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24 / 32쪽 · 한 쪽 20개
원지 땅을 40일 안에 잔금 치른 이야기
설교자는 원지에서 남은 땅 한 필지를 사게 된 경위를 말합니다. 그 땅은 동네 한복판에 남아 있던 땅이었고, 단성고등학교 앞에서 대를 쪼개는 일을 하던 사람의 소유였습니다. 그 주인은 노름으로 큰 빚을 졌고, 설교자는 그 빚 때문에 땅이 나왔다고 돌아봅니다. 설교자에게는 한 푼도 없었지만 기도하며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보통 한 달인 계약 기간 중 잔금 마련이 어려울 것 같아 설교자는 기간을 40일로 늘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동안 잠이 오지 않았고, 돈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일을 가장 어려워하는 설교자는 아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걱정이 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40일 안에 잔금을 치르고 이전 등기를 마쳤고, 그 땅에 사택과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미련한 일인지 믿음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25–2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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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다음에 바로 1982년도 9월에 여기 원지에 왔는데, 원지에 와서는 간이 좀 커졌어요. 지난번에 벽돌 한 장 했는데 이번에는 시멘트 한 포로 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시멘트 한 포씩 보내 주시면 예배당 짓겠습니다 했더니요. 돈을 모아 주면 되는데 어떤 목사는 시멘트를 한 차 사서 싣고 왔어. 생초에 있던 목사님인데. 예배당을 지으려면 땅을 사서 기초를 하고 그 이후에 시멘트도 사용할 텐데 시멘트부터 사면 어떻게 해? 그러면 시멘트가 굳어서 못 쓸 텐데. 돈을 가져오면 될 텐데 시멘트를 사 와서, 그런 일도 있고.
그렇게 해서 원지에서도 원지 한복판에, 원지에서 남은 땅이 딱 한 개 있어. 남아 있을 땅이 아닌 거야. 동네 한복판인데 거기 남아 있어서 그게 나온 거야. 나온 땅의 임자가 누구냐면 여기 단성고등학교 앞에 가면 대 쪼개는 데, 대 쪼개는 그 사람이라. 그 사람 땅인데 노름을 해서 빚을 엄청나게 진 거야, 노름빚을. 노름빚이 아니었으면 안 팔 텐데 그 사람이 노름하는 바람에 우리가 그 땅을 사게 되는 거예요.
한 푼도 없이 또 기도했는데 계약 날짜를 보통 계약하고 중도금하고 잔금 치르는 걸 한 달로 하는데, 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한 달 안에 잔금을 마련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40일로 해 달라고 졸라서 40일로 했어요. 그리고는 잠이 안 와. 40일 안에 잔금을 치러야 하니까. 잔금만 치르고 나면 그다음에 땅은 뒤에 팔아도 그 가치는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잔금을 치르는 게 목표인 거예요.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잔금을,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디 가서 치러요?
그런데 어떻든 이래저래 해서, 제가 어디 가서 돈 문제를 가지고 도와 달라는 말을 제일 하기 어려워서 잘 못하는 입장인 거야. 그걸 못 하겠어. 돈을 도와 달라, 이걸 잘 못하는 거예요. 어떻든 여러분, 그렇게 해서 40일 안에 잔금을 치르고 이전 등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택을 짓고 예배당을 짓고 그렇게 해냈거든요. 지금 보면 그게 미련한 건지 믿음인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25년 기다림
설교자는 아브라함이 75세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 모래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아들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25년이 걸렸고, 설교자는 그동안 낙심될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봅니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자 이는 자신을 통해서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하며, 그래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방에 들였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90세 가까이 되었을 무렵에는 생리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설교자는 추측합니다. 자연적으로 생명이 탄생하기 거의 불가능해 보일 때 이삭이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보기에 더딘 것 같아도 가장 적합한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는 점도 함께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32–36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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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아시는 대로 부족한 게 없어요. 다 만족한데 아들이 없는 거예요. 75세 때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될 것이다. 아니, 하늘의 별은 놔두고 바다의 모래는 놔두고 하나나 주세요. 그냥 하나라도. 하나도 안 주면서 하늘의 별같이. 여러분,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거야. 하나님께서 하실 거다. 믿었는데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가 죄도 하나도 없고 허물도 없고 약점도 없고 이런 의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걸 의로 여기시기로 했냐면 믿는 것. 믿어지지 않는 걸 믿는다는 건 아직 어딘가 인격 속에 순진한 구석이 좀 남아 있어야 뭘 믿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참 못된 놈이고 늘 거짓말하고 늘 속이고 하는 사람이 너도 나 같겠지 해서 아무것도 못 믿습니다. 아무것도 못 믿고 누구도 못 믿어. 그건 나쁜 사람이야. 아무것도 안 믿고 누구도 안 믿고 하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습니다.
더러 실수도 하고 부족함도 있고 해도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순진하거나 아직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어서 믿는 거거든요. 남도 자기 같은 줄 알고 믿는 거야. 그래서 아무리 봐도 잘 믿다 보면 속을 때 속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잘 믿는 사람이 아무도,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좀 낫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거예요.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네 자손이 많게 될 것이다 했는데, 이삭 하나를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고 얼마만큼 지나서 주시냐? 25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영원 속에 사시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25년도 잠깐 같으나 사람에게 25년은 긴 세월이죠. 그동안에 낙심될 만한 일이 몇 번 있었어요? 사라의 생리가 끊어졌어.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는 아니구나 해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 방에 들여보낸 거거든요.
그다음에 내가 볼 때 한 90세 이렇게 넘어가면서 아마도 그때는 아브라함이 나도 생리적으로 애를 못 낳는 거 아닌가 싶었을 거라. 다시 말하면 사라나 아브라함이나 자연적인 생명 탄생은 거의 불가능하다 싶을 때쯤 돼서 정말 약속의 자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이삭이 태어나는 거예요.
다메섹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난 기도 응답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밧단아람에 가서 기도한 일을 소개합니다. 엘리에셀은 동네 입구에서 우물가의 처녀에게 물을 청했을 때 약대에게도 물을 길어 주겠다고 대답하는 여자를 이삭의 아내로 믿겠다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기도가 먼 훗날이 아니라 그날 응답되기를 구한 것이라고 짚습니다. 기도를 마치기 전에 브두엘의 딸 리브가가 물동이를 들고 나왔고, 엘리에셀이 물을 청하자 그녀는 마시게 해 주겠다고 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우물이 깊어 물을 긷는 일이 쉽지 않았고, 약대는 많은 물을 마시기 때문에 리브가가 계속 물을 길어 부어야 했다고 설명합니다. 엘리에셀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기도를 마치기 전에 응답받은 이 사건에서 엘리에셀의 믿음이 탁월하다고 평가하며, 일한 만큼 기도한 만큼 믿음이 나타난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40–44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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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떤 사람의 기도는 굉장히 빨리 응답됩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 집의 청지기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존경하는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해서 배필을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본토 밧단아람으로 가요. 동네가 가까워지니까, 지금 자기가 막중한 사명을 띠고 한 가문을 이어 갈 만한 좋은 며느릿감을 구해야 되는데, 여러분 사람 보고 이력서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다메섹 엘리에셀이 동네 가까이 올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동네 입구에 가서 우물가에 물 길으러 오는 처녀들이 있을 텐데, 내가 어떤 처녀를 보고 소녀야, 내게 물 좀 다오 이렇게 하면, 예, 제가 마시게 해 드리리다 하고 당신의 약대를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으리다 하고 대답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가 이삭의 아내감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줄 내가 믿겠나이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또 먼 훗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날 응답되는 걸 봐야 될 텐데.
기도 끝나고 눈을 떠 보니까 바로 어떤 처녀가 나와. 브두엘의 딸, 라반의 여동생 리브가야. 오길래 물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하는데, 소녀야, 물을 좀 마시게 다오 하니까 그 처녀가 낯선 사람에게 못 본 체하지 않고, 예, 제가 마시게 해 드리리다 하고 당신의 약대를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으리다.
우리나라처럼 물 길기가 쉽거나 틀면 나오는 그런 게 아니고 우물이 상당히 깊어서 물을 길으려면 상당히 힘도 들여야 되고, 또 여러분 사람이야 한 잔이면 목마른 건 해갈되는데 약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대가 물을 마시면 많이 마시거든요. 한번 충분히 마시면 15일간 물 안 마시고 갈 수 있어. 그래서 약대를 위해서 물을 길으리다 할 때는 약대에게 물 한 잔 주고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 물을 계속 길어서 붓고, 약대가 다 마시면 또 붓고 하는 걸 다메섹 엘리에셀이 묵묵히 보고 있는 겁니다.
보다가 다메섹 엘리에셀이 땅에 엎드려요. 종의 기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빨리 들어주시다니 하면서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 여기 보면 기도하기를 마치지 못하여 응답됐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어쩌면 다메섹 엘리에셀의 믿음이 아브라함보다 더 탁월하다.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의 기도가 그 사람의 믿음이거든. 보통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해도 우리 기도한 만큼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그 사람의 믿음이 뭘로 보이느냐? 일한 만큼, 기도한 만큼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일 안 하는 사람은 기도를 안 하고,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일이 안 돼.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건데.
조지 뮬러의 고아원과 기도 일기
설교자는 영국의 목회자 조지 뮬러를 소개합니다. 뮬러는 젊은 시절 도둑질, 거짓말, 도박, 사기 등으로 교도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독일 할레대학에서 기도회에 함께 가 본 뒤 회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는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많았고, 뮬러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려 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재정적 도움을 부탁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뮬러는 기도한 내용과 응답을 일기처럼 기록했고, 그 기록에 응답된 기도가 오만 번 이상이라고 설명됩니다. 한번은 고아들을 식탁에 앉혔는데 빵이 없었지만, 그는 빵을 주심을 감사한다고 기도했고 곧 빵 실은 차가 들어왔습니다. 설교자는 사고로 빵을 전달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덧붙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증거라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45–5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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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또 한 분을, 기도라는 말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림을 보셨죠? 이 그림 누구 아세요? 보통 식당 같은 데 붙어 있고 할 텐데, 조지 뮬러라고 하는 영국의 목회자예요. 독일에 가서 할레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그때까지는 도둑질하고 못된 짓 다 하고 그렇게 살던 사람인데, 독일의 할레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누가 권해서 기도회에 한번 같이 가 보겠느냐? 가자고 하니까 갔대요.
여기 보면 성경책과, 입에 풀칠한다고 수프 한 잔하고 빵 한 개, 참 소박한 기도 같아요. 그러고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데, 얼마나 기도해서 얼마나 응답받았는지 책이 있어요. 오만 번 기도해서 응답받은 사람, 조지 뮬러. 어떻게 해서 이분이 오만 번이나 응답받았느냐? 1805년에 태어나서 1898년까지 영국의 목회자였는데 고아의 아버지라고.
이분이 왜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되냐면 고아를 한 삼십여 명의 여자아이들 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떼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져서 버려진 아이라든지 부모 없는 아이가 너무 많아. 그래서 그런 아이들 중에서 여자아이를 거두어서 먹이고 입혀야 되는데, 자기가 목사로서 가진 게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이분도 자기 경험이 뭐냐면 한 번도 누구를 찾아가서 내가 고아원을 하고 있으니까 재정적으로 좀 도와 달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냥 기다리고 있어. 더 놀라운 것은 왜 이분이 오만 번이냐? 기도한 것마다 일기를 써요, 기도 일기를. 몇 년도 몇 월 며칠 몇 시에 무슨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응답되면 응답된 기도를 다 쓰고 그렇게 한 거예요.
옛날 젊은 시절에는 도둑질, 거짓말, 도박, 사기 등으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방탕아 중에 방탕아인데, 할레대학에서 기도회에 참여해서 회심하게 돼요. 그리고 신학 공부해서 전도자로 살았는데, 영국으로 건너와서 브리스톨 지역에서 기드온 채플하고 베데스다 채플이라고 하는 교회를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거두고 챙기고 섬기는데 오만 번이나 응답을 받았대요.
어떤 때는 때가 되어서 고아들을 다 식탁에 앉으라고 해. 빵 없어, 지금. 지금 먹으려고 침을 삼키면서 김칫국 마시고 있는데 빵이 없어. 제가 그 책을 읽어서 놀랐던 게 빵이 지금 없는데 감사해요. 빵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입장이 곤란해요. 빵이 없는데 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기도하는데 빵차가 들어온 거야, 빵 실은 차가.
그 내용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어떤 경우는 사고가 나서 빵을 가져갈 수가 없어. 배달될 곳에 못 가는 거야. 갖다 내버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가져왔다 그러면서 가져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렇다고 하나님이 교통사고를 낸 건 아닙니다. 자칫하면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그러니까 오만 번 중에는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란 말이야. 그래서 고아들을 챙기는 일은 누군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데 하나님이 직접 못 하니까 누군가 하나님 대신에 해야 될 일이고, 뮬러 목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 보실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인 거야. 뮬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아까 봤죠? 빵하고 수프 하나하고 그렇게 검소하게 살고, 70이 넘어서 87세까지 40개국을 다니면서 전도해서 300만 명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온 내 삶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사천 예배당 태풍 피해와 면장의 도움
설교자는 사천 예배당이 농지 경계를 약 1미터 넘어 지어져 사천군청에서 문제 삼았던 일을 말합니다. 설교자는 앞마당을 넓히기 위해 사택 쪽으로 경계를 넘어 지었는데, 그 땅은 곧 대지로 바뀔 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1979년 8월에는 태풍이 두 번 지나가 큰 피해가 났고, 군에서는 복구를 위해 올라가는 김에 잘못 지은 건물을 뜯겠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설교자는 블록 공장에서 시멘트를 제대로 넣어 단단한 블록을 찍어 달라고 부탁해 정성껏 쌓아 올렸다고 회고합니다. 포클레인이 온다는 날짜가 다가오자 설교자는 잠도 오지 않고 식욕도 잃었습니다. 그는 면장 이영우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면장도 설교자를 위해 애를 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사건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그 무렵 이영우 면장이 원래 집이 있던 곳이라는 서류를 군에 제출해 통과시켰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그 사건이 자신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며 자신은 그것을 기도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덧붙입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53–60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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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제가 어려운 일들이 있으면 기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내 힘으로 안 되는데.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예기치 않은 일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1979년도에 제가 아까 얘기한 사천에 있을 때 예배당을 지으면서 좀 무리한 일을 했어요. 땅이 두 필지가 있는데 한 필지는 대지고 한 필지는 농지인 거야. 농지에는 사택은 지을 수 있어, 주택은. 그래서 농지에 주택을 짓고, 앞에 길가 쪽에 있는 예배당 지을 땅을 길 쪽으로 앞마당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 어차피 사택을 지은 땅도 곧 대지로 변경될 것이기 때문에 앞에 마당을 남기려고 사택 쪽으로 경계를 넘어서 좀 침범해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다 내 땅이고 결국 그 땅도 대지로 될 것이고, 농지로 보존되는 땅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목이 아직은 변경 전이고 농지인데 예배당을 거기다 한 1미터 더 들어가 지었거든. 그걸 사천군청에서 문제 삼아서. 8월에 태풍이 두 개가 왔어요. 어빙이라는 태풍하고 주디라는 태풍이 8월 초에 한 번, 8월 중순에 한 번, 두 번 할퀴고 지나면서 그때 태풍이 얼마나 무서웠냐? 한 130명이 죽었다는, 그 당시에. 그래서 우리 성경 강좌 하는 모임이 안 됐어요. 교통이 다 두절되어서 길이 끊겨 차가 못 다닐 정도로 무시무시한 태풍이 지나갔는데.
군에서 또 연락이 뭐가 왔느냐? 태풍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굴착기나 이런 것이 그쪽에 올라갈 텐데 올라간 김에 우리가, 내가 잘못 지은 걸 뜯는다는 거야. 아이고, 저는 여간해서 금식 안 하고 철야 잘 안 하는데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말라. 그게 어떻게 지은 집이냐? 제가 사천에 가서 블록 공장에 가 보니까 블록에 시멘트가 너무 적게 들어갔어. 보통 그런 블록 살 때 깎아 달라고 하면서 사잖아요. 제가 달라는 대로, 얼마 더 쳐 드릴 테니까 시멘트를 제대로 넣어서 단단한 블록을 만들어 달라 하니까 사장이 쳐다보더라고요. 보통 깎자고 하잖아요.
왜 그렇게 해야 되냐 하면 이거는 보통 사람 집을 짓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을 지을 것이기 때문에 블록에 시멘트를 제대로 섞어서 찍어 달라. 정말 가서 보니까 다른 거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시멘트가 제대로 들어간 거야. 때려 보니까 쇠 소리가 나요.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내 손으로 다 쌓아 올려서 이제 지붕 얹을 만큼 올라갔어. 진주노회 안에 블록 한 장씩 보내 주세요 해서 모금한 거잖아. 그걸 다 쌓아 올렸는데 포클레인 가지고 와서 밀어 버린다고.
여러분, 기도 안 하겠어요? 기도를 하다가 면장을 찾아갔어요. 면장은 법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다 해 주려고 하는데 법이 그러니 어떻게 하겠느냐? 이영우라는 면장, 이름도 잊어버리지 않는데 이분이 저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나보다 더 애를 태우는 거라.
그래서 날짜가 바짝바짝 다가오는데, 그해에 태풍이 연달아 두 개나 왔기 때문에 사천에서 고성 사이 경계, 제일 먼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서 포클레인으로 밀어 버리는 걸 보고 내가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 잠이 안 오고 밥맛이 떨어지고 진짜 살맛이 없어지는 거예요. 10월 29일인가 포클레인이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에 뭐가 있어? 1979년도 10월 26일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거야. 그때는 박정희가 곧 나라고 나라가 박정희야, 그냥. 그런데 박정희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니까 나라가 질서도 없고 그냥 세상이 끝난 것처럼 됐어요. 그때 이영우 면장이 군에 가서 여기 공부상에는 없어도 원래 집이 있던 곳이다, 그렇게 서류를 해서 통과시켰대요. 그래서 포클레인 가지고 오는 걸 포기하고 지금도 예배당이 거기 있습니다. 그 뒤에 있는 농지로 되어 있는 땅을 빨리 지목 변경해서 완전히 무결하게 처리한 거예요.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나를 위해서 박정희를 쏜 건 아니죠. 나는 그걸 기도한 게 아니야. 그냥 이게 부서지지 않기만을. 여러분, 우리가 여기 땅을 산 것도 아이엠에프를 내가 낸 거 아니잖아요. 아이엠에프가 터지니까 진로 포도원이 50만 평 되는 땅이 공중분해되어 날아갈 때, 여기 진로 포도주 공장 터인데 너무 헐값에 나온 거라. 이 땅 여기 요만큼을 9천만 원에 그때 돈으로 샀는데, 여러분은 9천만 원이 안 큰지 몰라도 1998년도 9천만 원은 지금 9억 정도 되는 돈일 거야, 아마 27년, 28년 전이니까.
2008년 성경 강좌 심화 과정의 확산
설교자는 건강이 나빠지던 2008년에 한국 교회에 전하고 싶은 말을 남기려는 마음으로 성경 강좌 심화 과정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구약을 4박 5일씩 두 차례, 신약을 한 차례 강의했고, 이를 녹음해 엠피쓰리 파일로 만들어 시디에 담아 보급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자료가 자신이 죽어도 계속 하나님 말씀을 들려줄 것이며, 한국 교회에 남기는 유언처럼 남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 작업을 마치자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고, 당뇨 등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회고합니다. 설교자는 이 자료가 생각보다 많이 팔려 이후 여러 시설을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된 것 같다고 돌아봅니다. 현장에 있던 오일주 집사는 광주 월광교회 세미나와 관련해 이 자료를 최근에 알게 되었다고 소개됩니다. 설교자는 불법 복제본이 유에스비에 담겨 여러 나라로 퍼졌다고 말하며, 필라델피아에서는 설교를 듣던 한 분이 네팔 선교 헌금을 보내왔다고 전합니다.
노우호 · 2026-10-20
설교 내 73–7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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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에 제가 건강이 조금 안 좋아지면서, 내가 이러다가는 한국 교회에 전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보지도 못하고 내 생이 끝나는 거 아닌가? 2008년도에는 뭘 했느냐? 에스라 성경 강좌 심화 과정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구약을 4박 5일, 4박 5일 두 번, 그리고 신약을 또 한 번, 그렇게 해서 녹음해서 엠피쓰리 파일로 만들어서 그때는 유에스비가 아니고 시디에 담아 보급하게 됐는데, 나는 죽어도 내 시디는 살아 있어서 계속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줄 것이다. 그걸 해 놓고 나면 내가 한국 교회에 남기는 유언처럼 남아 있으리라 하고 만들었어요.
그걸 만드니까 조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당뇨도 있고 여러 가지가 힘들었는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요. 그런데 그렇게 반응이 일어날 줄 몰랐어요. 지금 와서 돌아보면 2008년도 이후에 여기 우리가 땅을 장만하거나 이렇게 하는 거 보면 전부 다 그게 너무 많이 나가서, 심화 과정이 엄청나게 많이 나간 거예요. 우리 상상을 넘어설 만큼 많이 나가서 이런 시설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뒤로는 다른 거는 만들어도 별로 많이 안 나갔는데 그 심화 과정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사 주고. 오늘 여기 앉아 계시는 오일주 집사님, 최근에 알았는데, 제가 오래전에 광주 월광교회에 가서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이분이, 그걸 최근에 얘기 듣고. 그러니까 지금도, 그건 또 불법인데 불법 복제품이 요즘은 유에스비에 담겨서 돌아다니는데 온 세계를 돌아다니는 거예요. 우루과이, 파라과이, 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더반, 이런 데 가서, 발도 없는데 거기 날아다니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우리 설교를 들으시는 분이 있어서 네팔 선교 헌금을 보내온 분도 있는 거예요. 그런 분들이 보면 심화 과정을 듣고 성경이 안 보이다가 성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건 즉시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생각, 우리 조급한 사람 생각보다는 조금 더디 응답되는 수가 많아요.
사과나무 씨의 비유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이 왜 자연스럽게 선행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과나무 씨의 비유를 듭니다. 그는 먼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점을 짚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주신 지혜가 사람의 마음에 심기면, 그 사람이 행하는 행동도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사과나무 씨를 심으면 사과나무가 자라 사과가 맺히는 일에 견줍니다.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가 마음에 심기면 하나님의 성품인 선하심이 드러나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행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지혜와 선행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6–6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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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은 자연스럽게 선행으로 도출됩니까? 바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인간의 마음에 심겨지면 당연히 그 인간이 행하는 행동은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과나무 씨를 심으면 사과나무가 자라 사과가 맺히듯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심겨진다면 하나님의 성품인 선하심이 드러나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선행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종』 인용과 온유함 이해
설교자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온유함이 나약함이나 굴종으로 읽힐 위험이 있었다는 사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종』이라는 책을 인용합니다. 인용문은 적절할 때 말하지 않는 사람이나 적절할 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노예적이고, 적절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즉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글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온유함이 약한 사람의 태도로 여겨졌음을 설명합니다. 또한 명예를 중시하던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기면 화를 내어 명예를 되찾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고 덧붙입니다. 이런 배경과 대비하여 설교자는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은 세상의 이해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강함과 분노의 기준 위에서 온유함을 바라보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온유함의 의미를 다시 살펴야 한다는 것이 이 대목의 적용입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8–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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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온유함이 나약함이나 굴종으로 읽힐 위험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종』이라는 책에서는 '적절할 때 말하지 않는 사람은, 적절할 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노예적이다. 적절할 때 분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서 온유함은 나약함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명예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이 있을 때 화를 내어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모세와 아론, 미리암의 비난 사건
설교자는 민수기 12장 3절의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을 펼칩니다. 이 구절의 앞뒤 문맥에는 모세의 형제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한 사건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때 모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설명합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맞서지 않은 모세의 태도가 그가 말한 온유함의 모습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옳다고 인정하셨고, 아론과 미리암을 엄히 책망하셨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결말을 통해 온유한 사람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직접 다루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억울함까지 주님께 올려드리는 삶을 적용하는 근거가 됩니다. 성도가 사람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기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설교자의 메시지입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10–1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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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뒤 문맥을 보면, 모세의 형제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옳다고 인정하셨고, 아론과 미리암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깨끗한 물에 든 먼지의 비유
설교자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첫째로 성결하다는 말씀을 붙잡습니다. 시간이 짧아 성결함만 다루겠다고 밝히며, 성결함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지 않은 상태라고 풀이합니다. 그는 청중에게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안에 먼지가 떨어져 있으면 성결한 물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그는 성결하지 않다고 단호히 답합니다. 이 비유를 따라 하나님께 받은 지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끼어들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기적인 마음, 시기심, 경쟁심, 정치적인 야망이 섞여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결한 지혜가 될 수 없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그런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지혜에 불과하다고 규정합니다. 결국 작은 자기 욕심이라도 섞이면 지혜의 순수함이 흐려진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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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공동체를 더욱 단단히 하나님의 지배로 결속시키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우리 공동체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하고 받은 그 지혜가 여러분들을 더욱더 하나님과의 다스림에 단단히 결속하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도를 통해 받은 지혜, 말씀의 묵상과 예배를 통해 받은 지혜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계속적으로 수용하고 발생시키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계속 보면요. 15절에 이러한 진단을 합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독한 시기는 너무 강한 경쟁심, 시기심이 심한 상태예요. 그리고 두 번째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입니다. 당파심이죠.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인 마음과 경쟁심, 그리고 이기적인 야망과 당파심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 야고보는 어떻게 진단을 하냐면, "자랑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당연하죠,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다 자랑입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어떠한 일이 생깁니까? 진리를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여서 거짓말합니다. 거짓을 만들기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일이 그 당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규명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늘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 여러분, 여기에 나온 모든 내용을 다 다루기에는 이 새벽의 시간이 짧기 때문에 성결함에 대해서만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성결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그 안에먼지가 떨어져 있으면 성결한 물입니까? 성결하지 않습니다. 성결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 시기심, 경쟁심, 나의 어떤 정치적인 야망이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결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에 불과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18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러분, 18절에 화평에 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는 지혜에 관한 말씀이었어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에 대한 권면의 말씀과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인지 분별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면, 지금 18절에는 화평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왜 화평에 대한 주제가 등장할까요? 우리가 17절 말씀을 보면 선한 열매가 등장합니다.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라고 했는데, 18절에는 "화평으로 심어 어떠한 열매를 거둡니까? 의의 열매를 거둔다."라고 합니다. 선한 열매가 있어요. 그리고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 여러분, 선한 열매는 결과적으로 개인이 얻는 열매입니까? 공동체가 얻는 열매입니까? 개인이 얻는 열매예요. 우리가 17절 말씀을 보았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이것은 한 개인에 해당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 이것은 개인일까요? 공동체일까요? 공동체예요. 왜냐면 의의 개념을 좀 봐야 되는데요. 의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법정적 선언으로 구약의 말씀에선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재판장 앞에 두 사람이 나와서 자신을 변호했어요. 재판장이 듣고 "네가 맞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구약 시대에서는 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의의 열매"라고 했을 때, 이 의는 무엇이냐면, 야고보서 안에서의 의는 공동체 안에서의 공정성, 신실성을 의미했어요. 한마디로 공동체 안에서 공정하고 신실함에 대해서 재판정이 "네가 옳다"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민수기 12장 말씀을 보았던 것처럼, 모세와 아론과 그리고 미리암이 왔을 때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재판장 대신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의 손을 들어 주신 것, 그것은 곧 누가 의롭다라고 선언하신 겁니까? 모세가 의롭다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서 지혜가 더 큽니까? 화평이 더 큽니까? 여러분, 물론 두 개념 다 너무 중요하죠. 이 특징 다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지금 야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평이에요. 화평. 하나님으로부터 한 개인이 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해요. 이것을 잘 분별해서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잘 판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화평은 뭐 무엇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무엇입니까? 그 공동체 안에서 "네가 옳다"라고 인정받는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 각자의 개인의 삶에 가득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공동체 안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더 많아지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여러분들의 가정에 여러분들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시길 축원드려요. 우리 교회 안에 화평하게 하는 자, 피스메이커, 화평하게 하는 자. 우리 팀 안에, 우리 목장 안에, 내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시는 이 아침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화평에 대해서 말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요. 이미 예수님께서 화평을 심는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맡긴다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화평을 심으셨어요. 어디서 심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심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이 아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특권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우리가 삶에서 화평을 심는 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고, 여러분들이 가져 나온 기도의 제목을 두고 기도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시겠습니다. [음악] 기도하시겠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네가 옳다'는 선언
설교자는 '의'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재판장 앞의 장면을 소개합니다. 재판정에 두 사람이 나와 각자 자신을 변호하고, 재판장이 그중 한 사람에게 '네가 맞다'라고 선언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의'가 주로 이런 법정적 선언을 뜻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의의 열매'는 그런 법정적 의미를 바탕으로 공동체 안에서의 공정성과 신실성을 가리킨다고 풀이합니다. 즉 공동체 안에서 공정하고 신실하게 살았을 때 재판정이 '네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어서 민수기 12장의 사건을 다시 꺼냅니다. 모세와 아론, 미리암 사이에 공동체의 문제가 생겼을 때, 재판장을 대신해 하나님께서 나타나 모세의 손을 들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모세가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설교자는 지혜를 받는 것과 그것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야고보가 결론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화평이라고 강조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공동체 안에서 '네가 옳다'고 인정받는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정, 교회, 목장 등 각자의 자리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많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김성헌 · 2026-10-20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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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공동체를 더욱 단단히 하나님의 지배로 결속시키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우리 공동체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하고 받은 그 지혜가 여러분들을 더욱더 하나님과의 다스림에 단단히 결속하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도를 통해 받은 지혜, 말씀의 묵상과 예배를 통해 받은 지혜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계속적으로 수용하고 발생시키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계속 보면요. 15절에 이러한 진단을 합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독한 시기는 너무 강한 경쟁심, 시기심이 심한 상태예요. 그리고 두 번째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입니다. 당파심이죠.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인 마음과 경쟁심, 그리고 이기적인 야망과 당파심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 야고보는 어떻게 진단을 하냐면, "자랑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당연하죠,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다 자랑입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어떠한 일이 생깁니까? 진리를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여서 거짓말합니다. 거짓을 만들기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일이 그 당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규명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늘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 여러분, 여기에 나온 모든 내용을 다 다루기에는 이 새벽의 시간이 짧기 때문에 성결함에 대해서만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성결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그 안에먼지가 떨어져 있으면 성결한 물입니까? 성결하지 않습니다. 성결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 시기심, 경쟁심, 나의 어떤 정치적인 야망이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결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에 불과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18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러분, 18절에 화평에 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는 지혜에 관한 말씀이었어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에 대한 권면의 말씀과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인지 분별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면, 지금 18절에는 화평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왜 화평에 대한 주제가 등장할까요? 우리가 17절 말씀을 보면 선한 열매가 등장합니다.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라고 했는데, 18절에는 "화평으로 심어 어떠한 열매를 거둡니까? 의의 열매를 거둔다."라고 합니다. 선한 열매가 있어요. 그리고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 여러분, 선한 열매는 결과적으로 개인이 얻는 열매입니까? 공동체가 얻는 열매입니까? 개인이 얻는 열매예요. 우리가 17절 말씀을 보았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이것은 한 개인에 해당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 이것은 개인일까요? 공동체일까요? 공동체예요. 왜냐면 의의 개념을 좀 봐야 되는데요. 의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법정적 선언으로 구약의 말씀에선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재판장 앞에 두 사람이 나와서 자신을 변호했어요. 재판장이 듣고 "네가 맞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구약 시대에서는 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의의 열매"라고 했을 때, 이 의는 무엇이냐면, 야고보서 안에서의 의는 공동체 안에서의 공정성, 신실성을 의미했어요. 한마디로 공동체 안에서 공정하고 신실함에 대해서 재판정이 "네가 옳다"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민수기 12장 말씀을 보았던 것처럼, 모세와 아론과 그리고 미리암이 왔을 때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재판장 대신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의 손을 들어 주신 것, 그것은 곧 누가 의롭다라고 선언하신 겁니까? 모세가 의롭다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서 지혜가 더 큽니까? 화평이 더 큽니까? 여러분, 물론 두 개념 다 너무 중요하죠. 이 특징 다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지금 야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평이에요. 화평. 하나님으로부터 한 개인이 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해요. 이것을 잘 분별해서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잘 판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화평은 뭐 무엇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무엇입니까? 그 공동체 안에서 "네가 옳다"라고 인정받는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 각자의 개인의 삶에 가득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공동체 안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더 많아지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여러분들의 가정에 여러분들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시길 축원드려요. 우리 교회 안에 화평하게 하는 자, 피스메이커, 화평하게 하는 자. 우리 팀 안에, 우리 목장 안에, 내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시는 이 아침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화평에 대해서 말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요. 이미 예수님께서 화평을 심는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맡긴다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화평을 심으셨어요. 어디서 심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심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이 아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특권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우리가 삶에서 화평을 심는 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고, 여러분들이 가져 나온 기도의 제목을 두고 기도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시겠습니다. [음악] 기도하시겠습니다.
간디의 그리스도 사랑과 기독교 거부
설교자는 간디를 예로 들며, 간디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기독교인은 싫어했다고 말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간디는 예수님처럼 살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령의 영향 아래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런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삶의 원칙이나 규율을 지키는 일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영적으로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변화가 영적 형성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그는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와 연결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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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생활 원칙'에 대해 다루는 글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 원칙들을 세울 때 종종 세속적인 인물들, 예를 들어 건강 트레이너나 유사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세속적인 건강 트레이너들이 좋은 조언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가 저에게 154kg의 데드리프트를 성공했다고 문자로 알려왔습니다. 네, 정말 인상 깊습니다. 정말 힘이 세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때때로 이러한 원칙들이 종합적이라는 이유로 혼동될 수 있습니다. 매튜, 당신은 삶 속에 분명히 규율이 있을 텐데요.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문제는 '원칙'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습니까? 저는 삶의 원칙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동등한 수준으로 놓고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종종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제 삶의 규칙 중 하나가 성경을 읽는 것이고, 또 하나가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며, 이 모든 지침이 목사나 기독교 저자 같은 영적 지도자로부터 나온다면,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믿는 자로서 1만 걸음을 걷지 못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로서 성경 말씀을 받지 않는 시기, 묵상하지 않는 시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시기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벤, 마크,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이런 상황을 마주치십니까? 사람들이 강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자주 이 책과 존 마크 코머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영적 접근법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벤, 아니요? 코머처럼 말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코머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네, 저는 이 사고방식이 분명히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는 것 같은 사례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20대나 30대의 젊은이들 중 상담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치 영적 형성의 일부분이 심리상담사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죠. 저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특정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저는 그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 있고 그들의 귀를 얻고 있으며, 그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를 제공한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제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단지 서부 버전의 율법주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전 방식을 싫어하고, 새로운 규칙과 원칙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죠. 만약 이 규칙을 따르면 반드시 번영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벤, 우리가 조언과 예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밝은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시로부터 영적 성장과 도전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반드시 모방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코머와 대화하거나 그의 책을 읽을 때, 그가 말하는 원칙이 '성경 말씀이 당신 삶의 전반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그의 규칙이 아닙니다. 빙엄 박사가 말했듯이, 여러 가지가 동등한 수준으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동등하지 않으며, 성경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 세대에 대한 가정을 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복음에 대한 지지자입니다. 저는 건강한 삶의 원칙이 여러 면에서 좋은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복음에 뿌리를 두고 싶습니다. 제 지식과 신분이 복음에 기반하고, 제 모든 행위가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입니다. 네, 이 점에서, '도'의 실천에서 분명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시 태어남과 새 생명의 교리입니다. 저는 아마도... 뭔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이 지속적인 변화의 주요한 주체라고 언급한 예는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것이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를 압박한다면 그가 이를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영적 발전이나 영적 형성은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점이 결여되었다면, 당신의 모든 노력, 당신의 삶의 규칙, 1만 걸음, 규율은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간디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유명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기독교인을 싫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제자 되고 싶어 했지만, 성령의 영향하에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건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입니다.
154kg 데드리프트 성공 문자
설교자는 이번 주에 누군가가 그에게 문자로 154kg 데드리프트를 성공했다고 알려왔던 일을 꺼냅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인상 깊었다고 말하며, 힘이 세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 일화는 건강 트레이너처럼 세속적인 인물이 주는 조언에도 좋은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설교자는 하루 1만 걸음을 걷는 것도 더 나은 삶을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영적 원칙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에 따르면 여러 가치가 같은 수준으로 묶이면서 사람들이 신앙의 실천을 마음대로 고르고 결합할 위험이 생깁니다. 그는 이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3–3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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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생활 원칙'에 대해 다루는 글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 원칙들을 세울 때 종종 세속적인 인물들, 예를 들어 건강 트레이너나 유사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세속적인 건강 트레이너들이 좋은 조언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가 저에게 154kg의 데드리프트를 성공했다고 문자로 알려왔습니다. 네, 정말 인상 깊습니다. 정말 힘이 세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때때로 이러한 원칙들이 종합적이라는 이유로 혼동될 수 있습니다. 매튜, 당신은 삶 속에 분명히 규율이 있을 텐데요.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문제는 '원칙'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습니까? 저는 삶의 원칙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동등한 수준으로 놓고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종종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제 삶의 규칙 중 하나가 성경을 읽는 것이고, 또 하나가 하루에 1만 걸음을 걷는 것이며, 이 모든 지침이 목사나 기독교 저자 같은 영적 지도자로부터 나온다면,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믿는 자로서 1만 걸음을 걷지 못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로서 성경 말씀을 받지 않는 시기, 묵상하지 않는 시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시기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벤, 마크,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이런 상황을 마주치십니까? 사람들이 강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자주 이 책과 존 마크 코머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영적 접근법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벤, 아니요? 코머처럼 말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코머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네, 저는 이 사고방식이 분명히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는 것 같은 사례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20대나 30대의 젊은이들 중 상담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치 영적 형성의 일부분이 심리상담사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죠. 저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특정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저는 그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 있고 그들의 귀를 얻고 있으며, 그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를 제공한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제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단지 서부 버전의 율법주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전 방식을 싫어하고, 새로운 규칙과 원칙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죠. 만약 이 규칙을 따르면 반드시 번영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벤, 우리가 조언과 예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밝은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시로부터 영적 성장과 도전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반드시 모방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코머와 대화하거나 그의 책을 읽을 때, 그가 말하는 원칙이 '성경 말씀이 당신 삶의 전반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그의 규칙이 아닙니다. 빙엄 박사가 말했듯이, 여러 가지가 동등한 수준으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동등하지 않으며, 성경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 세대에 대한 가정을 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복음에 대한 지지자입니다. 저는 건강한 삶의 원칙이 여러 면에서 좋은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복음에 뿌리를 두고 싶습니다. 제 지식과 신분이 복음에 기반하고, 제 모든 행위가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입니다. 네, 이 점에서, '도'의 실천에서 분명히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시 태어남과 새 생명의 교리입니다. 저는 아마도... 뭔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이 지속적인 변화의 주요한 주체라고 언급한 예는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것이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를 압박한다면 그가 이를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영적 발전이나 영적 형성은 돌 같은 마음을 떼어내고 살 같은 마음을 심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점이 결여되었다면, 당신의 모든 노력, 당신의 삶의 규칙, 1만 걸음, 규율은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간디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유명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기독교인을 싫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제자 되고 싶어 했지만, 성령의 영향하에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건 찰스 셰일론의 '예수라면 무엇을 할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경적 주제입니다.
로버트 듀발의 영화 『아포스텔』 장면
설교자는 몇 년 전 본 로버트 듀발 주연의 영화 『아포스텔』을 떠올립니다. 그는 영화의 세부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인공이 트럭에서 내리는 장면을 기억하는데, 그 장면에서 주인공은 '주님, 이끌어 주소서. 내 다음 발을 어디에 둘까요? 다음 단계는 어디인가요?'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모습이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자신이 젊은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느꼈던 충동과 연결합니다. 당시 그는 하나님과 직접, 중개 없이 만나는 경험을 원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충동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질문하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분을 어떻게 아느냐는 데 있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4–4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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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라,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라고 바울이 말했지만,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바라보는 유일한 이유가 되면 문제가 됩니다. 이는 바로 자유주의 기독교의 전개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는 신교나 가톨릭, 다른 어디든 간에, 예수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그분의 실제적 인격과 사역을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렸으니 이 점이 분명해 보이지만, 저는 아직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기독교는 정말로 이 길로 가고 있는 것이죠. 이는 모방과 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윤리는 선택적으로 적용됩니다. 이보다 다른 것들보다 이 윤리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 전체의 핵심은 100% 교리입니다. 특히 복음의 교리입니다. 규칙입니다. 이는 영적 형성의 한 방식이죠. 미스티시즘입니다. 이는 종종 인기를 끄는 주제이며, 때때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저는 몇몇 저자들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저는 헨리 누원의 일일 묵상 웹사이트를 살펴봤습니다. 2026년 9월 16일, 누원의 묵상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의 존재와 떨어지면, 우리는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불의를 해결하거나 폭력을 물리치거나 전쟁을 멈추거나 외로움을 없애는 것만 보게 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중요하며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우리는 엄청난 부담을 느낍니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우리 주변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겠습니다. 틸러 스탠턴은 그의 책 『기도하는 수도사처럼 살며 미친 사람처럼 사는 법』에서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책은 유진 페테르슨이 중간 지점에서 기도하는 것을 따릅니다. 능동태: '나는 행동하는 자이다.' 수동태: '나는... 내가 받는다.' 아닙니다. 간접적 측면에서 우리는 참여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며 간접적 음성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행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여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모든 상호작용은 이 간접적 음성, 참여의 음성에서 일어납니다. 이 두 저자는 모두 미스티시즘적 성향의 기독교 저자입니다. 미스티시즘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방금 읽은 구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미스티시즘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 단어가 때때로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전체적인 인상은, 이는 중개자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하려는 충동, 밀어붙이는 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제안한 두 구절 모두에서 정신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요. 저는 이 구절들 중 일부 표현의 의미가 확실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이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이는 고전적인 미스티시즘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중개자들을 없애고, 이 것들을 덜 중요한 것으로 보며, 직접적인 만남에 집중하자.' 저는 몇 년 전 로버트 듀발이 출연한 영화 『아포스텔』을 봤습니다. 저는 그 영화에 대해 거의 기억이 없어서 아마도 그 영화에 나쁜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추천하지 않지만, 저는 그냥 '알겠네. 대단하네. 알겠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가 트럭에서 내리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가 '주님, 이끌어 주소서. 내 다음 발을 어디에 둘까요? 다음 단계는 어디인가요?'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그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며 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이런 충동을 느꼈습니다. '경험하고 싶어. 하나님과 직접, 중개 없이 만남을 느끼고 싶어.' 저는 이 충동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충동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원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분을 아는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위해 중개자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려 한다면, 성경은 이차적 만남이 되고, 인간 언어도 이차적 만남이 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많은 미스티시즘 저자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영적 삶에서 더 나아가 다른 것들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해에 신클라어 퍼거슨이 쓴 새 책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나왔습니다. 매우 간단하고, 『전체 그리스도』보다 짧습니다. 저는 믿는 자가 영광을 받기 전에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현재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위로가 됩니다.
헨리 누원의 2026년 9월 16일 묵상글
설교자는 헨리 누원의 일일 묵상 웹사이트에 2026년 9월 16일에 실린 글을 인용합니다. 그 글은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의 존재에서 떨어지면 굶주림, 불의, 폭력, 전쟁, 외로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머무르게 되고, 그 결과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글은 이 문제들이 중요하며 기독교인들이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원천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글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답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이 우리 주변을 보게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인용을 미스티시즘적 방향을 보여주는 예로 제시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4–4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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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라,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라고 바울이 말했지만,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바라보는 유일한 이유가 되면 문제가 됩니다. 이는 바로 자유주의 기독교의 전개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는 신교나 가톨릭, 다른 어디든 간에, 예수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그분의 실제적 인격과 사역을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렸으니 이 점이 분명해 보이지만, 저는 아직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기독교는 정말로 이 길로 가고 있는 것이죠. 이는 모방과 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윤리는 선택적으로 적용됩니다. 이보다 다른 것들보다 이 윤리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 전체의 핵심은 100% 교리입니다. 특히 복음의 교리입니다. 규칙입니다. 이는 영적 형성의 한 방식이죠. 미스티시즘입니다. 이는 종종 인기를 끄는 주제이며, 때때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저는 몇몇 저자들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저는 헨리 누원의 일일 묵상 웹사이트를 살펴봤습니다. 2026년 9월 16일, 누원의 묵상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의 존재와 떨어지면, 우리는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불의를 해결하거나 폭력을 물리치거나 전쟁을 멈추거나 외로움을 없애는 것만 보게 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중요하며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우리는 엄청난 부담을 느낍니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우리 주변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겠습니다. 틸러 스탠턴은 그의 책 『기도하는 수도사처럼 살며 미친 사람처럼 사는 법』에서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책은 유진 페테르슨이 중간 지점에서 기도하는 것을 따릅니다. 능동태: '나는 행동하는 자이다.' 수동태: '나는... 내가 받는다.' 아닙니다. 간접적 측면에서 우리는 참여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며 간접적 음성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행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여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모든 상호작용은 이 간접적 음성, 참여의 음성에서 일어납니다. 이 두 저자는 모두 미스티시즘적 성향의 기독교 저자입니다. 미스티시즘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방금 읽은 구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미스티시즘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 단어가 때때로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전체적인 인상은, 이는 중개자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하려는 충동, 밀어붙이는 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제안한 두 구절 모두에서 정신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요. 저는 이 구절들 중 일부 표현의 의미가 확실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만남이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이는 고전적인 미스티시즘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중개자들을 없애고, 이 것들을 덜 중요한 것으로 보며, 직접적인 만남에 집중하자.' 저는 몇 년 전 로버트 듀발이 출연한 영화 『아포스텔』을 봤습니다. 저는 그 영화에 대해 거의 기억이 없어서 아마도 그 영화에 나쁜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추천하지 않지만, 저는 그냥 '알겠네. 대단하네. 알겠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가 트럭에서 내리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가 '주님, 이끌어 주소서. 내 다음 발을 어디에 둘까요? 다음 단계는 어디인가요?'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그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며 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이런 충동을 느꼈습니다. '경험하고 싶어. 하나님과 직접, 중개 없이 만남을 느끼고 싶어.' 저는 이 충동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충동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원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분을 아는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위해 중개자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려 한다면, 성경은 이차적 만남이 되고, 인간 언어도 이차적 만남이 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많은 미스티시즘 저자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영적 삶에서 더 나아가 다른 것들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해에 신클라어 퍼거슨이 쓴 새 책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나왔습니다. 매우 간단하고, 『전체 그리스도』보다 짧습니다. 저는 믿는 자가 영광을 받기 전에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현재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위로가 됩니다.
개가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묻는 비유
설교자는 직장에서 퇴근해 집에 돌아왔을 때 개가 당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묻는 상황을 비유로 듭니다. 그는 그런 질문이 오간다면 사람과 개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말로 주고받는 소통이 관계의 핵심이라는 설교자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약이나 행위 목록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언어적 계시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방식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말씀의 임재성과 권위를 강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례나 성찬 같은 행위의 의미도 말씀으로 설명하셨다고 덧붙입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5–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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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당신도 텍사스 포트워스에 계시나요, 아니면 그것이 목사가 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남부 감리 신학교와 가까워서 많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헨리 블랙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저는 이 세대에서 그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것이고, 저는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남서부 신학교에 어떻게 도착하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제가 잔디를 깎고 있었는데, 갑자기 잔디를 깎는 것을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 나침반을 꺼내어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남부 신학교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가 자라난 교회들이 이러한 작은 충동이나 눈짓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믿는다는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만, 우리의 감각은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해야 할 주요한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이며, 그분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죄를 지지 않는 한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을 모두 회복하실 자유를 기뻐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 즉 신비적인 충동은 우리 교파에서 매우 흔하며, 성경 지대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도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릴게요, 지금 방금 나침반에 대한 비유를 하셨는데, 남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나침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이상한 충동에 의존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시는지 보는 것이 우리가 인도받는 방식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주님께로부터 왔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도 우리의 인도자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세 가지 방식이라고 보입니다. 매튜, 마크, 추가할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벤이 말한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도 일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침반 같은 신비적인 계시나 기타 것들을 기대하고 찾기 시작하면 중요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제 삶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면, 그분께서 제가 인도받는 방식과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단을 통해 제게 인도하신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죠. 그러나 제 역할은 그분께서 계시하신 수단, 즉 의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수단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초자연적인 중재자나 매개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빠지기 시작하면, 즉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 계시하신 은혜의 수단,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보통의 것들이 이차적이고 열등하게 느껴지며, 아마도 덜 바람직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나, 만약 당신이 진정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다른 자극들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주된 문제입니다. 감정에 집중하고 진리에 집중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느끼십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풀이 자라나는 모습이나 밭의 밀, 강물 흐름을 보는 것처럼 우리와 소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떡을 먹으라고 명하셨고, 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말 없이 그 아름다운 상징들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지난 세기 동안 일부 바르티안들은 언어적 계시를 개인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이고, 무감정적이고, 차가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언어적 소통은 관계의 핵심입니다. 저는 종종 이 비유를 사용합니다. 오늘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개가 당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개와의 관계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로서 말씀의 임재성과 임재성 말씀의 권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단지 계약이나 일련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나 성찬례 같은 제스처를 하실 때도, 그 의미를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음. 구약을 생각해보면, 사울에게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가 무엇에 의지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외부 수단에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지 않고 외부 수단을 사용해 주님을 부르려는 위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혼란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한 번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계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CJ 마하니가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이 영적 은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초자연적인 은사, 즉 말씀의 은사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셨습니다.
잔디를 깎다 나침반을 꺼낸 남자의 이야기
설교자는 몇 년 전 남서부 신학교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사람은 잔디를 깎다가 갑자기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 나침반을 확인했으며, 남서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남부 신학교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자라난 교회가 작은 충동이나 눈짓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믿는 사례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우리의 감각은 속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주된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이며,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 모두를 회복하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신비적 충동이 자신의 교파와 이 도시에서도 흔하다고 말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5–5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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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당신도 텍사스 포트워스에 계시나요, 아니면 그것이 목사가 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남부 감리 신학교와 가까워서 많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헨리 블랙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저는 이 세대에서 그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것이고, 저는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남서부 신학교에 어떻게 도착하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제가 잔디를 깎고 있었는데, 갑자기 잔디를 깎는 것을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 나침반을 꺼내어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남부 신학교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가 자라난 교회들이 이러한 작은 충동이나 눈짓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믿는다는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만, 우리의 감각은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해야 할 주요한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이며, 그분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죄를 지지 않는 한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을 모두 회복하실 자유를 기뻐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 즉 신비적인 충동은 우리 교파에서 매우 흔하며, 성경 지대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도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릴게요, 지금 방금 나침반에 대한 비유를 하셨는데, 남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나침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이상한 충동에 의존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시는지 보는 것이 우리가 인도받는 방식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주님께로부터 왔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도 우리의 인도자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세 가지 방식이라고 보입니다. 매튜, 마크, 추가할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벤이 말한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도 일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침반 같은 신비적인 계시나 기타 것들을 기대하고 찾기 시작하면 중요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제 삶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면, 그분께서 제가 인도받는 방식과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단을 통해 제게 인도하신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죠. 그러나 제 역할은 그분께서 계시하신 수단, 즉 의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수단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초자연적인 중재자나 매개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빠지기 시작하면, 즉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 계시하신 은혜의 수단,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보통의 것들이 이차적이고 열등하게 느껴지며, 아마도 덜 바람직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나, 만약 당신이 진정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다른 자극들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주된 문제입니다. 감정에 집중하고 진리에 집중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느끼십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풀이 자라나는 모습이나 밭의 밀, 강물 흐름을 보는 것처럼 우리와 소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떡을 먹으라고 명하셨고, 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말 없이 그 아름다운 상징들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지난 세기 동안 일부 바르티안들은 언어적 계시를 개인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이고, 무감정적이고, 차가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언어적 소통은 관계의 핵심입니다. 저는 종종 이 비유를 사용합니다. 오늘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개가 당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개와의 관계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로서 말씀의 임재성과 임재성 말씀의 권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단지 계약이나 일련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나 성찬례 같은 제스처를 하실 때도, 그 의미를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음. 구약을 생각해보면, 사울에게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가 무엇에 의지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외부 수단에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지 않고 외부 수단을 사용해 주님을 부르려는 위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혼란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한 번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계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CJ 마하니가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이 영적 은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초자연적인 은사, 즉 말씀의 은사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셨습니다.
사울이 외부 수단에 의지한 구약 이야기
설교자는 구약의 사울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그에 따르면 사울에게는 제사장도 없었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설교자는 그런 상황에서 사울이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외부 수단에 의지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혼란이 일어난 사례로 들며, 이 이야기에서 나타난 문제를 짚습니다. 그는 이를 말씀을 믿지 않고 외부 수단을 사용해 주님을 부르려는 위험과 연결합니다. 이 예화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말씀 바깥의 방법에 기대는 것을 경계하는 설교자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설교자는 그 위험이 신비적 충동과 맞닿아 있다고 보며, 말씀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5–5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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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당신도 텍사스 포트워스에 계시나요, 아니면 그것이 목사가 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남부 감리 신학교와 가까워서 많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헨리 블랙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저는 이 세대에서 그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것이고, 저는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남서부 신학교에 어떻게 도착하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제가 잔디를 깎고 있었는데, 갑자기 잔디를 깎는 것을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 나침반을 꺼내어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남부 신학교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가 자라난 교회들이 이러한 작은 충동이나 눈짓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믿는다는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만, 우리의 감각은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해야 할 주요한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이며, 그분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죄를 지지 않는 한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을 모두 회복하실 자유를 기뻐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 즉 신비적인 충동은 우리 교파에서 매우 흔하며, 성경 지대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도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릴게요, 지금 방금 나침반에 대한 비유를 하셨는데, 남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나침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이상한 충동에 의존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시는지 보는 것이 우리가 인도받는 방식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주님께로부터 왔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도 우리의 인도자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세 가지 방식이라고 보입니다. 매튜, 마크, 추가할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벤이 말한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도 일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침반 같은 신비적인 계시나 기타 것들을 기대하고 찾기 시작하면 중요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제 삶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면, 그분께서 제가 인도받는 방식과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단을 통해 제게 인도하신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죠. 그러나 제 역할은 그분께서 계시하신 수단, 즉 의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수단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초자연적인 중재자나 매개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빠지기 시작하면, 즉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 계시하신 은혜의 수단,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보통의 것들이 이차적이고 열등하게 느껴지며, 아마도 덜 바람직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나, 만약 당신이 진정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다른 자극들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주된 문제입니다. 감정에 집중하고 진리에 집중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느끼십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풀이 자라나는 모습이나 밭의 밀, 강물 흐름을 보는 것처럼 우리와 소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떡을 먹으라고 명하셨고, 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말 없이 그 아름다운 상징들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지난 세기 동안 일부 바르티안들은 언어적 계시를 개인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이고, 무감정적이고, 차가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언어적 소통은 관계의 핵심입니다. 저는 종종 이 비유를 사용합니다. 오늘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개가 당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개와의 관계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로서 말씀의 임재성과 임재성 말씀의 권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단지 계약이나 일련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나 성찬례 같은 제스처를 하실 때도, 그 의미를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음. 구약을 생각해보면, 사울에게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가 무엇에 의지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외부 수단에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지 않고 외부 수단을 사용해 주님을 부르려는 위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혼란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한 번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계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CJ 마하니가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이 영적 은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초자연적인 은사, 즉 말씀의 은사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셨습니다.
CJ 마하니의 은사 경고 기억
설교자는 CJ 마하니가 영적 은사, 특히 초자연적 은사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셨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설교자는 마하니가 그때 말씀의 은사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마하니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단순히 경험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말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마하니는 이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마하니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은 말씀과 기도에 있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기도가 참으로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기억을 통해 경험에 대한 갈망을 말씀과 기도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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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당신도 텍사스 포트워스에 계시나요, 아니면 그것이 목사가 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남부 감리 신학교와 가까워서 많은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헨리 블랙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저는 이 세대에서 그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것이고, 저는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남서부 신학교에 어떻게 도착하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제가 잔디를 깎고 있었는데, 갑자기 잔디를 깎는 것을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 나침반을 꺼내어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남부 신학교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가 자라난 교회들이 이러한 작은 충동이나 눈짓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믿는다는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만, 우리의 감각은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해야 할 주요한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이며, 그분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죄를 지지 않는 한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을 모두 회복하실 자유를 기뻐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 즉 신비적인 충동은 우리 교파에서 매우 흔하며, 성경 지대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도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릴게요, 지금 방금 나침반에 대한 비유를 하셨는데, 남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나침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이상한 충동에 의존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시는지 보는 것이 우리가 인도받는 방식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주님께로부터 왔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도 우리의 인도자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세 가지 방식이라고 보입니다. 매튜, 마크, 추가할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벤이 말한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도 일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침반 같은 신비적인 계시나 기타 것들을 기대하고 찾기 시작하면 중요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제 삶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면, 그분께서 제가 인도받는 방식과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단을 통해 제게 인도하신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죠. 그러나 제 역할은 그분께서 계시하신 수단, 즉 의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수단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초자연적인 중재자나 매개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빠지기 시작하면, 즉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 계시하신 은혜의 수단,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보통의 것들이 이차적이고 열등하게 느껴지며, 아마도 덜 바람직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나, 만약 당신이 진정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다른 자극들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주된 문제입니다. 감정에 집중하고 진리에 집중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느끼십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풀이 자라나는 모습이나 밭의 밀, 강물 흐름을 보는 것처럼 우리와 소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떡을 먹으라고 명하셨고, 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말 없이 그 아름다운 상징들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지난 세기 동안 일부 바르티안들은 언어적 계시를 개인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이고, 무감정적이고, 차가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언어적 소통은 관계의 핵심입니다. 저는 종종 이 비유를 사용합니다. 오늘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개가 당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개와의 관계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로서 말씀의 임재성과 임재성 말씀의 권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단지 계약이나 일련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나 성찬례 같은 제스처를 하실 때도, 그 의미를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음. 구약을 생각해보면, 사울에게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가 무엇에 의지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외부 수단에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지 않고 외부 수단을 사용해 주님을 부르려는 위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혼란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한 번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계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CJ 마하니가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이 영적 은사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초자연적인 은사, 즉 말씀의 은사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그분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은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참으로 좋습니다. 응. 이는 마크가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크는 종종 우리가 지금은 귀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의 시대가 아닌 귀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마태 목사가 말씀하신 대로, 귀의 시대에 성경의 영광과 개인적인 성격을 약화시키거나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을 그분 그대로 보게 될 것을 믿고, 영광에서 또 다른 영광으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그때는 정말 놀라울 것입니다. 정말 놀라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이미 매우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완전한 계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다른 몇 가지 길을 논의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동방 정교회에 대해 말하려고 했습니다. 동방 정교회에는 많은 신비주의가 있으며, 제가 읽은 책에서 직접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임스 스미스와 리처드 포스터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건너뛰고 마태복음에 기반한 영적 형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경이 사람 속에서 영혼을 형성하는 방식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거의 기계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제가 시도하는 일 중 하나는, "영적 형성"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표현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를 형성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해 왔으며,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 용어가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 형성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용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용어를 회복시키려고 하고, 개혁주의적 접근 방식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솔직히 이 용어는 너무 흔하며 신학교 교육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이 용어가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성경적 현실을 잘 포착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에서 이 용어를 의식적인 과정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며 떨며 구원을 이루는 방식, 우리가 부름받은 일들을, 우리가 사용해야 할 은혜의 수단들을, 우리가 추구하고 실행해야 할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영적 형성을 구원의 확장 개념인 성화와 구분하고자 합니다. 저는 성화가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화에 사용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피하고 싶은 일들까지 포함합니다. 만약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차 사고로 죽는다면, 로마서 8장 28절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이 비극을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영적 형성은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고 실행해야 할 일들을 설명하는 데 유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용해야 할 수단들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로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하며,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 책의 핵심이며, "개혁의 삼각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삼각형이라는 표현을 도입한 이유는, 이 세 가지가 동전의 세 면처럼 하나의 실체의 여러 측면임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하나의 실체의 측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통해 우리를 형성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났고, 성령이 활동하고 계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수단들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네, 성경, 묵상, 기도가 바로 당신의 삼각형입니다. 다음에는 자기 평가에 대한 여러 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야는 자기 평가, 자연세계, 그리스도인 관계로 넓어집니다. 저는 자연세계에 대한 장이 약간 예상 밖이라고 생각합니다. 퀘이커들은 자연세계와 하나님과의 교통에 대해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요? 저는 그 구절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저는 개혁주의 전통이 자연세계에 대해 놀랄 만큼 흥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5장 에녹과 존 플라벨의 묵상
설교자는 17세기 장로교 청교도 목사 존 플라벨을 소개합니다. 플라벨은 성경에 나오는 대묵상자들을 언급했는데, 시편의 다윗과 자신에게 계시된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한 마리아가 그 예였습니다. 설교자는 플라벨이 에녹도 언급했다고 말하며, 이는 다소 뜻밖의 인물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플라벨이 인용한 본문은 창세기 5장 24절로,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내용입니다. 설교자는 플라벨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일을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대가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함께 걸으려면 그분의 약속을 깊이 생각하고 내면화하며 적용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말씀 사역의 중심성을 아름답게 설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은 일이 하나님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과 거의 같다고 정리합니다.
매튜 빈엄 · 2026-10-20
설교 내 7–7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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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가진 이미지는 아마도 그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한 가르뱅이 시편 104편에 대한 주석을 읽어보면, 저는 그의 일부 주장을 동의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교회에서 그의 말을 하게 된다면 약간 긴장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끔은 그의 말이 자연주의에 가까운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그런 의미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튜, 당신은 요한 가르뱅이 자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록으로 남기자면, 저는 그가 자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매튜 빈엄은 요한 가르뱅이 자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명입니다. 하지만 그는 몇 가지 말을 했는데, 저는 만약 제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옷처럼 입고 계신다고 말한다면, 저는 쉽게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점에서 매우 강조합니다. 그리고 저가 책에서 말하려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의 삼각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기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입니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자기 성찰은 어느 정도 이러한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자연을 본다고 해서, 다시 태어난 자라면 성경을 통해, 회개된 마음과 열린 눈으로 창조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저는 이미 성경에서 알고 있는 것을 묵상하고, 이제는 창조주와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모르는 분이 아니라, 제가 아는 분이 되시고, 저는 그분의 일을 진정한 그분의 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태어남을 전제합니다. 다시 태어남의 교리는 정신적 형성에 관한 많은 저서에서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제임스 K.A. 스미스를 언급했습니다. 그의 책에도 다시 태어남의 교리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를 들어, 올바른 예배와 올바른 습관을 단순히 실천하면 마음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정도 규칙처럼 작동합니다. 외부 구조에 의존하여 습관적으로 사랑을 바꾸고, 사랑을 변화시킨다고 믿는 것입니다. 저는 이가 철학적으로 물질주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끔은 그 방향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목사님들께 말씀으로 생명을 가져다주는 충분성에 신뢰하도록 이끌어 주는 마지막 격려를 단 한 가지로 드린다면, 그들은 예배, 신비주의, 훈련을 찾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충분함을 원합니다. 어떤 조언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종종 우리가 종교개혁의 근본에 뿌리를 둔 신앙주의적 신앙과 경건의 단순함에 대해 약간 수치스럽게 느끼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종종 그들이 로마를 만났을 때 그들이 제공하는 더 많은 영성을 얼마나 인상 깊게 여겼는지 말합니다. 실제로 저는 한 가톨릭 신자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게 더 많은 종교라고 느꼈습니다. 더 많은 선택지, 더 많은 도구, 더 많은 축일, 더 많은 것들이 있었고, 그게 복잡하고 매력적이며 흥미진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종종 우리가 약간 수줍어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요? 그게 다라고요? 성경을 읽고 매일 기도하면 자라납니다? 자라납니다? 자라납니다?' 이는 제가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입니다. 저는 말씀 자체가 단순해서 가장 어린 신자라도 쉽게 이해하고 빠르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도 있어서 가장 성숙한 성도들도 평생 동안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17세기 프레스비테리안 청교 목사인 존 발을 좋아합니다. 그는 성경의 대묵상자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몇몇 인물을 언급했는데, 시편 속 다윗이나, 그녀가 자신에게 계시된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한 마리아를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에noch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에녹, 그렇군요. 창세기 5장, 에녹에 대해 잘 모르겠는데, 에녹이 묵상했다고 되어 있나요?'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가 인용한 성경은 창세기 5:24입니다. 거기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발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에녹이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대가 중 하나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진정으로 함께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반영하고 내면화하고 적용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가 말씀 사역의 중심성에 대한 아름다운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