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5 / 32쪽 · 한 쪽 20개
철근 콘크리트의 보강 비유
설교자는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보강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는 시대에 산다고 말하며, 철근 콘크리트를 예로 듭니다. 콘크리트는 매우 강하지만, 거기에 철근을 넣으면 더욱 강해집니다. 거대한 건물을 세울 때에는 그 무게와 그 안에 들어갈 모든 것을 지탱하고 떠받칠 보강이 필요합니다. 설교자는 이 원리를 그리스도인의 속사람에 적용합니다. 여러분과 설교자가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하게 보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임을 깨닫고 그것을 사모하며,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강하게 해 주시기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실 것이라고 맺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57–57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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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교리를 여러분에게 분명히 설명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강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콘크리트를 보강하지 않습니까? 철근 콘크리트입니다. 콘크리트는 매우 강합니다. 거기에 철근을 넣으면 더욱 강해집니다. 거대한 건물을 세울 때에는 그 무게와 그 안에 들어갈 모든 것을 지탱하고 떠받칠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철근으로 보강한 콘크리트입니다. 이것도 보강하고 저것도 보강합니다. 원리는 그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세 끼 밥을 먹는 것처럼
설교자는 기도가 믿음이 어느 정도 자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래 살았다고 밥을 끊지 않고, 나이가 들어도 세 끼를 꼭 챙겨 먹듯이, 예수님과 아무리 친하고 오래 믿었으며 믿음이 좋다 해도 기도는 호흡처럼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기도를 한두 번의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일상으로 이해하라고 권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여 나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성도들의 삶과 온누리교회가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6–6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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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누구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다 할지라도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예요. 여러분, 오래 살았다고 밥 안 먹어요? 이제 밥 안 먹어도 되십니까? 아니에요. 나이가 들어도 밥 세 끼 꼭 잡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아무리 친하고 아무리 오래 믿고 우리가 믿음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기도는 호흡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을 호흡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삶에 내가 동참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라는 거예요. 주여, 나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온누리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복잡한 빌딩 한쪽에서 성경을 읽던 여사원
설교자는 어느 빌딩을 방문했을 때의 장면을 전합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분주하게 오가는 복잡한 틈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한 여사원이 의자 한쪽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 때문에 복잡하던 빌딩 전체가 갑자기 기도원처럼 느껴졌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 자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는데,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통해 기도의 자리가 반드시 조용한 예배당이나 특별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버스 안이든 집안이든 복잡한 일터든 상관없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흔들리고 불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승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기도가 습관이 된다면 그곳이 각자의 겟세마네 동산이 되리라고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18–19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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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번은 어느 빌딩에 갔는데, 점심시간에 다들 식사하느라고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갔다 하는데 제가 그 복잡한 틈을 가다가 발걸음을 멈춘 적이 하나 있어요. 어느 여사원 같아요. 여사원이 그 복잡한 틈에 의자 한쪽에 이렇게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에 그 복잡한 빌딩은 갑자기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아주 기도원이 돼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가지를 못하고 옆에서 이렇게 봤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버스 속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집안이면 어떻습니까? 복잡한 일터면 어떻습니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내가 흔들리는 이 마음을 하나님, 붙잡아 주십시오. 불안한 이 마음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습관이라면 그것이 여러분의 겟세마네 동산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열두 살 예수님과 부모의 예루살렘 방문
설교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두 살 예수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헤어지게 되었고, 부모는 아들을 잃어버린 줄 모르고 한참을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부모님이 섭섭해하며 날 이렇게 찾게 만드냐고 말하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느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대답을 부모님이 한 방 맞은 장면으로 표현하며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빌려 청중이 새벽기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 교회에 오면 틀림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또한 사는 곳을 기도의 동산으로 만들라고 권하며, 일이 있든 없든 교회는 일이 없어도 오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아버지 집에 머무셨던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자연스럽게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20–2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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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는 예수가 어디 있는지 잘 알았어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누가복음에 보면 부모님과 같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예수님하고 헤어졌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부모들이 굉장히 황당하게 자기 아들을 찾다 찾다 나중에 마지막으로 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찾았어요. 그래서 그 부모님들이 예수님한테 좀 섭섭해하며 “아니, 이렇게 날 찾게 만드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 기억하세요. 누가복음 2장 49절 말씀 한번 자막을 통해서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부모님이 한 방 맞은 거예요. 아니, 왜 날 찾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나는 여러분이 새벽기도 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나는 여러분이 교회 오면 만날 수 있는, 저 사람 몇 부 예배 가면 딱 만난다, 저건 틀림없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사는 곳을 기도 동산으로 만드십시오. 여러분이 일이 있건 없건, 교회라는 데는 일이 없어도 오는 데가 교회입니다. “당신 교회 왜 왔어?” “그냥 왔어요.”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왔어요.”
서울 길에 교회에 들르시던 아버님
설교자는 시골에 사셨던 돌아가신 아버님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버님은 시골에 사셨고, 서울에 올라가실 때면 꼭 교회에 들렀다가 기차를 타셨습니다. 또 서울에서 돌아오셔서 집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고 집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 말을 하면 꼭 아버님 생각이 난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모습을 떠올리며 청중에게 할 일이 없으면 교회 담벼락에 기대어서라도 기도하고 가라고 권합니다. 설교자는 교회에 가는 일이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그냥 내 삶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버님은 가실 때와 오실 때마다 교회를 먼저 찾았던 분으로 소개되며, 설교자는 그 모습을 교회를 삶의 자리로 삼는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22–2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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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 하면 꼭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 생각이 나요. 우리 아버님은 시골에 사셨는데 서울에 올라갈 때 꼭 교회 들렀다 기차 타시고, 돌아오면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먼저 교회 오셔서 기도하고 오시고. 여러분, 할 일 없으면 교회 담벼락 대고 기도하고 가세요. 그냥 이게 내 삶이어야 돼.
체포 직전 베드로의 칼부림
설교자는 예수님이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베드로가 저지른 일을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는데, 그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한쪽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설교자는 성경이 이 종의 이름이 말고라는 것과 오른쪽 귀였다는 것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당시에 매우 충격적이고 상징적인 일이었기에 자세히 남겨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칼이 투구에 맞고 비껴 나가 귀가 잘렸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장면을 상상하며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베드로를 충동적이고 혈기가 많으며 인간적인 우리와 똑같은 제자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혈기가 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준비하지 않았던 말을 하게 된다고 적용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39–40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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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런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옆에 있던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칼을 빼서, 오늘 10절에 보면 베드로가 열심원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이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가지고 귀가 하나. 그런데 성경이 재미있어요. 오른쪽 귀라고, 또 왼쪽 오른쪽 구분했어요. 그리고 종의 이름이 말고라는 이름까지 다 갖다 붙여 줬어요. 그런데 이 사건이 굉장히 그 당시에 충격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세히 기록한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는 미워할 수 없는 우리의 사랑하는 베드로, 충동적이고 혈기가 많고 인간적이고 그래도 참 나와 똑같은 이 베드로를 여기서 우리가 만나요. 예수님이 체포 직전에 가니까 베드로가 칼을 들어서 말고의 귀를 쳤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 안 하면 혈기가 납니다. 기도 안 하면 충동적 행동을 합니다. 기도 안 하면 준비하지 않았던 말을 합니다. 이게 베드로예요.
칼은 칼집에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칼은 칼집에 있어야 한다는 비유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칼은 예리하지만 칼집에서 나오면 위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리더십에서 칼과 칼집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사람이 칼을 가지고 있을 때 항상 칼집에 꽂고 다니라고 권합니다. 이 비유는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벤 장면과 연결됩니다. 설교자는 예수님께서 칼을 다시 집어넣으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던 장면을 함께 전합니다. 설교자는 힘이나 권위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적용하여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힘을 절제하는 리더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하용조 · 2026-10-26
설교 내 43–4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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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어디에 있어야 돼요? 칼집에 있어야 돼요. 그게 리더십에서 칼과 칼집이라는 말이 중요한 거예요. 칼은 예리하지만 칼이 칼집에서 나오면 위험하고 다칩니다. 사람이 칼을 가지고 있을 때 항상 칼집에 꽂고 다녀라. 예수님이 “칼을 다시, 검을 집어넣어라.” 예수님이 이걸 보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했어요.
바로와 홍해를 통과한 이스라엘 승리 회상
설교자는 시편 68편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큰 승리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이 승리는 바로와 그의 군대를 이기고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통과하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었으며, 모든 것이 그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여호와, 곧 야와의 영광과 탁월하심과 능력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이 시편 본문의 역사적 뿌리임을 짚으며, 승리의 주인공이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먼저 말한 뒤, 설교자는 바울이 바로 이 여호와에 관하여 '올라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는 부분으로 논의를 이어 갑니다. 이를 통해 구약의 찬양이 가리키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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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논증은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68편에서 여러분은 여호와께 드리는 위대한 찬송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 놀라운 승리를 주셨고 다윗은 그 승리를 기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바로와 그의 군대를 이기는 그 큰 승리를 주시고 홍해를 통과하게 하신 분도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여전히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여호와, 곧 야와 그분의 영광과 탁월하심과 능력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호와에 관하여 그분이 ‘올라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옥에 있는 영들과 노아 시대 홍수
설교자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을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 노아 시대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뜻으로 보는 해석을 비판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들에게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셈인데, 설교자는 왜 그들만 특별히 선택되었는지 설명할 근거가 없다고 묻습니다. 대신 설교자는 베드로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이 심판의 때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풀이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의 길이었듯,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오늘날의 방주라고 적용합니다. 또한 인류 역사에는 홍수와 주님의 재림 때의 최후 심판이라는 두 큰 심판이 있으며, 지금이 두 번째 심판 시대라는 평행 관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노아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강조하며, 이 본문으로 지옥 전도설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26–36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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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영으로 …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오직 한 가지 뜻만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 뜻이란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한 이 사람들에게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두 번째 기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 이후 지옥에서 두 번째 기회와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땅 아래 낮은 곳’이라는 표현에 관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베드로전서 3장 19절 등과 같은 내용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곳으로 가셔서 옥에 있는 이 영들에게 전도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거기서 하신 일은 그들에게 믿을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내려가셔서 지옥에 거주하고 갇혀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의 눈부신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저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어떻게 이기셨는지, 자신이 만유의 주님이심을 그들에게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주장들이 교회의 긴 역사 속에서 때때로 제시되었습니다. 저는 설교와 가르침의 사명이란 이런 문제들을 직면하여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건너뛰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이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 실제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어느 뜻도 갖고 있지 않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땅 아래 낮은 곳’이라는 표현의 뜻은 단지 이 땅 자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 자체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시편 139편 15절의 말씀을 보시면, 그것이 분명히 이 땅을 뜻한다는 데 동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존재하게 되고, 이 땅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일입니다. 비록 ‘땅의 깊은 곳’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만 말입니다. 시편 63편 9절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어쩌면 ‘무덤’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매우 불확실합니다.
물론 결정적인 문제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해석입니다. 제가 이것을 철저하게 다룰 시간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만족스럽게 보이고, 사람들을 수많은 어려움으로 이끄는 이 모든 추측을 피할 수 있는 해석을 여러분 앞에 제시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한 그 특정한 사람들에게 가셔서 전도하셨다는 말입니까? 저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것이 해답일 수 없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왜 그들에게 다른 죄인들보다 특별히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까? 왜 그들만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왜 그 특정한 무리에게만 이 복음이 다시 제시되었습니까?
홍수 때의 그 사람들 이전에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집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갑자기 죽임을 당하고 멸망한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왜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들만 따로 선택됩니까?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아무런 답도 없습니다. 죄인으로서 그들의 처지는 다른 모든 죄인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사도 베드로는 그런 말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그는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은 지금 심판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어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다가오는 심판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알려 줍니다. 뒤따르는 절들에서 그것을 언급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방주를 통해 구원받습니다. 곧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상황은 홍수 직전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성령 안에서 나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경고하시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홍수 전에도 성령 안에서 노아를 통해 정확히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두 번의 큰 심판만 있습니다. 첫째는 홍수였습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며 최후의 심판이 임할 때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큰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여기 놀라운 평행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두 번째 큰 심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앞선 첫 번째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 평행 관계는 완전합니다. 그분은 지금 성령 안에서 사도들을 통해 전파하십니다. 그때에도 성령 안에서 노아를 통해 그 사람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 본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남습니다. 왜 모든 죄인에게가 아니라 그 특정한 죄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졌습니까? 왜 그들을 특별히 우대합니까? 왜 그들에게 특별한 기회가 주어집니까? 제게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등 다른 심판받은 자들과의 비교
설교자는 홍수 때 멸망한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다시 주어졌다는 해석을 소돔과 고모라 등 다른 심판받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논박합니다. 홍수 이전과 이후에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나 갑자기 멸망한 수많은 사람에게는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그렇다면 왜 노아 시대의 이들만 따로 선택되었는지 답이 없다고 말합니다. 죄인으로서 그들의 처지는 다른 모든 죄인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집단에게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봅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이 본문 해석에서 중요한 검증 지점이라고 강조하며, 추측보다 성경 본문에 근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33–3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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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때의 그 사람들 이전에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집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갑자기 죽임을 당하고 멸망한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왜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들만 따로 선택됩니까?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아무런 답도 없습니다. 죄인으로서 그들의 처지는 다른 모든 죄인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 하늘에서 내려오신 인자
설교자는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살핍니다. 말씀의 핵심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여기서도 올라감과 내려옴이 대조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지옥으로 내려가신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으로 내려오신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주님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여전히 하늘에 있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다고 풀어 전하며, 같은 대조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내려오셨던 그'도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신 강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이 구절이 성육신의 의미를 함께 보여 준다고 덧붙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40–40문단 · 예화 4
본문 발췌 보기
다음 표현들을 들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도 올라가심과 내려오심,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이 나옵니다. 이것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으로 내려오신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며 이 땅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비밀을 듣기 위해 하늘에 올라갔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여전히 하늘에 있다.” 같은 대조가 나타납니다.
천사들의 찬양과 영광의 왕의 강림 노래
설교자는 성육신을 노래한 찬송 가사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찬송은 영광의 왕께서 한때 이 땅에 거하시려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를 좋아한다고 노래합니다. 설교자는 그분이 하늘 궁정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말하며, 사도의 '먼저 내려오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라는 표현이 이 일을 되짚어 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죄와 수치였을 때 둘째 아담이 싸움과 전투를 위해 오셨다는 찬송의 고백을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내려오신 일이 원수를 상대하시고 포로 상태를 처리하시기 위한 전제였다고 풀이합니다. 그래서 청중에게 하늘에서 내려오신 주님을 묵상하도록 권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54–54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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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음성이 전하는 그 이야기를 전하기 좋아하네. 영광의 왕께서 한때 이 땅에 거하시려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를.” 그분은 하늘 궁정을 떠나셨습니다. “먼저 내려오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저는 사도의 이 표현이 좋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그 일을 되짚어 보라고 말합니다. 성육신입니다. “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여! 모든 것이 죄와 수치였을 때, 둘째 아담이 싸움과 전투를 위해 오셨도다.” 먼저 내려오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내려오셔서 원수를 상대하시고 그 포로 상태를 처리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오셨습니다. 내려오셨습니다.
헤롯의 살해 위협과 열두 살 성전 방문
설교자는 예수님이 평생 싸움 가운데 계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유년기의 사건을 듭니다. 아기였을 때 헤롯 왕이 그분을 죽이려 했으며, 설교자는 마귀가 헤롯을 이용하여 그분을 해치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열두 살 때 성전에 계셨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부모는 그분이 뒤에 남아 계신 줄 모르고 이틀 길을 간 뒤에야 그분을 찾았습니다. 부모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답하셨는데,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설교자는 주님이 아버지의 일을 아셨으면서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순종이 구속을 위한 싸움의 일부라고 풀이하며, 그분의 생애 전체를 싸움과 전투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57–58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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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분도 기억하듯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그분은 평생에 걸쳐 참으로 순종하셨지 않습니까? 그분은 싸우러 오셨습니다. 아기였을 때에도 헤롯 왕이 그분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귀가 헤롯 왕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그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분은 싸움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이 전투입니다. 둘째 아담께서 싸움과 전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 아기에게도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마귀가 그분을 시험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열두 살에 성전에 계셨던 일을 기억하십시오. 부모는 그분이 뒤에 남아 계신 줄 몰랐습니다. 이틀 길을 간 뒤에야 그분이 안 계신 것을 알고 돌아갑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아버지의 일을 아셨지만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 싸움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설교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맞이하신 무서운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분이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백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그분의 순종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과정의 절정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순종이 승리를 향한 길이었음을 청중이 기억하도록 권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60–60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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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순종하셨고, 그 순종은 계속 이어집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동산에서 그 무서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일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으로 가셨습니까?
무덤에서 일어나신 부활과 사망의 정복
설교자는 예수님이 죽으셔서 장사되시고, 사람들이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았던 장면을 떠올립니다. 원수는 의기양양했고 모든 일이 잘된 것처럼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시고 무덤을 이기셔서 승리 가운데 일어나셨습니다. 설교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청중이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일을 패배가 아닌 승리의 과정으로 이해하도록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63–63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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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죽으시고 장사되십니다. 사람들이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습니다. 원수는 의기양양하고 모든 일이 잘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시고 무덤을 이겨 승리 가운데 일어나셨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그분은 이미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분은 마지막 원수까지 정복하셨습니다. 그 모든 원수를 하나하나 정복하셨습니다. 인간을 노예로 삼고 속박해 온 모든 원수가 패주하고 패배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봉인된 두루마리와 유다 지파의 사자
설교자는 요한계시록 5장의 장면을 소개합니다. 역사의 책인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었지만, 그 인을 떼어 낼 만큼 강한 사람이 하늘에도 땅에도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때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를 펴시리라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그 사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곧 내려오셨던 그분이라고 풀이합니다.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지고 그분이 인을 떼신다는 점에서 그분은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설교자는 그분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모든 원수가 발판이 되기까지 기다리신다고 덧붙입니다. 그래서 창조 세계와 역사, 만물의 주님이심을 강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6
설교 내 66–66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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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펴 보십시오. 5장으로 가 보십시오. 거기에 울며 탄식하는 일이 있습니다.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역사의 책입니다. 그 인을 떼어 낼 만큼 강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를 다스릴 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를 펴시리라.” 유다 지파의 사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내려오셨던 그분께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충분히 크신 분이며 충분히 위대하신 분입니다.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지고 그분께서 인을 떼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모든 원수가 자기 발판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창조 세계의 주님, 역사의 주님, 만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 목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목소리 알아듣기
설교자는 오늘 저녁 청중이 그리스도의 양 떼에 속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 답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리와 대학 교정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외침 가운데 주의를 단번에 사로잡는 목소리는 한둘뿐이고, 그중 아버지의 목소리라고 알아듣는 목소리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목소리를 듣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듣는 방식과 다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아듣는 사람도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합니다. 설교자는 그 응답이 곧 자신이 그분께 속해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적용합니다. 이 예화는 익숙한 목소리를 구별하는 가정의 경험을 통해 영적인 분별을 쉽게 설명하는 데 쓰였습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7–7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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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여러분이 어떻게 그 양 떼의 일원인지 알 수 있는지 궁금하십니까? 그분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을 생각하면 이것을 이해하시겠지요? 거리나 대학 교정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외침 가운데 여러분의 주의를 단번에 사로잡는 목소리는 한둘뿐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러분의 아버지 목소리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 목소리를 듣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듣는 방식과 다를 것입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그분께 속해 있음을 드러냅니다.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과 그가 떠난 장면
설교자는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는지 냉소하는 사람이었는지를 묻습니다. 그 질문의 어조를 들을 수 있다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설교자는 두 가지 말투를 상상해 봅니다. 하나는 진지하게 알고 싶어 하는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은 정치가이니 진리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듯한 냉소적 목소리입니다. 설교자는 빌라도가 진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질문을 던진 뒤 몸을 돌려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진리를 세웠다고 말씀하신 뒤에도, 빌라도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떠나는 모습입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사람들도 진리를 묻기보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며 기독교가 참된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적용합니다. 그는 빌라도가 이 문제를 무시하고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9–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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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떠오르는 질문은, 아마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단순히 이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질문을 할 때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냉소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목소리 어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녹음된 것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조가 이 질문에 답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 그것을 알고 싶구나. 진리가 무엇이냐?” 아니면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허, 진리가 무엇이냐고? 진리? 나는 정치가야. 내게 진리 이야기는 하지 마라. 내 주위에는 이 군인들이 있어. 나는 그들의 급여표를 작성하고, 그들은 나를 위해 근무 시간표를 작성하지. 진리 이야기는 하지 마라. 진리라고?”
빌라도가 진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다시 말해, 그가 몸을 돌려 나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며, 나는 왕이고, 진리를 세웠으며,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진리를 듣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아, 그래, 진리? 진리가 뭔데? 잠깐 기다려. 곧 돌아오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사람들이 모두 둘러앉아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참된가?”라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집에 앉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자기 삶에 관련이 있는지는 궁금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된지는 묻지 않습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도 없다.” 저는 빌라도가 이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롯과 예수님의 만남
설교자는 누가복음 23장을 근거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그분을 헤롯에게 보낸 일을 전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며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 알고 그렇게 했다고 기록됩니다. 설교자는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고, 그분이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교자는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헤롯의 마음을 아셨고, 그의 양심이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마가복음 6장에서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크게 번민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던 모습을 근거로 함께 언급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헤롯의 태도를, 준비가 되면 예수님께 질문하겠다고 미루는 오늘날 사람들의 태도와 견줍니다. 준비될 때까지 그분이 밖에서 기다리실 것이냐고 물으며, 그것은 헤롯과 같은 태도라고 경계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14–2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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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시점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서의 기록들을 함께 살펴보면 헤롯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만남이 38절 끝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나실 때 누가복음 23장을 찾아보십시오. 누가복음 23장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바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요한은 이 부분을 다루지 않고 누가가 기록합니다. 신문마다 세부 보도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그렇게 예수님은 헤롯에게 보내지십니다. 헤롯과 만나는 장면을 다룰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빌라도와는 달리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몹시 기뻐합니다.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들은 일이 있어서 그분이 어떤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9절로 설교하고 싶습니다.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가 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양심이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제가 이 이야기를 꺼냈으니 여러분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잠깐만 시간을 더 들여 근거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양해하시고 잠시만 들어 주십시오. 마가복음 6장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는 사건을 보면, 헤롯에 관하여 “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라고 합니다. 헤롯도 한때는 설교자를 좋아하고, 설교를 좋아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정말 잘됐다. 이제 예수가 여기 왔구나. 아주 좋아. 기적을 행할지도 몰라. 기적을 많이 행했다던데. 나를 위해서도 하나 행할지 모르지.” 그래서 온갖 질문을 하기 시작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헤롯의 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헤롯은 자기가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라는 말씀대로 행동했습니다.
오늘 저녁 여기 계신 어떤 분은 자신이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예수님께 여러 질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중요하고 결정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가진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준비될 때까지 그분이 기다리시면 되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질문하는 그날,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그 교훈에 너무나 무감각해지며 그 지식에 흠뻑 젖어, 마음이 건물의 양철 지붕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빗물이 지붕 위에서 소리를 내고 튕겨 나갈 뿐, 결코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그토록 자주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마음이 너무 완고해져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끝내 듣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질문의 답을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그분이 서서 기다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광의 세계로부터 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러분의 삶에 말씀하시고, 경건한 부모와 친구들을 주시고, 성경을 알게 하시며, 자신에게로 부르신 그분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준비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시라고 정말 그분께 말할 작정입니까?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준비되겠습니까? 여러분만을 위한 기적입니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헤롯의 태도입니다. “아, 좋아. 예수님을 모셔 오자. 나를 위해 구경거리를 보여 주실지도 모르지.” 그가 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양철 지붕에 튕겨 나가는 빗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익숙해지고 그 교훈에 무감각해지면, 마음이 건물의 양철 지붕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가 내리면 양철 지붕 위에서 소리가 나지만 빗물은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갑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친다는 권위에 근거해, 질문하는 그날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설교자는 자주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말해 왔다고 밝힙니다. 마음이 너무 완고해지면 언젠가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끝내 듣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열어 두라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19–20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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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여기 계신 어떤 분은 자신이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예수님께 여러 질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중요하고 결정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가진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준비될 때까지 그분이 기다리시면 되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질문하는 그날,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너무나 익숙해지고 그 교훈에 너무나 무감각해지며 그 지식에 흠뻑 젖어, 마음이 건물의 양철 지붕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빗물이 지붕 위에서 소리를 내고 튕겨 나갈 뿐, 결코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그토록 자주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마음이 너무 완고해져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끝내 듣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질문의 답을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그분이 서서 기다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광의 세계로부터 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러분의 삶에 말씀하시고, 경건한 부모와 친구들을 주시고, 성경을 알게 하시며, 자신에게로 부르신 그분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준비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시라고 정말 그분께 말할 작정입니까?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준비되겠습니까? 여러분만을 위한 기적입니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헤롯의 태도입니다. “아, 좋아. 예수님을 모셔 오자. 나를 위해 구경거리를 보여 주실지도 모르지.” 그가 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