프로 들었다고 밝힙니다. 그는 당시 새신자였고 그 설교가 너무 좋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스카이너 목사가 바라바를 체제를 무너뜨리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묘사했다고 전합니다. 스카이너 목사에 따르면 바라바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바라바가 시위나 폭동을 일으켜도 경비대와 전차로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총도 전차도 없는 예수님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설교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지금 당장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분을 죽여 묻어버렸다고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스카이너 목사는 3일 뒤 예수님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승리를 이루셨다고 선언합니다. 설교자는 이 인용으로 예수님의 정치가 세상 권력의 방식과 다르다는 점을 청중에게 제시합니다.
팀 켈러 · 2026-10-24
설교 내 21–22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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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로 톰 스카이너 목사는 이 놀라운 설교를 마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바는 체계를 무너뜨릴 사람입니다. 바라바는 그들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바라바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왜 바라바를 원하겠습니까? 바라바는 종교 지도자들을 쏘아죽일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체제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바라바를 요청하겠습니까? 그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바를 풀어주면 또 다른 시위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언제든 국가 경비대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의 동네에 몇 대의 전차만 몰아넣으면, 그가 벌이는 일을 언제든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가 총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찾아내고, 그의 아파트를 압수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동부 마을에 있을 것입니다. 네,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언제든 바라바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총도 없고, 전차도 없고, 탄약도 없는 남자가 어떻게 로마 제국 전체를 흔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의 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그를 없애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지금 당장. 바라바를 없애야 합니다. 바라바는 언제든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묻어버렸고, '이 이상 그 혁명가를 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톰 스카이너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3일 뒤, 예수님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이십니까?' '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