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17 / 32쪽 · 한 쪽 20개
아내와의 차 안 다툼
설교자는 먼저 용서가 관계를 전제로 한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는 사람과는 큰 트러블이 드물지만, 가까운 관계에서는 상처와 용서의 과정이 생긴다고 짚습니다. 그러면서 가까울수록 더 상처를 주고 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솔직하게 나눕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설교자는 자신의 경험을 꺼냅니다. 월요일 저녁, 아내와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의 핵심은 설교자가 아내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반면 자신에게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때 아내는 '너도 똑같아'라고 대답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작은 것 하나를 용납하고 용서하며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라도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청중에게도 같은 자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양현서 · 2026-10-21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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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저녁, 아내와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다툼의 핵심은 제가 아내에게 서운한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반면, 나에게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서운하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너도 똑같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작은 것 하나 용납하고 용서하고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
설교자는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집사 스데반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회 앞에 서서 긴 설교를 했는데,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으며 하나님이 사람이 지은 성전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의인을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스데반을 향해 격렬하게 반응했습니다. 설교자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돌이키고 회개했던 장면과 이를 대비합니다. 설교자는 스데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그와 특별한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돌이 날아오는 결정적인 순간에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원수를 향한 용서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시선을 옮기는 데서 시작된다고 적용합니다.
양현서 · 2026-10-21
설교 내 4–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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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질문 어디까지 용서해 봤습니까?'에 대한 어마어마한 용서를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집사입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회에 서서 긴 설교를 하며,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으며, 하나님이 사람이 지은 성전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보여신 의인을 여러분이 죽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해 일을 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돌이키고 회개했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완악한 마음으로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와 관계가 어마어마하게 있었을까요? 아니었겠죠.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스데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돌이 날라오는 결정적인 순간에 스데반이 어떤 말을 선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돌을 던지던 사울의 변화
설교자는 스데반의 죽음이 있던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옷을 맡고 있던 청년 사울이 그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처참한 상황에서, 당장 눈앞에는 기도의 응답이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순간 순종을 통해 사울이 등장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훗날 사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사례를 근거로 남편, 자녀, 부모님과 시부모님을 위해 드리는 눈물의 용서의 기도도 당장 변화가 없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기도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격려합니다.
양현서 · 2026-10-21
설교 내 12–12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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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두 번째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도이지 않습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 묵묵히 서서 못박히신 예수님의 기도와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돌이 날라오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분노로 맞서지 않고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라고 하면 내 마음에 맺혀진 것이 조금씩 풀려가야지 용서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억울한 마음들이 다 풀리고 상대방의 마음이 조금씩 풀려지는 것이 스데반의 모습이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그 사람이 지은 죄를 그냥 없던 일로 덮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기도의 진짜 의미는 내 손에 쥐고 있었던 그 용서할 판단의 마음을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린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판단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이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저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저 사람을 판단하고 벌하시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립니다라는 것이 스데반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용서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용서할 일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면,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계속 지적하면서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그 판단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판단을 내가 하지 않고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몫으로 올려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입니다. 이 위대한 용서의 기도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서 돌을 다시 내려놓고 '아니야, 죄송합니다'라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고, 당장 눈앞에는 내 기도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순종을 통해 누가 나타났습니까? 바로 사울이 등장했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옷을 맡고 있던 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 훗날 사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만약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없었으면 우리는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도망가서 살아남았더라면 사도 바울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위해,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시부모님을 위해 우리가 눈물과 용서의 기도를 드려도, 당장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변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 우리의 삶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기도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들, 나에게 깊은 원상처를 준 원수들은 저 멀리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입니다. 내게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도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 내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마음속에 밉고 원망스러운 그 사람의 이름을 한 번 조용히 불러 보세요.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세요. '나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그 마음을 올려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억지로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 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손에 쥐고 있던 용서의 판단과 재판하려는 마음들을 하나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입니다. 주여,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 마음으로 나아가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날아오는 돌 가운데 스데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 같았으면 화를 내고 도망가고 맞서 싸웠을 것 같은데,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 충만하여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 내가 당장은 할 수 없지만, 당장은 나의 모든 상황이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 마음으로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금요 기도회 중 걸려 온 아기 응급 전화
설교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금요 기도회로 교회에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아기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대학 병원으로 빨리 가야 한다고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설교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병원으로 운전해 가는 길에 그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했지만, 차가 막혀 제때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화를 내며 혼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 경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이 당장 오시기를 바랐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기대와 연결됩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 사람이 느끼는 당혹과 답답함을 설교자는 자신의 이야기로 나눕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두 자매의 심정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삼도록 청중을 이끕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3–3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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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 금요 기도회에 교회에 있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기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갔고, 선생님이 대학 병원으로 빨리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하고 황당해서 믿기지 않았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며 기도했지만, 차가 막혀서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화를 내며 혼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카슨의 '분노하셨다' 해석 인용
설교자는 요한복음 11장 38절에 나오는 '비통이 여기신다'라는 표현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는 이 말이 원래 달리는 말이 콧김을 내뿜는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성경에서는 '책망하다', '경고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D. 이카슨이라는 신학자가 이 표현을 '분노하셨다'는 것으로 풀이했다고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35절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지만, 나사로를 위해 소리 내어 곡하는 사람들의 울음과는 달리 조용히 우셨다고 구분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분노와 슬픔은 단순히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을 울게 만드는 죄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소망 없이 우는 상황 앞에서 예수님이 분노하고 슬퍼하셨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므로, 이 분노와 슬픔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죄와 사망으로 인해 사람과의 교제가 끊어진 현실을 슬퍼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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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보여 주십니다. 38절의 말씀을 보시면 무덤에 계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지금 '비통이 여기신다'라고 표현하고 있죠. 여러분, '비통이 여기다'는 말은 보통 달리는 말이 콧을 내뿜는 그 표현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성경 안에서 어떻게 또 표현이 되냐면 '책망하다', '경고하다'라고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이 '비통이 여기다'는 말에 대해서 D. 이카슨이라는 신학자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35절을 보시면 우리가 읽진 않겠지만 예수님이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 울고 계세요. 그런데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다'라는 표현은 지금 나사로가 죽어서 곡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울음입니다. 그들은 소리를 내어서 곡을 하며 울고 있지만 예수님은 지금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예수님은 분노하고 계시고 슬퍼하신다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분노하고 슬퍼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을 울게 만드는 죄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없이 우는 이 상황 앞에서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울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을 울게 만드는 죄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소망 없이 우는 이 상황 앞에서 분노하며 슬퍼하십니다. 이것을 알리가 없는 사람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서 예수님도 오죽 슬프시구나. 그리고 많은 병자들은 고쳤지만 지금 사람을 살릴 수는 없구나. 그래서 지금 답답해서 우시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묘사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보여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분노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은 누구를 대신해서 하고 계시는 일이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분노하시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는 죄와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십니까? 태초가 있기 전부터 삼위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 사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한 몸을 이루시며 교제하시며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무엇을 위해 만드십니까?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끊어진 것이 영적인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피조물 인간과 계속해서 교제하고 싶으신데 죄와 사망으로 인하여서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와 사망의 영향력 아래 멍에를 풀지 못하며 슬퍼하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 돌 된 막내를 돌보며 겪은 마음
설교자는 막내가 두 돌이 되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를 돌보며 힘들었던 경험을 나눕니다.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뛰어다닐 때마다 그는 '빨리 자라, 아빠도 삶이 있다'는 마음이 올라왔고, 그럴수록 정작 괴로운 사람은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 그 상황 가운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너도 더 놀고 싶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자, 아이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경험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상황을 볼 때 사람이 감정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적용으로 이어갑니다. 자신의 자리에서만 바라보면 감정과 마음에 매이게 되지만,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면 다른 시선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청중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돌이 있는지, 그 안의 것이 오래되어 냄새가 나는지, 혹은 돌이 너무 거대하고 무거운지 물으며 믿음의 눈을 들어 순종으로 돌을 옮길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권면합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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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고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일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눈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함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신 말씀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지 않겠니라고 지금 마르다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41절 말씀을 보시면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직접 돌을 옮기실 수 있어요. 예수님도 손가락질이 이렇게 팍 하면 돌이 쫙 옮겨질 거예요. 돌을 폭파시키실 수도 있겠죠. '사라져라. 에이.' 그럼 더 퍼포먼스가 더 강력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사람을 통하여서 일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지고 난감할 때 예수님이 종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 그랬더니 그 연회를 주관하던 연회장도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데 누가 알죠? 물을 부었던 하인들이 압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시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일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도 지겹다. 오늘도 너무 힘들다. 언제까지 해야 되나?' 이 마음으로 그 상황 가운데 들어가면 견딜 수가 없어요. 저는 이제 새 자녀가 있습니다. 막내가 두 돌이 돼요. 내일이 되면 너무 버겁습니다. 너무 버겁습니다. 에너지가 너무 넘치고 때로 한 번씩 너무 잠을 자지 않으면 '빨리 자라. 빨리 자라. 아빠도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 그 마음이 흘러가요. 그러면 정작 괴로운 사람은 제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 '아, 너도 더 놀고 싶구나. 나처럼 야 뭐 하고 놀래' 하고 함께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자리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마음에 붙잡힐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돌이 있습니까? 그 안에 든 것이 너무 오래되어 냄새가 납니까? 아니면 그 돌이 너무 거대하고 무겁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서 순종으로 돌을 옮길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실 줄 믿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부은 하인들
설교자는 가나 혼인 잔치의 장면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합니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져 난감해졌을 때 예수님이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포도주가 생겼지만,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바로 물을 부었던 하인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며, 그 일에 참여한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는 청중의 일상도 같은 자리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일을 시작할 때 그 일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적용합니다. 반면 '지겹다, 힘들다, 언제까지 해야 되나'라는 마음으로 상황에 들어가면 견딜 수 없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순종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는 길이라고 권면합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13–13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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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고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일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눈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함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신 말씀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지 않겠니라고 지금 마르다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41절 말씀을 보시면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직접 돌을 옮기실 수 있어요. 예수님도 손가락질이 이렇게 팍 하면 돌이 쫙 옮겨질 거예요. 돌을 폭파시키실 수도 있겠죠. '사라져라. 에이.' 그럼 더 퍼포먼스가 더 강력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사람을 통하여서 일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지고 난감할 때 예수님이 종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 그랬더니 그 연회를 주관하던 연회장도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데 누가 알죠? 물을 부었던 하인들이 압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시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일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도 지겹다. 오늘도 너무 힘들다. 언제까지 해야 되나?' 이 마음으로 그 상황 가운데 들어가면 견딜 수가 없어요. 저는 이제 새 자녀가 있습니다. 막내가 두 돌이 돼요. 내일이 되면 너무 버겁습니다. 너무 버겁습니다. 에너지가 너무 넘치고 때로 한 번씩 너무 잠을 자지 않으면 '빨리 자라. 빨리 자라. 아빠도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 그 마음이 흘러가요. 그러면 정작 괴로운 사람은 제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 '아, 너도 더 놀고 싶구나. 나처럼 야 뭐 하고 놀래' 하고 함께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자리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마음에 붙잡힐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돌이 있습니까? 그 안에 든 것이 너무 오래되어 냄새가 납니까? 아니면 그 돌이 너무 거대하고 무겁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서 순종으로 돌을 옮길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실 줄 믿습니다.
임종 직전 병상 세례의 경험
설교자는 얼마 전 임종 예배를 인도했던 가정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가정에서는 자매 집사님만 남편과 함께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의식이 남아 있을 때 아버지의 친구와 함께 복음을 전했고, 아버지가 믿음을 수긍하셨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임종 예배 전에 세례를 베풀려 했지만, 아버지가 며칠 동안 고통 속에서 진통제만 맞고 일어나지 못하신다는 말을 듣고 세례는 어렵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임종 예배를 드리던 중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따님이 아버지께 말을 건넸고, 그동안 부르고 깨워도 반응이 없던 아버지가 눈을 떴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이 들리시면 눈을 깜빡여 보라고 하자 아버지는 눈을 깜빡이셨고, 그 응답을 바탕으로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돌아오는 길에 믿음의 눈으로 지킨 따님과, 하나님을 기대하며 머문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병상은 끝의 자리이지만, 하나님은 그 끝자락에서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계신다고 그는 말합니다.
서동혁 · 2026-10-21
설교 내 14–14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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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얼마 전에 임종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가정이었어요. 유일하게 가정에서 자매 집사님만 남편과 함께 교회를 다니셨어요. 이제 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를 받으신 거죠'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의식이 더 있으실 때 아버지 친구분과 함께 복음을 전했고 아버지께서 믿음을 이렇게 수긍하셨다고 합니다. 가서 이제 임종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세례를 먼저 베풀려고 하는데 자매님께 여쭤보니 아버지께서 이미 며칠 동안 거의 고통 속에서 진통제만 맞고 못 일어나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그래서 아쉽지만 세례는 좀 어렵겠구나. 그래서 임종 예배를 인도해도 될까요? 하고 임종 예배를 한참 인도하다가 중간에 혹시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라고 여쭤보니까 말씀을 하셨어요. 따님이 한참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아버지를 불러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셨는데 아버지께서 눈을 뜨시는 거예요. 옆에서 저는 따님이 하시는 말씀 이렇게 녹화하고 있다. 너무 놀라 가지고 자매님 말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가 혹시 선생님 말씀이 들리시면 눈을 한번 껌뻑해 보시죠 하니까 눈을 껌뻑 껌뻑 하셨습니다. 의심이 많아서 여러 번 여쭤봤어요. 감사하게도 임종 직전에 병상에서 세례를 이렇게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지키셨던 그 따님과 사실은 초대받아 간 것은 저희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머물 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볼 수 있었구나.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저 하나님이 하시겠지라는 마음으로 머물 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구나라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 병상은 끝의 자리죠. 하지만 하나님은 이 끝자락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운전 중 뒤에서 들이받힌 상황의 비유
설교자는 운전 중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안전하게 운전해도, 술에 취한 사람이 뒤에서 들이받아 버리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삶에 얼마든지 닥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내 노력만으로 세상을 지킬 수 없고, 내가 성실하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기를 축원하며 기도합니다. 자기 힘을 과신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이 이 비유를 통한 적용입니다.
하용조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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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꼭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제자가 내 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속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고요?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고요. 여러분의 아내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에요. 여러분을 속이려는 친구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는 이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축복해 주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일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자라 부르면,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을 시키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훈련시키고 전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사랑이었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고 미숙해도, 그걸 다 껴안고, 이 사람이 언젠가 성숙해질 때까지 예수님 죽고 나서 성령 받을 것을 아시고, 그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사랑했던 것이 제자 훈련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 훈련을 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는데,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시겠습니다. 11절 한번 같이 읽어 주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어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 기도가 나와요.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이고요. 두 번째는 '아버지여 하나님이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먼저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사람의 본능, 죄인의 본질이 분열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얼마 가지 못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평가하고, 서로 비판하고 헤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 놔두면 꼭 인간은 헤어지게 되 있어요. 가만 놔두면 인간이 서로서로 이렇게 사랑하고 협동하고 하나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인간은 서로 헤어지지 못해서 앙탈을 합니다. 그게 인간의 죄성이고 본능이에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에요. 가만 놔두면 서로 미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사랑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라 소유예요. 자꾸 가지려고 해요. 주려고 하지 않고, 자꾸 내 것을 만들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에요. 처음에는 평화한 거 같지요. 처음에는 나누어 줄 것 같지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그 본질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인간은 일치하기보다는 자꾸 분열해요.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가만 놔두면 싸우고 비판하고 헤어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 뿌리가 있기 때문에,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는 처음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지나가면 인간 안에 죄성의 뿌리가 이렇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람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소유의 욕망,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욕망, 사람을 믿지 않는 의심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하나됐다고 하다가 또 편가르게 하고 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일 큰 숙제가 동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는 사람 보면 머리 숙이고 싶어요. 그게은 어렵습니다. 꼭은 나중에 헤어집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싸우고요. 이게 어디까지 싸울까요? 교회도 싸워요. 그 교회 싸우는 거 보셨어요? 아, 뭐 많이 받겠지요. 안 싸우는 교회가 없고요. 분열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사랑에서 서로 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파송해서요. 근데 인간은 자꾸 이렇게 싸워서 헤어져요. 성령은 연합과 일치의 영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틀린 것도 하나로 만들고, 다른 것도 새롭게 하나로 만드는 영이 성령의 영입니다. 사탄의 영은 분열과 미움과 비판과 싸움으로 결론을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화목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부탁한 게 뭐예요?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화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트라블 메이커가 되지 마시고 피스메이커가 되십시오. 싸우면 붙여주고, 이혼하면 붙여주고, 나가면 돌아오게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화해자의 특징이 뭔줄 아세요? 십자가 짓는 거예요. 그냥 있어서는 화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처럼, 화해자의 대가는 언제나 십자가를 짓는 것입니다. '주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기도였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12절에 있는 11절에 있는데, 11절 12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우선 12절을 읽겠습니다. 12절 시작.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오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이는 멸망할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 예수님의 관심은 11절에도 12절에도 보존하게 해 달라. 제자들을 지켜 달라. 보호해 달라, 보존해 달라.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고, 12절에도 똑같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여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이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고, 12절에는 '내가 저들을 보존하여 지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도의 보존, 안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내가 나를 아무리 지켜도 잘 안 돼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성입니다. 성.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거예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성을 쌓다 보면 무슨 결과가 오느냐? 성을 높이 쌓다 보면, 타인의 공격에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다 보면은 타인과 단절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외로움이란 누가 외롭게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 거예요. 여러분 외롭다는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나는 외로워' 이런 거. 뭘 외로워요? 자기가 외로움을 만들었지. 이 사람 끊었지. 저 사람 끊었지.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집 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안 내려올 방법이 어디 있어요? 외로운 사람 제가 말합니다. 이불을 팍 차고 나오십시오. 아멘. 그리고 나가 사람 만나세요. 그럼 안 외로워져요. 이래서 뭐 싫고 절에서 싫고 다 [한숨] 스스로 외로움을 만나는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성을 쌓으면 첫째 타인과 단절되고요. 두 번째 또 뭐가 있어요? 스스로 성 안에 갇치는 거예요. 그리고 홀로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도, 술 먹고 뒤에서 박는데 어떻게 해요? 내 노력으로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아요. 내 노력 내가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보호. 시편 23편 1절부터 4절에 보면은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놓이시며, 잔잔한 시내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이게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보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녀요. 여러분, 여러분이 팔이 힘이 세 가지고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 품안에 있어요. 근데 이 아이들이 품 안에 오래 있지 않아요. 다 떠납니다. 쫓아다니면서 잔소리 하겠어요.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여 주겠어요. 하나님이 보호해 줘야지요. 그래서 꼭 기도해야 돼요. '나는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남편을 다 어떻게 지켜요? 술직 가는데 하나님이 지켜 줘야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에도 하나님이 지켜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여 지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1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교리는 기쁨의 교리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고요. 좌절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의 종교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골방에 틀어박힌 외로운 사람
설교자는 외롭다고 말하며 골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이 사람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혼자 머물러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설교자는 외로움이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이 사람과 저 사람과의 관계를 끊었고, 그 결과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외롭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외로운 사람들에게 직접 이불을 팍 차고 나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면 외로움이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회중의 응답을 받으며 이 권면을 강하게 전합니다.
하용조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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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꼭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제자가 내 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속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고요?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고요. 여러분의 아내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에요. 여러분을 속이려는 친구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는 이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축복해 주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일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자라 부르면,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을 시키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훈련시키고 전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사랑이었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고 미숙해도, 그걸 다 껴안고, 이 사람이 언젠가 성숙해질 때까지 예수님 죽고 나서 성령 받을 것을 아시고, 그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사랑했던 것이 제자 훈련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 훈련을 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는데,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시겠습니다. 11절 한번 같이 읽어 주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어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 기도가 나와요.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이고요. 두 번째는 '아버지여 하나님이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먼저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사람의 본능, 죄인의 본질이 분열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얼마 가지 못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평가하고, 서로 비판하고 헤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 놔두면 꼭 인간은 헤어지게 되 있어요. 가만 놔두면 인간이 서로서로 이렇게 사랑하고 협동하고 하나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인간은 서로 헤어지지 못해서 앙탈을 합니다. 그게 인간의 죄성이고 본능이에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에요. 가만 놔두면 서로 미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사랑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라 소유예요. 자꾸 가지려고 해요. 주려고 하지 않고, 자꾸 내 것을 만들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에요. 처음에는 평화한 거 같지요. 처음에는 나누어 줄 것 같지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그 본질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인간은 일치하기보다는 자꾸 분열해요.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가만 놔두면 싸우고 비판하고 헤어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 뿌리가 있기 때문에,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는 처음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지나가면 인간 안에 죄성의 뿌리가 이렇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람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소유의 욕망,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욕망, 사람을 믿지 않는 의심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하나됐다고 하다가 또 편가르게 하고 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일 큰 숙제가 동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는 사람 보면 머리 숙이고 싶어요. 그게은 어렵습니다. 꼭은 나중에 헤어집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싸우고요. 이게 어디까지 싸울까요? 교회도 싸워요. 그 교회 싸우는 거 보셨어요? 아, 뭐 많이 받겠지요. 안 싸우는 교회가 없고요. 분열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사랑에서 서로 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파송해서요. 근데 인간은 자꾸 이렇게 싸워서 헤어져요. 성령은 연합과 일치의 영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틀린 것도 하나로 만들고, 다른 것도 새롭게 하나로 만드는 영이 성령의 영입니다. 사탄의 영은 분열과 미움과 비판과 싸움으로 결론을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화목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부탁한 게 뭐예요?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화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트라블 메이커가 되지 마시고 피스메이커가 되십시오. 싸우면 붙여주고, 이혼하면 붙여주고, 나가면 돌아오게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화해자의 특징이 뭔줄 아세요? 십자가 짓는 거예요. 그냥 있어서는 화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처럼, 화해자의 대가는 언제나 십자가를 짓는 것입니다. '주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기도였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12절에 있는 11절에 있는데, 11절 12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우선 12절을 읽겠습니다. 12절 시작.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오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이는 멸망할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 예수님의 관심은 11절에도 12절에도 보존하게 해 달라. 제자들을 지켜 달라. 보호해 달라, 보존해 달라.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고, 12절에도 똑같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여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이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고, 12절에는 '내가 저들을 보존하여 지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도의 보존, 안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내가 나를 아무리 지켜도 잘 안 돼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성입니다. 성.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거예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성을 쌓다 보면 무슨 결과가 오느냐? 성을 높이 쌓다 보면, 타인의 공격에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다 보면은 타인과 단절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외로움이란 누가 외롭게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 거예요. 여러분 외롭다는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나는 외로워' 이런 거. 뭘 외로워요? 자기가 외로움을 만들었지. 이 사람 끊었지. 저 사람 끊었지.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집 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안 내려올 방법이 어디 있어요? 외로운 사람 제가 말합니다. 이불을 팍 차고 나오십시오. 아멘. 그리고 나가 사람 만나세요. 그럼 안 외로워져요. 이래서 뭐 싫고 절에서 싫고 다 [한숨] 스스로 외로움을 만나는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성을 쌓으면 첫째 타인과 단절되고요. 두 번째 또 뭐가 있어요? 스스로 성 안에 갇치는 거예요. 그리고 홀로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도, 술 먹고 뒤에서 박는데 어떻게 해요? 내 노력으로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아요. 내 노력 내가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보호. 시편 23편 1절부터 4절에 보면은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놓이시며, 잔잔한 시내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이게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보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녀요. 여러분, 여러분이 팔이 힘이 세 가지고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 품안에 있어요. 근데 이 아이들이 품 안에 오래 있지 않아요. 다 떠납니다. 쫓아다니면서 잔소리 하겠어요.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여 주겠어요. 하나님이 보호해 줘야지요. 그래서 꼭 기도해야 돼요. '나는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남편을 다 어떻게 지켜요? 술직 가는데 하나님이 지켜 줘야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에도 하나님이 지켜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여 지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1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교리는 기쁨의 교리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고요. 좌절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의 종교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품 안을 떠나는 자녀 이야기
설교자는 부모가 자녀를 품 안에 두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부모의 팔힘이 세서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자녀가 품 안에 있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녀는 결국 떠나고, 부모가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거나 밥을 먹여 줄 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녀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모가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켜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남편을 지키는 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가정 모두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라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하용조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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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꼭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제자가 내 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속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고요?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고요. 여러분의 아내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에요. 여러분을 속이려는 친구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는 이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축복해 주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일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자라 부르면,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을 시키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훈련시키고 전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사랑이었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고 미숙해도, 그걸 다 껴안고, 이 사람이 언젠가 성숙해질 때까지 예수님 죽고 나서 성령 받을 것을 아시고, 그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사랑했던 것이 제자 훈련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 훈련을 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는데,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시겠습니다. 11절 한번 같이 읽어 주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어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 기도가 나와요.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이고요. 두 번째는 '아버지여 하나님이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먼저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사람의 본능, 죄인의 본질이 분열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얼마 가지 못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평가하고, 서로 비판하고 헤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 놔두면 꼭 인간은 헤어지게 되 있어요. 가만 놔두면 인간이 서로서로 이렇게 사랑하고 협동하고 하나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인간은 서로 헤어지지 못해서 앙탈을 합니다. 그게 인간의 죄성이고 본능이에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에요. 가만 놔두면 서로 미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사랑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라 소유예요. 자꾸 가지려고 해요. 주려고 하지 않고, 자꾸 내 것을 만들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에요. 처음에는 평화한 거 같지요. 처음에는 나누어 줄 것 같지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그 본질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인간은 일치하기보다는 자꾸 분열해요.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가만 놔두면 싸우고 비판하고 헤어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 뿌리가 있기 때문에,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는 처음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지나가면 인간 안에 죄성의 뿌리가 이렇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람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소유의 욕망,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욕망, 사람을 믿지 않는 의심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하나됐다고 하다가 또 편가르게 하고 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일 큰 숙제가 동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는 사람 보면 머리 숙이고 싶어요. 그게은 어렵습니다. 꼭은 나중에 헤어집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싸우고요. 이게 어디까지 싸울까요? 교회도 싸워요. 그 교회 싸우는 거 보셨어요? 아, 뭐 많이 받겠지요. 안 싸우는 교회가 없고요. 분열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사랑에서 서로 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파송해서요. 근데 인간은 자꾸 이렇게 싸워서 헤어져요. 성령은 연합과 일치의 영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틀린 것도 하나로 만들고, 다른 것도 새롭게 하나로 만드는 영이 성령의 영입니다. 사탄의 영은 분열과 미움과 비판과 싸움으로 결론을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화목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부탁한 게 뭐예요?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화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트라블 메이커가 되지 마시고 피스메이커가 되십시오. 싸우면 붙여주고, 이혼하면 붙여주고, 나가면 돌아오게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화해자의 특징이 뭔줄 아세요? 십자가 짓는 거예요. 그냥 있어서는 화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처럼, 화해자의 대가는 언제나 십자가를 짓는 것입니다. '주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기도였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12절에 있는 11절에 있는데, 11절 12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우선 12절을 읽겠습니다. 12절 시작.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오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이는 멸망할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 예수님의 관심은 11절에도 12절에도 보존하게 해 달라. 제자들을 지켜 달라. 보호해 달라, 보존해 달라.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고, 12절에도 똑같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여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이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고, 12절에는 '내가 저들을 보존하여 지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도의 보존, 안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내가 나를 아무리 지켜도 잘 안 돼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성입니다. 성.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거예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성을 쌓다 보면 무슨 결과가 오느냐? 성을 높이 쌓다 보면, 타인의 공격에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다 보면은 타인과 단절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외로움이란 누가 외롭게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 거예요. 여러분 외롭다는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나는 외로워' 이런 거. 뭘 외로워요? 자기가 외로움을 만들었지. 이 사람 끊었지. 저 사람 끊었지.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집 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안 내려올 방법이 어디 있어요? 외로운 사람 제가 말합니다. 이불을 팍 차고 나오십시오. 아멘. 그리고 나가 사람 만나세요. 그럼 안 외로워져요. 이래서 뭐 싫고 절에서 싫고 다 [한숨] 스스로 외로움을 만나는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성을 쌓으면 첫째 타인과 단절되고요. 두 번째 또 뭐가 있어요? 스스로 성 안에 갇치는 거예요. 그리고 홀로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도, 술 먹고 뒤에서 박는데 어떻게 해요? 내 노력으로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아요. 내 노력 내가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보호. 시편 23편 1절부터 4절에 보면은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놓이시며, 잔잔한 시내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이게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보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녀요. 여러분, 여러분이 팔이 힘이 세 가지고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 품안에 있어요. 근데 이 아이들이 품 안에 오래 있지 않아요. 다 떠납니다. 쫓아다니면서 잔소리 하겠어요.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여 주겠어요. 하나님이 보호해 줘야지요. 그래서 꼭 기도해야 돼요. '나는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남편을 다 어떻게 지켜요? 술직 가는데 하나님이 지켜 줘야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에도 하나님이 지켜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여 지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1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교리는 기쁨의 교리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고요. 좌절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의 종교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바벨탑과 성 쌓기의 결과
설교자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는 것을 바벨탑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인간이 발견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성이며,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공격에서 나를 지키려고 성을 쌓다 보면, 결국 사람들과 단절되는 결과가 생깁니다. 설교자는 성을 높이 쌓을수록 사람은 스스로 성 안에 갇히고, 결국 홀로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 장면은 자기 방어가 오히려 관계를 끊고 고립을 가져오는 과정으로 제시됩니다. 설교자는 이 경고를 통해 사람을 믿고 관계 안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용조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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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꼭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제자가 내 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속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고요?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고요. 여러분의 아내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이에요. 여러분을 속이려는 친구도 하나님이 보내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 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는 이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축복해 주고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일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보통 제자라 부르면,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을 시키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훈련시키고 전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사랑이었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고 미숙해도, 그걸 다 껴안고, 이 사람이 언젠가 성숙해질 때까지 예수님 죽고 나서 성령 받을 것을 아시고, 그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사랑했던 것이 제자 훈련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 훈련을 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는데,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11절부터 다시 보시겠습니다. 11절 한번 같이 읽어 주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어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 기도가 나와요. 첫째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이고요. 두 번째는 '아버지여 하나님이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먼저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사람의 본능, 죄인의 본질이 분열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얼마 가지 못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평가하고, 서로 비판하고 헤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 놔두면 꼭 인간은 헤어지게 되 있어요. 가만 놔두면 인간이 서로서로 이렇게 사랑하고 협동하고 하나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인간은 서로 헤어지지 못해서 앙탈을 합니다. 그게 인간의 죄성이고 본능이에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에요. 가만 놔두면 서로 미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사랑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라 소유예요. 자꾸 가지려고 해요. 주려고 하지 않고, 자꾸 내 것을 만들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에요. 처음에는 평화한 거 같지요. 처음에는 나누어 줄 것 같지요.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그 본질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인간은 일치하기보다는 자꾸 분열해요.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가만 놔두면 싸우고 비판하고 헤어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 뿌리가 있기 때문에,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는 처음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지나가면 인간 안에 죄성의 뿌리가 이렇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람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소유의 욕망,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욕망, 사람을 믿지 않는 의심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믿다가도 의심하고, 하나됐다고 하다가 또 편가르게 하고 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일 큰 숙제가 동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는 사람 보면 머리 숙이고 싶어요. 그게은 어렵습니다. 꼭은 나중에 헤어집니다.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싸우고요. 이게 어디까지 싸울까요? 교회도 싸워요. 그 교회 싸우는 거 보셨어요? 아, 뭐 많이 받겠지요. 안 싸우는 교회가 없고요. 분열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사랑에서 서로 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파송해서요. 근데 인간은 자꾸 이렇게 싸워서 헤어져요. 성령은 연합과 일치의 영입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틀린 것도 하나로 만들고, 다른 것도 새롭게 하나로 만드는 영이 성령의 영입니다. 사탄의 영은 분열과 미움과 비판과 싸움으로 결론을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화목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부탁한 게 뭐예요? 세상을 화목케 하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천사도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축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화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트라블 메이커가 되지 마시고 피스메이커가 되십시오. 싸우면 붙여주고, 이혼하면 붙여주고, 나가면 돌아오게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화해자의 특징이 뭔줄 아세요? 십자가 짓는 거예요. 그냥 있어서는 화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처럼, 화해자의 대가는 언제나 십자가를 짓는 것입니다. '주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기도였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12절에 있는 11절에 있는데, 11절 12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우선 12절을 읽겠습니다. 12절 시작.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오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이는 멸망할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 예수님의 관심은 11절에도 12절에도 보존하게 해 달라. 제자들을 지켜 달라. 보호해 달라, 보존해 달라.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고, 12절에도 똑같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여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이 보존하게 해 달라는 기도고, 12절에는 '내가 저들을 보존하여 지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도의 보존, 안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내가 나를 아무리 지켜도 잘 안 돼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가 성입니다. 성.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거예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성을 쌓다 보면 무슨 결과가 오느냐? 성을 높이 쌓다 보면, 타인의 공격에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다 보면은 타인과 단절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외로움이란 누가 외롭게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 거예요. 여러분 외롭다는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나는 외로워' 이런 거. 뭘 외로워요? 자기가 외로움을 만들었지. 이 사람 끊었지. 저 사람 끊었지.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이집 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안 내려올 방법이 어디 있어요? 외로운 사람 제가 말합니다. 이불을 팍 차고 나오십시오. 아멘. 그리고 나가 사람 만나세요. 그럼 안 외로워져요. 이래서 뭐 싫고 절에서 싫고 다 [한숨] 스스로 외로움을 만나는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성을 쌓으면 첫째 타인과 단절되고요. 두 번째 또 뭐가 있어요? 스스로 성 안에 갇치는 거예요. 그리고 홀로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도, 술 먹고 뒤에서 박는데 어떻게 해요? 내 노력으로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아요. 내 노력 내가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보호. 시편 23편 1절부터 4절에 보면은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놓이시며, 잔잔한 시내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이게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보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녀요. 여러분, 여러분이 팔이 힘이 세 가지고 자녀를 붙잡고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 품안에 있어요. 근데 이 아이들이 품 안에 오래 있지 않아요. 다 떠납니다. 쫓아다니면서 잔소리 하겠어요.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여 주겠어요. 하나님이 보호해 줘야지요. 그래서 꼭 기도해야 돼요. '나는 더 이상 보호할 능력이 없다.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남편을 다 어떻게 지켜요? 술직 가는데 하나님이 지켜 줘야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에도 하나님이 지켜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여 지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1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의 교리 중에 독특한 교리는 기쁨의 교리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의 종교고요. 좌절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의 종교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팔을 들어 올리기 힘든 일상의 경험
설교자는 청중에게 요즘 팔을 들어 올리기 힘든 분이 있는지 묻습니다. 5년 전과 10년 전, 20년 전을 비교하며 나이가 들수록 팔을 드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일상의 경험을 꺼냅니다. 이어서 팔을 들고 있다가 지쳐 내려온 모세를 본문으로 가져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백성을 인도한 위인 모세도 팔이 지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필 인물은 모세가 아니라 성경에 잘 드러나지 않는 훌이라고 소개합니다. 배경으로 르비 골짜기에서 마실 물이 없던 백성이 모세에게 항의했고, 하나님이 물을 주셔서 겨우 목을 축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아말렉이 쳐들어와 싸움이 시작되었고, 설교자는 어려움을 넘기면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오는 모습이 우리 인생과 닮았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싸움을 맡기고 아론, 훌과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데, 설교자는 이들이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라며 할아버지들이 산에 오른 셈이라고 웃으며 전합니다.
이원희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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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혹시 팔을 들어 올리기가 힘든 분 계십니까? 예. 맞습니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5년 전만 해도 충분히 힘들지 않았을 텐데, 10년 전, 20년 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을 들어 올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팔을 들고 있다가 지쳐버린 한 사람이 나오는데요. 누군지 아십니까? 모세죠.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인도한 그 훌륭한 모세도 팔이 지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가 아니라, 우리가 이번 학기의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연약해도 넉넉합니다’라는 주제 아래, 성경에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데요. 바로 훌입니다. 여러분, 훌이 성경에 몇 번 나오는지 아십니까? 몇 번 나오는지 아세요? 저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실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의 주제,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그동안 우리가 이 주제 안에서 뭐 나오리 빌립보의 간수를 만났습니다. 오늘 만나는 훌도 성경에 몇 번 나오지 않는데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좀 살펴 봤으면 좋겠는데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걷다가 르비 골짜기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르비가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우리가 읽었던 17장 1절부터 보면, 마실 물이 없어서 힘들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이 르비입니다. 이 르비에서 목마르다고 백성들이 모세에게 항의를 하죠. 모세도 이 항의에 두렵고 또 항의를 맞이하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저는 살려 달라’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죠. 물을 주셔서 겨우 간신히 목을 추이게 됩니다. 여러분, 근데 이 르비 골짜기에서 위기를 넘겼는데 이번에는 아말렉이 쳐들어옵니다. 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때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에서 싸우니라. 여러분,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이 좀 되나 싶었더니 곧바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생존의 문제가 목마른 것도 생존의 문제이지만 이제는 전투가 찾아오는 것이죠. 여러분, 르비에서 일어난 이 문제들은 흡사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려움을 넘겼다 싶으면 또 어려움이 찾아오고, 몸이 좀 괜찮아졌다 싶으면 무릎이 아프고, 무릎이 괜찮았다 싶으면 팔이 아프고,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르비에서 그런 어려움을 만나죠.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분, 전공이 무엇입니까? 벽돌 만드는 겁니다. 그냥 시키는 일을 하는 노예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과 싸우라고 하니까 굉장히 당황하죠. 근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모세랑 여호수아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싸움터에 내보내고 모세는 산 꼭대기로 올라간다고 하죠. 근데 혼자 올라가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누구랑 올라간다고요? 아론과 훌과 함께 올라갑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모세, 아론, 훌은 동년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들께서 산 꼭대기로 올라간 겁니다. 대단하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세 가지 단어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살펴봤으면 좋겠는데요.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피곤, 붙듬, 깃발. 다시 한번 읽을까요? 시작. 피곤, 붙듬, 깃발. 여러분, 첫 번째 나오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는 피곤입니다. 피곤. 바로 밑에 있는 글을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모세도 지쳤. 여러분, 모세도 지쳤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 1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여러분,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제가 유년부 아이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주일마다 유년부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경을 많이 읽었다면 충분히 알고 있을 법한 부분입니다. 승패의 달려 있음이 여호수아의 칼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있었습니까? 모세와, 모세의 팔 그리고 기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었습니까? 지팡이. 그 지팡이로 수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와 함께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라는 믿음의 선포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것이죠. 근데 12절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함에, 여러분 모세도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모세가 피곤한 것을 애써서 감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그 위인이라고 해도 피곤함을 감추지 않아요. 믿음이 좋으면 안 지칠까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소년이어도 지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도 기도하다가 분명히 지칠 때가 있습니다. 3개월, 6개월 기도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자녀들을 위해, 손주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10년, 20년 놓고 기도하신 우리 성도님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모세와 같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내가 신앙이 약해서 그런가 보다. 내가 기도를 덜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까지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믿음이 없어서 지쳤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유한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음목사님께서 바울의 가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모세도 똑같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페이지요.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지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지치고 아파지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애써 숨기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세도 이 지침이 힘들어짐이 그냥 기록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지침을 강건하게 또한 건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팔이 내려온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두 번째 단어인데요. 두 번째 단어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붙듬. 여러분 함께 붙들면 넉넉합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모세의 팔이 피곤함에, 그들이 모세의 아래에 놓아 안게 하고, 아론과 훌,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멘. 아멘. 아멘. 여러분, 아론과 훌의 한 일을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뭘 가지고 오죠? 돌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핀잔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약합니까? 왜 이렇게 민족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힘이 없습니까?’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지금 지쳐 있는 모세에게 필요한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앉을 자리입니다. 돌 하나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서 그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붙들어 줍니다. 모세의 팔을 대신해서 들어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에게 ‘잠깐 좀 쉬시라고, 내가 대신 들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세의 팔을 붙들어 줍니다. 기도는 모세가 하고, 아론과 훌은 그 기도가 멈추지 않도록 곁에서 붙들어 주었습니다. 해가지도록 붙들어 줍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 그리고 아론, 훌은 아마도 비슷한 연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론과 훌도 붙들어 주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붙들면 넉넉하다라는 진리를 이들은 알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13절 말씀인데요. 1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여러분, 통쾌한 승리 아닙니까?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못 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대의 훈련을 받지도 않고 군사 훈련을 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찔러 이겼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이 이어지는데요. 1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단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라는 것만 기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잊지 말라고 책에 적어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0절 말씀에 나왔던 모세, 아론, 훌이 기록이 됩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는 그 훌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록해 놓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전쟁의 공로자가 누구였을까요? 여호수아도 공로자였을 것이고, 모세도 당연히 공로자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팔을 붙든 아론과 훌 또한 공로자였습니다. 특별히 훌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작게 등장하는 그이지만, 그가 이 전쟁의 주역이었음을 하나님을 기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4절 말씀에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가는데요.
24살 교육전도사를 맞이한 목장 어르신들의 섬김
설교자는 15년 전 24살에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교육전도사로 첫 사역을 시작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유년부를 맡으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사역을 맡게 되었고, 그중 하나는 연세 있는 성도들이 모인 목장의 목자로 파송되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사무실을 쓰던 여전도사님은 "가서 사랑 많이 받겠네"라고 말씀하셨는데, 설교자는 그 뜻을 가서 알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목장의 막내 성도는 77세, 첫째 언니 성도는 83세였고, 설교자는 당시 24살이었으니 어르신들 눈에는 아기 같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방문할 때마다 어르신들은 두꺼운 방석을 깔아 주며 "우리 전도사님 오셨다"며 앉으라고 하셨고, 여름에도 방석을 깔아 주셨습니다. 모임이 늘 점심시간과 겹쳐 식사 준비가 부담되실까 봐 설교자는 밥을 먹고 방문했는데, 이를 말씀드리자 모임과 예배가 끝난 3시쯤 어르신들은 저녁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돌도 씹어서 소화시킬 나이에 못 먹냐"는 말씀도 들었다고 합니다. 이번 말씀을 준비하며 설교자는 그 성도들이 자신에게 아론과 훌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칼을 들고 싸우던 여호수아 같았는데, 성도들은 자신을 세우고 성장하도록 기도해 주셨고 "큰 목사님 되라"고 격려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그 성도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설교자는 고백합니다.
이원희 · 2026-10-21
설교 내 3–5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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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첫 사역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제가 15년 전에 처음 사역을 시작을 했어요. 24살에 이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을 했는데요. 신학 대학원을 다니면서 주중에 공부를 하면서 한 부서의 유년부라는 부서의 책임자로 교육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근데 저는 유년부 사역을 하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사역을 정말 많이 맡기시더라고요. 어떤 일을 맡겼냐면 이런 일을 맡겼습니다.
이 교회에, 우리로 따지면 다락방이죠. 이곳은 목장이라는 곳이 있었는데요. 교역자가 이 목장에 목자로 파송이 되는 거예요. 근데 모든 목장은 아니었고요.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 아마도 제 기억엔 우리 행복한 모임 성도님들 연세쯤 되시는 목장에 저를 파송을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사무실을 같이 쓰는 전도사님, 여전도사님께서 "아이고, 가서 사랑 많이 받겠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요. 가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우니까 사진은 좀 내려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네. 예. 사진이 안 내려가나요? 네. 예. 저희 목장에 제일 막내 성도님께서 77세셨습니다. 첫째 언니 성도님이 83세셨어요. 딱 우리 행복한 모임 성도님들 연세였습니다. 근데 제가 그때 24살이었으니까, 그분들이 볼 때 얼마나 그냥 아기 같았겠습니까? 근데도 제가 방문을 하면, 집집마다 방문을 하는 시기였어요. 방문을 하면 어떤 가정이든지 꼭 두꺼운 방석을 깔고, "아이고, 우리 전도사님 오셨다"고, "우리 전도사님 오셨다"고 여기 앉으시라고 하시는 거예요. 겨울에야 따뜻해서 너무 좋았지만, 여름에도 꼭 그 두꺼운 방석을 이렇게 깔아 주시더라고요. 뭐 식사 하셨냐고 물어보시면서, 모임이 항상 2시였거든요. 꼭 점심 시간이 겹쳐 있었어요. 근데 항상 가면은 또 식사 준비하시랴 이런 게 부담되실까 봐 제가 밥을 먹고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임에 가서 "오늘은 제가 밥을 먹고 왔어요"라고 이야기를 드렸더니, 모임이 탁 끝나고 한 3시쯤 되니까 예배를 드리고 3시쯤 되니까 저녁 드셔야죠 하면서 3시에 저녁을 준비를 하시더라고요. "아우, 젊은 사람이 뭐 돌도 씹어서 소화시킬 나이에 못 먹냐"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기 나오시는 성도님들 중에서 초신자 성도님들도 굉장히 많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는데, [콧방귀]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걸 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 성도님들이 저에게 아론과 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어설프게 칼을 들고 르비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던 여호수아였고, 저를 세워 주시고 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물론 이렇게 큰 목사, 작은 목사 이런 건 없지만, 꼭 항상 그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아유, 큰 목사님 되라고." 저는 이미 뭐 키가 다 컸는데, 얼마나 더 크라고 하는지, 큰 목사님 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또 그 성도님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전쟁의 깃발과 여호와 니시라
설교자는 출애굽기 17장 15절의 "그 이름을 여호와 니시라 하고"를 함께 읽으며, 여호와 니시라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임을 풀어 줍니다. 옛날 전쟁에서 깃발은 군대가 모이는 중심이었기에, 깃발이 서 있으면 군대가 버티고 깃발이 쓰러지면 군대가 쓰러졌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모세가 이 승리가 자신의 힘도, 아론과 훌의 도움도 아니라 하나님이 깃발이 되셨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팔이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순간에도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든 손을 드는 일 자체가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믿음의 선포였다고 짚으며, 이를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적용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단어인 깃발은 우리의 승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라고 전합니다.
이원희 · 2026-10-21
설교 내 7–7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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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 단어는 깃발입니다. 여호와 니시라. 출애굽기 17장 15절 말씀 밑에 있는 말씀 함께 읽을까요? 시작. "그 이름을 여호와 니시라 하고." 아멘. 여러분, 여호와 니시라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전쟁에서 깃발은 군대가 모이는 중심이었습니다. 깃발로 표시를 하는 것이죠. 깃발이 서 있으면 군대가 버티고, 깃발이 쓰러지면 군대가 쓰러졌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긴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아론과 훌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깃발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팔이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그 순간에도 결국 승리를 가져다 주신 분은 누구라는 것이죠?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권사님이 초청한 편모 가정 모녀의 변화
설교자는 지난 주일 세대 축제 때 만난 한 권사님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권사님은 예배에 참석한 설교자를 보고 급히 달려와 편모 가정의 엄마와 딸을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설교자는 상황을 들은 뒤 두 사람을 만나 기도했고, 딸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 뒤 권사님과도 함께 기도했으며, 그날 오후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문자에는 자매가 3주 전부터 교회에 나와 치유와 회복을 얻고 있다는 말과 함께, 딸이 왕따로 힘들어했고 치료 센터도 효과가 없어 그만두려 한다는 사정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딸의 얼굴이 밝아지고 웃음을 되찾았으며, 교회에 대한 호의와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마음이 생겼다고 전해졌습니다. 설교자는 웃는 딸을 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지 생각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며, 그를 기다려 주는 마음, 위해 기도하는 마음,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설교자는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고 느꼈다고 나눕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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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시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난 주일 세제 때 만났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한 권사님이 예배를 오셨는데, 제가 있는 모습을 보고 막 뛰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분을 초청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편모 가정의 엄마와 딸이 함께 오는 과정이었습니다. 몇 가지 상황을 듣고 기다리다 엄마와 딸을 만났습니다. 딸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부모로부터 상황을 듣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고 나서 권사님과 함께 기도를 드렸고 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그 문자를 읽어드리면, "목사님,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매님은 20년 전 순원의 친정 언니로, 영육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라 3주 전부터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치유와 회복을 얻고 있습니다. 특성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딸도 여기 왔으면 해서 오늘 오게 되었습니다. 딸은 왕따로 힘들었고, 최근에는 중동 문제로 치료 센터를 다녔지만 효과가 없어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 후 얼굴이 밝아지고 웃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초청을 했기 때문에 초청자의 마음을 알잖아요. 예배 때 와서 하나님이 만져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교회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움을 겪고, 엄마의 마음이 위로받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갔을 때, 아이의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변화되었고, 대화를 나누며 그 웃는 얼굴을 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까 생각하니, 저 또한 마음이 포근해졌던 주일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다시 보며 위로를 받고 기뻐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참 거창한 일이 아니구나. 그분을 기다려 주는 마음, 그분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초청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와서 그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초대하고 사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브라보 시니어를 섬기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자녀의 신앙을 위해 오랫동래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대 축제에 좋은 자리가 있지만, 그 자리에 초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초청했음에도 거절당하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믿음을 가진 사람도 지칩니다. 누군가를 열심히 초청하려 노력하지만, 그분이 세대 축제 때 지쳐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대 축제를 보내고 오후에는 많은 분들이 초청자들과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며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낙담한 성도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또 기회가 있겠지만, "이번에 오지 않으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제 마음이 치졸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때로는 버티는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로 잡았습니다.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어떤 분들은 잘 산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떤 분들은 지금 견디고 있고, 버티고 있습니다. 버티는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봤을 때, 어머니의 한마디가 제 마음속에 박혔습니다. "하나님 없었으면 나 그때 죽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예수님,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 예배의 자리, 때로는 예배에 못 나오는 가나안 성도, 옛 추억, 찬양,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 찾아오는 생각은, "내가 지금 이 상태인데 누군가를 전도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본이 되지 않는 모습인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가자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이 떳떳하지 못한 것 같고, 믿음이 약한 것 같아 스스로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전서입니다. 2,000년 전 소아시아의 한 마을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일상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한 성도는 낮에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 앞에서는 웃으며 믿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도들을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2장 9절에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라고 극찬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믿음을 떨어뜨리는 이웃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신앙 상담을 받을 때, 내 믿음으로 설명하더라도 낙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포기하고 믿음을 포기하면 좋은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일일까?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왜 더 힘들어지는 걸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을 한 인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보면, 실루아노를 통해 기록된 내용 중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도 있고, 소아시아 교회에 이름 없이 믿음을 지키려 하며 갈등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때로는 오해를 받고, 선을 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잘 초청된 분들도 있지만, 전도 대상자 명단은 적게는 900명, 많게는 1,300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 오는 분은 주에 300명 내외입니다. 초청되지 못한 많은 분들에 대해 실망하고 넘어진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고백한 하나님의 붙드심
설교자는 어머니에게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견디셨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한마디로 "하나님 없었으면 나 그때 죽었다"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이 설교자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설교자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예수님, 내주하시는 성령, 예배의 자리, 찬양,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나눕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설교자는 믿음이 고난 가운데 사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는 적용을 전합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1–1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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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시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난 주일 세제 때 만났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한 권사님이 예배를 오셨는데, 제가 있는 모습을 보고 막 뛰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분을 초청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편모 가정의 엄마와 딸이 함께 오는 과정이었습니다. 몇 가지 상황을 듣고 기다리다 엄마와 딸을 만났습니다. 딸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부모로부터 상황을 듣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고 나서 권사님과 함께 기도를 드렸고 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그 문자를 읽어드리면, "목사님,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매님은 20년 전 순원의 친정 언니로, 영육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라 3주 전부터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치유와 회복을 얻고 있습니다. 특성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딸도 여기 왔으면 해서 오늘 오게 되었습니다. 딸은 왕따로 힘들었고, 최근에는 중동 문제로 치료 센터를 다녔지만 효과가 없어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 후 얼굴이 밝아지고 웃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초청을 했기 때문에 초청자의 마음을 알잖아요. 예배 때 와서 하나님이 만져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교회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움을 겪고, 엄마의 마음이 위로받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갔을 때, 아이의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변화되었고, 대화를 나누며 그 웃는 얼굴을 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까 생각하니, 저 또한 마음이 포근해졌던 주일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다시 보며 위로를 받고 기뻐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참 거창한 일이 아니구나. 그분을 기다려 주는 마음, 그분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초청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와서 그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초대하고 사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브라보 시니어를 섬기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자녀의 신앙을 위해 오랫동래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대 축제에 좋은 자리가 있지만, 그 자리에 초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초청했음에도 거절당하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믿음을 가진 사람도 지칩니다. 누군가를 열심히 초청하려 노력하지만, 그분이 세대 축제 때 지쳐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대 축제를 보내고 오후에는 많은 분들이 초청자들과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며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낙담한 성도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에 또 기회가 있겠지만, "이번에 오지 않으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제 마음이 치졸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때로는 버티는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을 "당신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습니까?"로 잡았습니다.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어떤 분들은 잘 산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떤 분들은 지금 견디고 있고, 버티고 있습니다. 버티는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봤을 때, 어머니의 한마디가 제 마음속에 박혔습니다. "하나님 없었으면 나 그때 죽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예수님,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 예배의 자리, 때로는 예배에 못 나오는 가나안 성도, 옛 추억, 찬양,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 찾아오는 생각은, "내가 지금 이 상태인데 누군가를 전도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본이 되지 않는 모습인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가자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이 떳떳하지 못한 것 같고, 믿음이 약한 것 같아 스스로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전서입니다. 2,000년 전 소아시아의 한 마을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일상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한 성도는 낮에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 앞에서는 웃으며 믿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도들을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2장 9절에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라고 극찬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믿음을 떨어뜨리는 이웃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신앙 상담을 받을 때, 내 믿음으로 설명하더라도 낙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포기하고 믿음을 포기하면 좋은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일일까?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왜 더 힘들어지는 걸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을 한 인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보면, 실루아노를 통해 기록된 내용 중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도 있고, 소아시아 교회에 이름 없이 믿음을 지키려 하며 갈등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때로는 오해를 받고, 선을 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세대 축제를 보내면서, 잘 초청된 분들도 있지만, 전도 대상자 명단은 적게는 900명, 많게는 1,300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 오는 분은 주에 300명 내외입니다. 초청되지 못한 많은 분들에 대해 실망하고 넘어진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십 년째 초청하는 지인의 낙심
설교자는 자신이 아는 한 분의 사례를 들려줍니다. 그분은 10년째 세대 축제에 참석해 왔고, 이번에도 친구 두 명을 데려왔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교회에 오지 않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오랜 시간 초청을 이어 온 그분의 낙심이 얼마나 클지 헤아립니다. 그러면서 초청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입을 열기 어려운 성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현실이 초청을 쉽지 않게 만든다는 점을 나누며, 그 자리에서 성도들이 느끼는 무게를 함께 살핍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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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내가 그 복음을 받아들었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전할 때도 동일하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강압도 없다. 다음 주일에 어떻게 밧줄로 묶어 데려오라는 말도 아니고, 이날 안 오면 끊는다거나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이 내 안에 장착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이 되어 장착된다면, 내가 가진 이 소망을 품은 복음을 누군가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때로는 그렇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때, 그 사람을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완벽해진 다음에 누군가를 초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온유와 두려움을 품고, 내가 애했던 것, 기다렸던 것, 기도했던 것, 메시지를 전달했던 모든 것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다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우리가 버티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을 행하는 것과 한 영혼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면, 첫 번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예수님의 존재이다. 18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겪는 고난이, 만약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는 고난이라면, 예수님의 고난이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본이 된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대의 축제를 앞두고 낙심하고 힘들 때, 하나님은 나의 고난과 아픔, 실족을 통해 한 생명이 하나님 앞으로 분명히 인도될 것을 믿는다. 예수님처럼 나의 고난도 사용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면 좋겠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리가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21절과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이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모든 권세 위에 높히 계신다고 말한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소망도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이 고난은 살 소망을 끊어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대의 축제를 보내면서, 정말 이렇게 초청되어 복음의 잔치, 천국의 잔치를 맛볼 수 있는 분들이 그 안에서 기쁨의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천국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간절히 초대하고 싶은데 왜 안 되는지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분은 10년째 축제에 참석했고, 친구 두 명을 이번에도 데려왔지만, 그분은 왜 모르겠는지 계속 오지 않는다. 그 낙심은 얼마나 큰가. 그 외에도 초청하고 싶은데 입도 뻥할 수 없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위로를 얻고 견디는 믿음의 소망을 바라보자. 그 소망은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도하셨고, 고난이 부활의 소망과 은혜로 이어졌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대의 축제 기간을 귀한 시간으로 보내길 바란다.
바울이 겪은 살 소망이 끊어질 만한 환난
설교자는 고린도후서 1장 8절을 인용하며 바울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힘에 겹도록 심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이 고난이 사람의 소망을 흔들 만큼 컸다는 점을 짚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9절에서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한 말씀을 나눕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그 고난의 목적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통해 낙심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소망을 바라보도록 권면합니다. 세대 축제를 앞둔 성도들에게도 그 소망이 견디는 힘이 된다고 적용합니다.
오경제 · 2026-10-21
설교 내 5–5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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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내가 그 복음을 받아들었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전할 때도 동일하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강압도 없다. 다음 주일에 어떻게 밧줄로 묶어 데려오라는 말도 아니고, 이날 안 오면 끊는다거나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이 내 안에 장착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이 되어 장착된다면, 내가 가진 이 소망을 품은 복음을 누군가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때로는 그렇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때, 그 사람을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완벽해진 다음에 누군가를 초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온유와 두려움을 품고, 내가 애했던 것, 기다렸던 것, 기도했던 것, 메시지를 전달했던 모든 것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다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우리가 버티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을 행하는 것과 한 영혼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면, 첫 번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예수님의 존재이다. 18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겪는 고난이, 만약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는 고난이라면, 예수님의 고난이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본이 된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대의 축제를 앞두고 낙심하고 힘들 때, 하나님은 나의 고난과 아픔, 실족을 통해 한 생명이 하나님 앞으로 분명히 인도될 것을 믿는다. 예수님처럼 나의 고난도 사용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면 좋겠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리가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21절과 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이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모든 권세 위에 높히 계신다고 말한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소망도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이 고난은 살 소망을 끊어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대의 축제를 보내면서, 정말 이렇게 초청되어 복음의 잔치, 천국의 잔치를 맛볼 수 있는 분들이 그 안에서 기쁨의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천국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간절히 초대하고 싶은데 왜 안 되는지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분은 10년째 축제에 참석했고, 친구 두 명을 이번에도 데려왔지만, 그분은 왜 모르겠는지 계속 오지 않는다. 그 낙심은 얼마나 큰가. 그 외에도 초청하고 싶은데 입도 뻥할 수 없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위로를 얻고 견디는 믿음의 소망을 바라보자. 그 소망은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도하셨고, 고난이 부활의 소망과 은혜로 이어졌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대의 축제 기간을 귀한 시간으로 보내길 바란다.
마이클 모랄레스 논문의 물 건너기 패턴
설교자는 이사야 43장 1~2절의 물 이미지를 설명하면서 마이클 모랄레스의 박사 논문 『성막의 예표』를 언급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모랄레스는 물을 지나 산으로 가서 예배하는 패턴을 보았습니다. 이 패턴은 창조 때 여호와께서 물을 모아 땅을 드러내시고 에덴산에서 예배받으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고 설명됩니다. 설교자는 이어서 홍수 이후 노아가 아라랏 산에 이르러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붉은 바다를 지나 시내 산에서 여호와를 경배하는 모습도 같은 흐름으로 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2절의 물과 강을 홍수, 붉은 바다, 요단강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해석은 물이 위협이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건너게 하시는 통로가 된다는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설교자는 이 구절이 미래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여지를 함께 남깁니다.
알렉스, 잼, 샘 · 2026-10-21
설교 내 24–24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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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그리고 다시 28절에 "나는 성소의 대제사장들을 더럽힐 것이며, 야곱을 완전한 멸망으로 넘기고 이스라엘을 수치로 넘기리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스라엘과 야곱이 22절부터 28절까지의 구절을 둘러싼 틀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창조"와 "형성"이 1절부터 7절까지의 구절을 둘러싼 틀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잘 따라오고 계신가요? 이 두 구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건가요? 네, 1절부터 7절에서는 이사야가 여호와께서 창조자이시며, 출애굽의 하나님 이시며, 새로운 출애굽과 유배에서의 귀환을 약속하신다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22절부터 28절에서는 이사야가 이전 언약의 제사들이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죄 많은 나라를 완전히 형벌하신 후 새로운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만족시키시고 새로운 언약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다음 구절은 8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 여호와께서 유일한 창조자이시며, 그 이전이나 이후에 아무도 없으며, 이스라엘을 자기 종으로 삼아 그분이 유일한 창조자이시고 구원자임을 증거하도록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43장 16절부터 21절까지의 구절과 대응됩니다.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출애굽을 이루셨고,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창조의 원래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내용은 43장 14절과 15절에 집중됩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물리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분은 유일한 창조자이시고 왕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네, 저는 이처럼 본절의 구조를 보고 있습니다. 응. 저는 1절부터 7절까지의 구절로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은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창조하신 이가 누구인가? 이는 바라(창조)라는 동사입니다. 이는 분명히 창세기 1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형성하신 이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아. 형성이라는 표현은 야사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땅의 흙에서 형성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사르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와 형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창조자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속량하였고, 너의 이름을 불러 불렀으며,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후 빛을 '낮'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렀다는 것도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그렇죠?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불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창조와 이름짓기는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속량자'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역사적 교훈이나 추상적인 신분 교훈을 주기 위해 창조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신분 위에 속량의 개념을 올려놓으시어, 속량이 새 창조와 같은 행위가 될 것임을 보여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구절 전반에서 이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언급하신 바와 같이 '창조'와 '형성'이라는 표현은 7절과 21절에서도 나타납니다. 21절에서는 "나는 나를 위해 형성한 백성이 나의 찬송을 선포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날 것이라는 맥락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자신의 신분을 회복시키시어, 속량이 새 창조의 행위가 될 것임을 보여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으키고자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응. 아멘. 창세기 15장 1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람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죠.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네. 저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람에게 소리치시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약간 다르지만, "여기 있나이다"라는 대답이 있습니다. 네. 이제 1절 중간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구절은 1절과 2절이 5절과 6절과 대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절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정확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속량하였고, 너의 이름을 불러 불렀으며, 너는 내 것이다"라고 1절 B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물 속을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강을 지날 때 그것들이 너를 넘치게 하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 물과 강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그렇습니다. 알렉스, 잘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아담이라고 불렀습니다. 네. [웃음] 저는 이 구절 때문에 아담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마이클 모랄레스의 박사 논문은 "성막의 예표"라는 제목입니다. 그는 물을 지나 산으로 가서 예배하는 패턴을 보았습니다. 창조 때, 여호와께서 물을 모아 땅을 드러내시고, 에덴산에서 예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