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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2 / 32쪽 · 한 쪽 20개

교회학교 교사직을 지킨 카터의 대답

설교자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무렵의 일화를 전합니다. 카터는 본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섬겼고, 이 소문을 듣고 기자들이 취재하러 몰려왔습니다. 한 기자가 대통령 당선자이니 교회학교 선생님은 그만두셔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카터는 교회학교 교사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백악관의 대통령직은 국민이 준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도 소중하지만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기자들에게도 다음 주에 본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이 대답을 통해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세상에서 받은 직분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우선순위를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19–19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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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신앙이 참 또 어, 돈독한 사람이에요. 어, 대통령이 [목을 가다듬음] 되고 나서 [콧방귀] 당선되었을 때, 이분이 어, 대통령 되기 그 전이라도 자기 섬기는 교회에서 얼마나 어, 성실하냐. 교회학교 교사를 하는데 한 주간도 안 빠지고, 자기 본교회를 섬기면서 아이들 신발을 챙겨 주고 뭐 너무너무 성실하게 하는 거예요. 그 소문이 났어. 그래서 기자들이 몰려가 가지고, 어, 카터가 본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그런 거 다 취재하고 [웃음] 그래서 물어봤다 그래요. 당선, 당선 딱 되고 취임하기 전에, 어, 그래 가지고 이제는 그 대통령이 당선됐으니까, 어, 그 카터, 어, 당선자께서는 앞으로는 [콧방귀] 교회학교 선생님은 어, 그만두셔야 되겠네요. 이렇게 물었다는 거야. 어, 계속하는 겁니까? 어떻게 한번 물어보니까, 카터의 대답이 뭐냐? 교회학교 교사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나를 백악관의 대통령으로 세운 것은 국민이 주신 거다. 그러니까 국민도 소중하지만 내게 하나님이 더 소중합니다. 그 기자 여러분도 다음 주에 본교회에 가서 예배드리세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날 찾아오지 말고. 그 유명한 말이에요. 그 말도 당신들도 본교회에 가서 잘 섬기시라,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카터의 퇴임 후 집짓기 봉사

설교자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의 삶을 소개합니다. 카터는 임기가 끝난 뒤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집짓기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망치와 못주머니를 차고 직접 목공일을 하며 경량 목구조 집을 짓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가 앞장서자 후원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수많은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카터가 대통령 재임 때보다 물러난 뒤에 더 큰 칭송을 받으며 살았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통해 자리보다 맡은 일을 더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보여 준 사례로 소개하며,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서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적용으로 삼습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21–21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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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그 이후에 그 사람 뭘 했냐면요. 그 [목을 가다듬음] 그 집짓기 운동,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실제로 그 망치와 못주머니를 차고, 어, 우리 그 목구조, 경량 목구조, 어, 집 짓는 거, 그런 걸요, 거의 그 많이 하고, 직접 목공일을 하고, 어, 또 그 운동을 그리 하니까 카터가 앞장서니까 후원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 수많은 집을 지어 주고, 그래서 어, 대통령 재임 기간 때보다 어, 물러나 가지고 어, 더 칭송을 받고 그렇게 살았다. 이제 얼마 전에 한 100살쯤 살아가면서 돌아가셨을 거예요. [콧방귀]

공수특전단 출신 목사의 목숨 건 사역

설교자는 대전에 있는 동행침례교회의 목사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목사님은 공수특전단 출신으로, 목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임한다고 합니다. 공수특전단원들이 늘 목숨을 걸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듯, 그 목사님은 죽기 살기로 사역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면 목숨을 걸고 전하겠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평소 하던 일에도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짚으며, 이 사례를 통해 최선을 다하는 신앙이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맡은 말씀 앞에서 대충 하지 않는 마음을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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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살기로 목숨을 걸고 대전에 가면은 동행침례교회라는 교회가 있어요. 어, 그 목사님이 공수특전단 출신인데, 어, 목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목숨을 걸어놓고 한다. 죽기 살기로 한다. 공수특전단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어, 비행기를 [목을 가다듬음] 타고 뛰어내리고 이제 그렇게 하잖아요. 보통 항상 목숨을 거는 그런 일에도 목숨을 걸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면은 내가 목숨을 걸고 전하겠다. [콧방귀] 그런 분도 있습니다. [목을 가다듬음]

아켈라오의 왕위 청원과 유대인 사절단

설교자는 누가복음 19장 비유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연을 설명합니다. 헤롯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아켈라오는 성전에서 예배하던 사람 약 3,000명을 죽인 적이 있을 만큼 악한 인물이었다고 설명됩니다. 그가 로마에 가 있는 사이 유대인들은 사절단을 보내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면 안 된다고 황제에게 간청했습니다. 사절단 50명이 로비를 하며 황제를 설득한 결과, 아켈라오는 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리는 분봉왕의 권한만 받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다 아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비유 배경에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청중에게는 익숙한 사건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26–26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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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 한 4년 경인데, BC 4년경에, 예수님은 그때, 사, 지금 그 1926년 전에 예수님이 온 게 아니고, 실제는 그보다 조금 전에 왔어요. 우리가 아는 연도는 한 4년 정도 차이가 나 있는 거예요. 그때 헤롯이 이제 죽었잖아요. 어, 헤롯이 죽고, 어, 헤롯의 아들 중에 아켈라오라는 사람이 있어. 아켈라오. 어, 헤롯의 장자였는데, 이 아켈라오가 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로마로 갑니다. 로마로 가서 로마로부터, 어, 유대인의 왕으로 그 인준을 받아와야 돼. 그래 갔는데, 아켈라오가 못 했어요. 어, 자기 아버지는 그래도 못돼도 어, 물러설 때 다가설 때 알고 외교도 하고 뭐 그런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 아주 [콧방귀] 악하지만은 그래도 센스가 있어요. 헤롯 대왕이라는 사람이. 근데 이 아켈라오 녀석은요, 못된 게 도를 넘었어요. 그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한 3,000명쯤 때 죽인 적이 있어. 아켈라오가. 그 그런 못된 놈이라. 그런데 어, 로마에 [목을 가다듬음] 가서 황제, 로마 초대 황제 아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서, 어, 왕으로 지명을 받아오려고 간 거라. 갔는데 유대인들이요, 그 뒤에 아켈라오가 떠난 걸 알고 [콧방귀] 유대인 회의에서 그 사절단을 보내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목을 가다듬음]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가지고, 아켈라오 이놈은 천하에 못된 놈이기 때문에 절대 우리 유대인 왕이 되면 안 된다고. 그래서 로비를 하고 해 가지고 사절단을 50명을 보냅니다. 그래서 [콧방귀] 사정을 이야기하고 간청하여, 50명이 가서 황제를 잘 설득해 가지고 왕이 안 됐어. 왕은 안 되고 분봉왕, 통치는 유대와 사마리아, 어,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그 세 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 권한은 주지만, 왕으로는 책봉이 안 됩니다. 그래 돌아와 가지고, 그 유대인들도 얼마나 포악하게 자기 왕 되지 못하게 사절단 보냈다 해 가지고 어, 난리입니다.

벼 쭉정이와 서리 피해 이야기

설교자는 가을 추수철의 벼 이야기로 본문의 적용을 풀어 갑니다. 올해 어떤 지역은 타작을 해 보니 알이 여물지 않고 쭉정이가 너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벼는 쌀이 부서지고 맛도 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어릴 적 기억도 꺼내는데, 추석이 지나고 9월에 서리가 내려 벼가 하룻밤, 이틀 밤 사이 하얗게 말라 알이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품종 개량과 기후 변화로 서리 피해가 거의 없지만, 이삭이 필 때 수정이 잘 안 되면 멀쩡해 보이던 벼도 쭉정이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어 예수님의 '알곡은 곳간에 드리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큰 죄를 짓지 않아도 열매 없이 쭉정이처럼 살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37–39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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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번에 이제 지금 때가 가을이잖아요. 그리고 어 [목을 가다듬음] 올해 풍년인 줄 알았는데, 어떤 지역은 벼를 베어 가지고 타작을 합니까? 알이 안 나와. 쭉정이가 너무 많은 거예요. 알이 여물지 않았어요. 여러분, 그런 벼를 도정해 가지고 쌀을 보면, 쌀도 그 허옇게, 그 쪽 뚝뚝 부러진 싸라기 쌀이라 그러는데, [콧방귀] 맛도 없고 밥맛도 없고 그래요. 그 쌀이, 잘 [한숨] 여문 그런 벼알이라야 쌀도 깨끗하고 맛도 좋고 그런데, 제대로 소출도 안 나면요, 쌀 양만 줄어든 게 아니고 질도 떨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름에는 [목을 가다듬음] 잘 몰라. 이파리가 시퍼면 뭐, 가을이 되면 열매가 어 달리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 [목을 가다듬음] 요즘은 [콧방귀] 벼 품종을 개량해 가지고 되게 뭐, 일찍 어, 연기 때문에 서리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해요. 근데 우리 때만 해도,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어, 벼가 아, 추석에도 이제 겨우 머리를 내밀고 막 이렇게 하는데, 추석 지나고 한 9월 얼마 될 때 자고 났더니 서리가 와 버려. 서리를 맞아 버리면요, 벼가 자꾸 하룻밤, 이틀 밤 자면 하얗게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벼 이삭을 보면 알이 없는 거예요. 그 옛날에 아키바레라든지 음음방주라든지 이런 품종이 있는데 굉장히 밥이 맛있어요. 근데 아주 만생종이야. 늦게 여물어요. 이제 그러하다가 지금은 [목을 가다듬음] 어 기후 온난화 때문에 서리가 빨리 안 오기도 하고, 또 어 벼 품종을 개량을 해 가지고 조금 일찍 벼를 거두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은 어 벼가 이삭이 패어 오는데 서리 오는 그런 일은 뭐 거의 없긴 해요. 근데 어떻든 어 벼도요, 자세히 보면요. 꽃이 있습니다. 벼 이삭이 올라올 때 그 벼 껍질 옆에 보면요. [콧방귀] 아주 하얗고 조그만 꽃이 있어요. 달랑달랑달랑해요. 그 꽃 때 어 무슨 비가 오거나 어떻게 해 가지고 벼도 그 수정이 잘 안 돼 가지고 쭉정이 나와 버리면요. 그러면 멀쩡한 벼가 쌀이 별로 안 나오는 쭉정이가 돼 버려요. 올해 그런 이야기가 뉴스에 좀 나와요. 그 [목을 가다듬음] 벼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 전에 있었고, 오늘 보니까 어, 너무 허무하다.

본디오 빌라도의 실정과 손 씻는 이야기

설교자는 본디오 빌라도의 실정과 최후를 소개합니다. 빌라도는 성전의 돈을 수로 공사에 쓰는 일로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고,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건과 황금방패 사건 등으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산에 모세의 거룩한 기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에 모여들었을 때, 빌라도의 군인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전합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총독직에서 해임되어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을 때까지 자꾸 손을 씻었다고 전해집니다.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누가가 역사적 안목과 관점을 가지고 기록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노우호 · 2026-10-28

설교 내 49–50문단 · 예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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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이 날 것 같다고 하니까, 뭐, 나는 죄가 없다 하면서 손을 씻고 엉터리 재판을 해요. 그리고 그 뒤에, AD 36년경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또 무지막지하게 학살합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도 문제예요. 그리심산에 모세의 거룩한 기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내 가지고,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너무 많이 몰려가니까, 이것을 무장한 빌라도 군인들이 반란이 나는 것 아닌가 해서 초기에 진압을 해야 한다며 마구 죽여 버렸어요. 그래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당시 시리아 총독, 수리아 지방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라는 사람에게 고발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 중에서 더 높은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결국 빌라도를 총독직에서 해임하고 로마로 소환합니다. 이 사람도 어디 갈리아 지방인가 어딘가로 유배를 갔는데, 사람이 좀 이상해졌어요. 빌라도가 아침마다 자꾸 손을 씻는 거예요. 자기 손에 피가 묻었다고 그러면서 씻고 와서 또 닦고, 내 손에 왜 피가 있지 하면서 또 손을 씻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계속 손을 씻다가 죽었다는 거예요.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

설교자는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 드 보통이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보통은 현대 사회가 관계를 매마르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인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현실을 짚으며, 무슨 일을 하고 어디서 일하는지가 곧 정체성처럼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교회의 직분조차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얻은 것처럼 여기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이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의 의지와 열정으로 된 것인지 물으며,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밝힌 점을 보여 줍니다. 결국 설교자는 우리의 자리와 직분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왔음을 기억하라고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9–9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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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현대 사회의 특징을 뭐라고 말했냐면, 현대 사회는 서로의 관계를 불필요할 정도로 매마르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좀 어려운 말로 했는데, 그냥 우리가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무엇이냐면 "무슨 일을 하십니까?"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우리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 때마다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이며, 이때 인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졌다고 말하고 있죠. 여러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죠.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알랭 드 보통이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어디에서 일하십니까?"이며, 이때 인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졌죠.

강아지 캐니와 어린 시절의 사랑 이야기

설교자는 아홉 살, 열 살 무렵의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집에서는 털이 날린다는 이유로 강아지를 키우지 못하게 하셨지만, 옆집 1층 마당에 아저씨가 데려온 회색 큰 강아지 캐니를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캐니가 근본 없는 믹스견이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계단에 앉아 세 시간, 네 시간씩 캐니와 대화했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도시락 반찬으로 귀하던 오양맛살이 나오면 그는 반찬통을 다시 닫고 밥만 먹었다가, 학교가 끝나 집에 뛰어가 캐니에게 오양맛살을 부어 주었습니다. 캐니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10초 만에 다 먹어 치웠지만, 그는 그 모습이 너무 기뻤다고 회상합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줄 만큼 캐니를 사랑했다고 말하면서도, 캐니처럼 개가 되어 좁은 마당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 설교자는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비와 은혜인지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14–18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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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제가 아홉 살인가 열 살 때쯤에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었어요. 제가 막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절대 못 키우게 하셨어요. 털 날린다고요. [웃음] 집에서 털 날린다고 막 못 키우게 하셨어요. 제가 너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서,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저희 옆집, 저희 집이 2층이었는데 1층 마당에 그 아저씨께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회색 큰 강아지를. 이름이 케니였어요. 캐니. 제가 지금도 기억해요. 캐니. 얼마나 우리 둘이 친했는지. 와,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아홉 살, 열 살 나이에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를 못 키우는데, 바로 우리 집 옆에 붙어 있는 집, 우리 계단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 그 1층 마당에 캐니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아저씨께서. 제가 그 캐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학교가 끝나면 하루에 세 시간, 네 시간씩 거기 계단에 앉아서 캐니랑 대화했습니다. 진짜예요? 제가 세 시간씩 캐니랑 대화했어요. 캐니는 저한테 꼬리를 치고, 그 근본이 없는 개였거든요. [웃음] 옛날에 근본이 없는 개들 많았잖아요. 전형적인 근본이 없는 개였어요. 믹스견이었죠. 너무 좋아서 제가 진짜 너무 좋아했어요. 캐니를 학교가 없는 날, 토요일 같은 날은 정말 하루 종일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제가 캐니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그 당시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거든요. 그때 처음 나오기 시작한 반찬이 뭐였냐면 오양맛살이에요.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오양맛살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오면 너무 좋아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많이 싸 주시지도 않으셨어요. 가끔, 정말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오양맛살을 싸 주셨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왜 그 '오양'이란 회사가 가장 먼저 맞는 거 같아요. [웃음] 그래서 오양 마사이인 거야. 옛날에 오양 마사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개마사이'라지만. 기억하시죠? [웃음] 그 반찬을 제가 너무 좋아했어요. 아홉 살짜리, 열 살짜리가. 그런데 제가 캐니를 만난 이후로, 학교에 가서 도시락 반찬을 열었을 때 반찬통에 오양맛살이 있으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 아홉 살짜리가 반찬통을 다시 닫았어요. 캐니 주려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거니까 캐니도 좋아하겠지. 그래서 밥만 먹었어요. 밥만. 그래서 제가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려. 그래서 학교 끝나면 진짜 뛰어서 집으로 가고, 케니한테 그 반찬통을 열고 오양맛살을 막 부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캐니는 10초 컷입니다. 그 귀한 오양 마사를 나한테 고맙다 얘기도 안 하고 그냥 10초 안에 다 먹어요. 저는 그냥 그게 너무 기뻤어요. 케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게. 여러분, 아홉 살짜리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줄 정도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 강아지를. 여러분, 제가 그렇게 캐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그렇게 캐니를 사랑하고, 오양 마사를 줄 정도로, 하루 종일 세네 시간씩 앉아서 캐니랑 대화할 정도로 사랑했지만, 여러분, 저는 한 번도 캐니처럼 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였을지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겠죠. 저는 캐니를 제가 너무 사랑하는 존재지만, 여러분, 캐니처럼 개가 돼서 그 좁은 마당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1970년 미국 갤럽의 '고통의 의미' 설문

설교자는 1970년 미국 갤럽이 종교인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던진 질문을 소개합니다. 그 질문은 '고통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였고, 설교자는 이 문항을 만든 사람이 매우 생각이 깊었을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설교자는 우리 삶이 생물학적 삶의 전부라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가려는 이유도 결국 앞으로 예상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으며,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묻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이전에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던 사람이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게 된다고 적용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33–35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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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1970년도에 미국 갤럽에서 설문 조사를 했어요. 종교인과 종교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설문조사였죠. 제가 생각할 때 이 질문, 문항을 만든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정말 생각이 깊은 사람이에요. 갤럽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갤럽 역사상 가장 좋은 직원 중에 한 명이었을 것 같아요. 1970년도 미국 갤럽에서는 종교인과 종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종교인과 종교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고통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멋진 질문 같아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분간하기 위해 갤럽에서 만든 질문이,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생물학적 삶의 전부라면, 여러분, 딱 100세까지 살고 모든 생물학적 삶이 끝난다면 우리 삶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든 고통을 없애는 거죠. 없애는 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 좋은 직장에 가려는 이유, 우리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든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앞으로 예상될 고통들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줄여 보기 위한 노력들이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빨리 제거해야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과제죠.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내가 이 고통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 달려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가 기대되는 거잖아요. 내가 그동안은 사람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이 고통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도록 말이죠.

존 러스킨의 광고판과 산업 혁명의 균일성

설교자는 19세기 영국의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의 말을 소개합니다. 러스킨은 어떤 시대가 무엇에서 위로를 받는지 알고 싶다면 지평선에서 가장 커다란 대상을 찾아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고속도로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이 광고판이라고 짚으며, 광고판을 보면 그 시대가 무엇에서 위로를 얻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17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 대량 생산이었다고 말합니다. 산업 혁명 이후 모두가 같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같은 화장품을 바르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집에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균일성 안에 들어가면 '내가 다수 안에 속해 있구나' 하는 위로를 얻지만, 그 밖으로 나오면 실패처럼 느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광고와 산업계가 어떤 제품을 쓰고 무엇을 먹고 입고 사는지를 획일적으로 제시하며 이 균일성을 만들어 간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 여러분은 어디서 위로를 얻고 있는지, 혹시 여러분도 광고판과 같은 위로를 붙잡고 있지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설교자는 그 대안으로 예레미야애가 3장의 고백을 소개하며, 주님의 인자와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남득현 · 2026-10-28

설교 내 47–48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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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19세기 영국의 예술 평론가이자 지식인인 존 러스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술 평론가였는데, 이 러스킨이 뭐라고 말했냐면, 특정 시대가 무엇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어떤 시대가 무엇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지평선에서 가장 커다란 대상을 찾아보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특정 시대가 무엇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지 만약 알고 싶다면 지평선에서 가장 커다란 대상을 찾아보면 된다. 여러분, 지평선에서 가장 우리 눈에 커다랗게 보이는 게 무엇입니까? 고속도로에서 광고판입니다. 광고판은 광고판이에요. 어떤 시대가 무엇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광고판을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 17세기 후반에 산업 혁명이 일어났죠. 시작됐죠. 산업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량 생산입니다. 대량 생산.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모두가 같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모두가 같은 제품으로 화장품을 바르고,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모두가 같은 집에 살고, 이게 산업 혁명이 우리 삶에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 삶에 일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균일성입니다. 균일성. 여러분, 우리가 이 특정 균일성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됐죠. 아, 내가 다수 안에 속해 있구나. 거기서 나오면 무엇입니까? 실패처럼 만듭니다. 여러분, 광고와 이 산업계가 우리한테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죠.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 어떤 것을 하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그 균일성.

대양과 어린아이의 비유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끝이 없는 대양에 비유합니다. 대양의 가장자리에서는 어린아이도 물장구를 칠 수 있지만, 중심부 깊은 곳으로 나아가면 가장 거대한 대서양 정기선도 코르크나 거품처럼 작게 보입니다. 설교자는 그것이 끝없이 깊지만 여전히 같은 대양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그는 그리스도인이 처음에는 어린아이처럼 가장자리에서 물장구를 치기 시작하지만, 이 위대한 기도를 함께 살피며 더 깊은 곳으로 인도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 강력한 어구들이 하나하나 깊은 내용으로 가득하여, 몇 마디 말로 다 다루었다고 여기고 넘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멈추어 깊이 묵상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성도의 일이며 의무라고 권면합니다. 위대하고 깊은 진리를 다룰 때에는 오해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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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대한 기도가 쉽게 이해되거나 쉽게 풀이될 수 있다고 가정하거나 그런 척하는 것은 어리석고 헛된 일일 것입니다. 이 기도는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도록 의도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스도인의 메시지, 그리스도인의 복음은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대양에 비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대양의 가장자리에서 물장구를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부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면, 가장 거대한 대서양 정기선도 마치 코르크나 거품 같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같은 대양입니다.

1945년 웨일스 부흥회의 늙은 목사

설교자는 1945년 웨일스 부흥회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합니다. 이 부흥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성령의 세례를 경험했고, 그 과정에는 종종 큰 황홀감과 기쁨, 많은 찬양이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 가운데 일부는, 1859년 젊은 시절 비슷한 부흥을 경험했던 한 늙은 목사가 자신들이 누리는 황홀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꼈고, 찾아가서 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늙은 목사는 그들에게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아내와 여러 해를 사랑 가운데 함께 사는 것의 차이를 말했습니다. 처음의 황홀한 흥분은 계속되지 않지만, 그것이 사랑이 희미해졌다는 뜻은 아니며 흥분과 법석이 줄어든 것일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깊은 법칙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성령의 인침과 마음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에 적용합니다. 후자는 더 큰 사랑, 더 큰 지식, 더 큰 친밀함과 교제이지만, 첫 경험에서 거의 언제나 오는 짜릿한 전율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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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45년 웨일스의 부흥회 때 한 늙은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헛기침] 이 부흥 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고 있었고, 종종 큰 황홀감과 큰 기쁨과 많은 찬양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 중 일부는, 1859년 자신이 젊었을 때 비슷한 부흥을 경험했던 이 나이 든 목사님이 그들이 누리던 황홀한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자 꽤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찾아가 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한 말은 대략 이랬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 문제들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여보게, 그것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아내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사랑의 상태에서 사는 것의 차이라네." 그 처음의 황홀한 흥분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적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흥분이 적어진 것이고, 법석이 적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희미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더 깊은 법칙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로 나타난 신앙의 체험

설교자는 찬송 작가들이 단순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의 기쁨이신 예수여'라는 가사를 읽으며, 그분이 지금의 성도에게도 마음의 기쁨이신지 묻습니다. 찬송 속 고백처럼 이 땅이 주는 가장 좋은 복에서도 채워지지 못해 다시 주께 돌아가는 체험이 오늘의 성도에게도 참된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작사자들이 말씀을 읽고 그것이 자신에게 적용됨을 깨달아 구했고, 얻었으며, 그 결과로 이렇게 기록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 그분이 마음의 기쁨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30–30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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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이 찬송을 썼을 때, 그들은 자기가 말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들은 정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기쁨이신 예수여, 생명의 샘이시며 사람의 빛이신 주여, 이 땅이 주는 가장 좋은 복에서도 우리는 채워지지 못한 채 다시 주께 돌아가나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된 것입니까? 몇 곡 더 드리겠습니다. 다른 찬송을 보십시오. "예수여, 주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달콤함으로 가득 차나이다." 참됩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제 제 논점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말씀들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들이 자신에게 적용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구했고, 얻었고, 그 결과로 이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이 위대한 찬송을 들으십시오. 제가 이 찬송가 173번을 읽고 있습니다. 넷째 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먼저 셋째 절을 위하여, "오 모든 통회하는 마음의 소망이시며, 온유한 모든 이의 기쁨이신 이여, 넘어진 자들에게 주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지요, 찾는 자들에게 얼마나 선하신지요." 그러나 들으십시오, 그러나 찾은 자들은 어떠합니까? 아, 이것은 혀로도 붓으로도 다 나타낼 수 없습니다.

찰스 웨슬리의 고백

설교자는 18세기 찰스 웨슬리가 주저하지 않고 고백한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내가 원하는 전부이십니다. 당신 안에서 나는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찾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설교자는 앞서 12세기 저자를 인용했던 흐름을 이어 이제 18세기의 증언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거처를 정하신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청중에게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사실인지,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을 통해 교리적 동의만으로는 이런 고백에 이를 수 없음을 드러내고, 주님이 마음에 자리 잡으신 체험을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그는 이것을 이론이 아닌 체험의 말로 받아들이라고 강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34–34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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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그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주님이 한번 마음을 찾아오시면, 진리가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 빛남, 이 진리가 비추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고 자리를 잡으실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은 떠나고, 그때 신적인 사랑이 타오릅니다. 오, 우리는 돌아가서 이 말들을 읽고 깊이 생각해 봅시다. 찰스 웨슬리가 거기서 하는 말을 또 들어 봅시다. 제가 여러분에게 12세기의 한 저자를 인용해 왔는데, 이제 18세기로 오십시오. 찰스 웨슬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내가 원하는 전부이십니다. 당신 안에서 나는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찾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실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거처를 정하신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러더퍼드와 친첸도르프의 증언

설교자는 17세기 성도 사무엘 러더퍼드와 18세기 모라비아 교도 친첸도르프 백작을 함께 언급합니다. 그는 러더퍼드의 편지와 생애 기록을 읽어 보라고 권하며, 그의 체험 속에 두드러졌던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그는 러더퍼드가 엄격한 칼빈주의자였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했으며, 그분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묵상하기를 좋아했다고 설명합니다. 친첸도르프 백작도 자신에게는 한 가지 열정이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시며 오직 그분뿐이라고 말했다고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신학 학파의 사람들 가운데 이어져 온 흐름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이런 언어는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에베소 성도들도 믿고 성령의 인침을 받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분을 알지 못했기에 사도가 기도했던 것이라고 연결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35–35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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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도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성도 사무엘 러더퍼드입니다. 그의 편지들을 읽어 보십시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을 읽어 보십시오. 그의 체험 속에서 그토록 두드러졌던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이 요소를 읽어 보십시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였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러했습니다. 그는 그분을 알았고,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묵상하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것이 다양한 신학 학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여러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것을 발견한다고 말씀드립니다. 18세기 모라비아 교도인 친첸도르프 백작 같은 사람에게 가 보면, 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열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시며, 오직 그분뿐입니다. 아니요, 이것은 우리가 평균적이고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언어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고,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종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그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문으로 쫓겨난 자기 사랑

설교자는 자기 사랑을 집 안에 들어온 존재처럼 비유합니다. 앞문으로 쫓아내도 그것은 뒷문으로 들어오고, 창문으로 들어오며, 굴뚝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사랑을 버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며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싸움은 자아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혼자서는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들어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기를 버리고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하며, 사랑은 억지로 끌어올릴 수 없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분이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39–39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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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다소 어렵고 힘겹게 느껴진다면, 성령의 능력을 기억하고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싸움은 자아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제가 단독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앞문으로 그를 쫓아내면 그는 뒷문으로 들어옵니다.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굴뚝으로 내려옵니다. 어딘가로 들어옵니다. 아, 자기 사랑을 버리는 일의 어려움이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그곳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사랑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은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인으로서는 너무도 낯선 이 순수한 사랑을 위해 그분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치우는 일

설교자는 손님을 집에 머물게 할 때 사람들이 집을 치우기 시작하는 일상의 모습을 말합니다. 장소가 보기 좋기를 원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손님에게 무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만약 위대한 인물이 집에 머문다면 사람들은 노력을 배가하여 청소하고,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하며 장소를 궁전에 가깝게 만들려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 그분은 잠깐 방문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거처를 삼으시려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준비가 필요하며, 사도도 그것을 알았기에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준비가 쓰레기를 치우고, 자신을 깨끗하게 정결하게 하며, 육체를 죽이고, 그분을 근심하게 할 것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 2026-10-28

설교 내 41–41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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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를 강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제 일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고 애씁니다. 제 실패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여러분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것을 알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이 능력, 곧 속사람 안에서 이 힘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때, 그다음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죄와 죄성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 안의 추악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것을 하느냐 저것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본성 자체 안에 악이 있으며, 여러분은 육체를 죽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행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손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이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육체와 영을 정결하게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손님을 초대해 집에 머물게 할 때면, 여러분은 늘 집을 치우기 시작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장소가 보기 좋기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손님에게 무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한 완벽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손님에게 아주 섬세하고 정중한 찬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위대한 인물이 여러분 집에 머물러 오신다면, 여러분은 노력을 배가할 것입니다. 하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청소를 하고,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하고, 그 장소를 최대한 궁전에 가깝게 만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대한 인물이 여러분과 함께 머물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함께 생각해 온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려고 오시는 일입니다. 잠깐 방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거처를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준비가 필요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사도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강건해질 때, 우리는 행동합니다. 쓰레기를 치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할 것입니다. 육체를 죽일 것입니다. 그분과 어울리지 않거나 그분을 상하게 하거나 근심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할 것이라고 우리가 아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오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그분을 사모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믿음이 들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능성을 믿고, 그것이 실제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서 믿음으로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이 이미 오셨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실 때에는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달콤하고 형언할 수 없는 주님, 그 안에 모든 기쁨이 있나이다."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이 해로운 교리가, 제가 믿기로는,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방해해 왔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분을 들어오시게 했습니다. 제 믿음이 거기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런 언어를 쓸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분이 거기 거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안에 거하실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바나바가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소개함

설교자는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고 위협하던 사울이 회심한 뒤 예루살렘에 왔을 때의 상황을 먼저 설명합니다. 다메섹에서 사역한 직후 사울은 지도자들과 함께하려 했지만, 그들은 그가 제자가 된 것을 믿지 않고 두려워했습니다. 설교자는 교회를 안에서 무너뜨리려는 첩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걸 사람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위로의 아들 바나바가 사울에게서 은혜의 표지를 보았고,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설교자는 이 행동을 바나바가 사울의 보호자가 된 장면으로 풀이합니다. 그 결과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역이 꽃피었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헬라파 유대인들의 큰 반대를 만나 도시를 떠나야 했을 때에도 바나바는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설교자는 전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바나바가 이 사람을 위해 행동한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를 첫째 표지로 제시합니다. 성경적인 멘토는 젊은 지도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는 적용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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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경적인 지도자 육성자는 전도유망한 지도자를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서 가져왔을까요? 여러분은 9장 26절을 읽었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고 살기를 뿜으며 위협하던 사울이 회심했습니다. 영광입니다! 그가 회심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다메섹에서 사역한 직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지도자들과 함께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 그를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된 것을 믿지 아니하더라." 이 사람을 위해 나서 줄 사람이 있을까요? 교회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려고 잠입한 첩자인지도 모르는데, 자기 생명을 걸 사람이 있을까요? 이 사람에게서 은혜의 표지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 한 사람이 봅니다. 위로의 아들 바나바입니다.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는 사울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그의 사역은 꽃을 피웠고, 그는 자유롭게 여행하며 설교했습니다. 그러다 헬라파 유대인들에게서 큰 반대를 만나 도시를 떠나야 했고, 바나바가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나바가 이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첫째 표지입니다. 성경적인 멘토는 젊은 지도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합니다.

열 감지기와 비판의 양동이 비유

설교자는 멘토에게 은혜의 불씨를 알아보는 열 감지기가 있다고 비유합니다. 교회는 젊든 오래되었든 완전하지 않지만, 멘토는 그 안에서 새로운 상황에 들어갔을 때 불어서 살릴 수 있는 불씨를 찾아냅니다. 반대로 또 다른 유형의 사람에게는 비판의 양동이가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그 양동이는 축축하고 차가운 비판이어서, 그런 사람은 상황에 들어가도 감지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불완전함의 잿더미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불씨는 사그라듭니다. 설교자는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람은 은혜의 불꽃을 향해 따뜻한 눈과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두 태도의 차이가 지도자를 살리느냐 꺼뜨리느냐를 가른다는 메시지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6–6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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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경적인 멘토는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입니다. 11장 23절입니다. 상황을 아실 겁니다. 스데반의 박해 이후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이 교회는 이교도의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연합을 확보하고 몸을 보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그곳에 보내야 합니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요? 한 사람이 응답합니다. 바나바입니다. 그는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그를 보내자. 그래서 바나바가 떠나고, 그의 사역은 놀랍도록 성공적입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주님께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23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때 기뻐했습니다. 그는 보았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교회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젊은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교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멘토에게는 열 감지기가 있습니다. 멘토에게는 열 감지기가 있고, 그것을 세밀하게 조정하여 새로운 상황에 들어갔을 때 불어서 살릴 수 있는 은혜의 불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양동이가 있습니다. 비판의 양동이입니다. 축축하고 차가운 비판입니다. 그들은 상황에 들어가지만 감지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잿더미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함의 잿더미입니다. 그래서 불씨는 사그라듭니다.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불꽃을 향해 따뜻한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집니다. 제가 아는 이 은사의 가장 좋은 예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일리간 시에서 우리 선교사로 섬기는 밥 에스플린입니다. 그녀는 이전에 여기 와 있었고, 노엘과 저는 그저 놀라서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본 것을 이 여성에게서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모든 것을 제대로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은혜의 표지를 알아보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고방식을 복음 전도자, 설교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흔한 것과 대비해 보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고정된 채 보고, 그들의 특성 속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는 그 정적인 위기의 사고방식이 없어 보입니다. 무언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그래야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방식입니다. 이건... 그녀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그 대안은, 이것을 설명할 말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것일 것입니다.

에스플린 선교사의 은혜를 알아보는 눈

설교자는 필리핀 민다나오 일리간시에서 우리 선교사로 섬기는 에스플린 선교사를 실제 사례로 소개합니다. 설교자와 아내 노엘은 그녀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놀랐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은혜의 표지를 알아보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그녀에게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고정된 채 보는 정적인 위기의 사고방식이 없어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무언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 회심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방식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에스플린 선교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존재로 보면서도, 그들을 움직이고 과정 가운데 있는 존재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행하시는 여러 일들이 그들을 움직이고 준비시킨다고 여깁니다. 설교자는 그 모습에서 놀라운 소망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사람들을 바로잡으려는 성향을 내려놓고, 친절한 눈과 기쁜 마음으로 함께 들어가 그 불길을 부채질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8

설교 내 6–7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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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경적인 멘토는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입니다. 11장 23절입니다. 상황을 아실 겁니다. 스데반의 박해 이후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이 교회는 이교도의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연합을 확보하고 몸을 보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그곳에 보내야 합니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요? 한 사람이 응답합니다. 바나바입니다. 그는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그를 보내자. 그래서 바나바가 떠나고, 그의 사역은 놀랍도록 성공적입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주님께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23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때 기뻐했습니다. 그는 보았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교회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젊은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교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멘토에게는 열 감지기가 있습니다. 멘토에게는 열 감지기가 있고, 그것을 세밀하게 조정하여 새로운 상황에 들어갔을 때 불어서 살릴 수 있는 은혜의 불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양동이가 있습니다. 비판의 양동이입니다. 축축하고 차가운 비판입니다. 그들은 상황에 들어가지만 감지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잿더미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함의 잿더미입니다. 그래서 불씨는 사그라듭니다.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불꽃을 향해 따뜻한 눈과 기쁜 마음을 가집니다. 제가 아는 이 은사의 가장 좋은 예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일리간 시에서 우리 선교사로 섬기는 밥 에스플린입니다. 그녀는 이전에 여기 와 있었고, 노엘과 저는 그저 놀라서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본 것을 이 여성에게서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모든 것을 제대로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은혜의 표지를 알아보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고방식을 복음 전도자, 설교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흔한 것과 대비해 보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고정된 채 보고, 그들의 특성 속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는 그 정적인 위기의 사고방식이 없어 보입니다. 무언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그래야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방식입니다. 이건... 그녀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그 대안은, 이것을 설명할 말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것일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참으로 소외되어 있고 참으로 회심이 필요한 존재로 보지만, 정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더 역동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정되어 있거나 가만히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고 과정 가운데 있는 존재로 봅니다. 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행하시는 천 가지 다른 일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 일들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고, 드러내고, 확신하게 하고,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바브 에스플린이 말하는 모든 사람은 믿음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멀리 뒤처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저기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브 에스플린은 그들의 삶이나 그들의 삶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움직이는 은혜의 표지로 봅니다. 그가 전도에 대해 말할 때 놀라운 소망이 느껴집니다. 반면에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바로잡으려" 하는 성향이 아주 강합니다. 믿지 않고, 완고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둘러싸고 계셔서 그들을 움직이시고, 변화시키시고, 준비시키고 계신다고 보는 대신, 우리가 그들을 볼 때마다 친절한 눈과 기쁜 마음으로 그저 함께 들어가 그 불길을 부채질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