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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설교 속 이야기·일화·비유·인용을 모았습니다. 설교자의 설명을 요약한 내용이며, 원 설교의 맥락을 함께 확인해 주세요.

총 628개 · 6 / 32쪽 · 한 쪽 20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죽은 자의 경고

설교자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형제 다섯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증언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경고가 있어야 돌이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답합니다. 부자는 누군가 죽은 자에게서 가서 알려 준다면 회개하리라고 다시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정말 극적인 일을 보아야 믿겠다는 태도라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을 근거로 설교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어도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권함을 받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것이 이 시점까지 유대교가 보여 온 이야기이며, 메시아께서 살아나셔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1–22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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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습니까? 하늘이 신뢰하는 것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31절을 보십시오.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는 지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서 그들에게 특별한 경고를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성경이 있으니 성경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누군가 가서 정말 극적인 일을 보여 준다면 그제야 믿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이 시점까지 유대교가 보여 온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메시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도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보내진 예수님

설교자는 요한복음 18장 39절로 돌아가 예수님이 헤롯에게서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져 오신 장면을 그립니다. 그는 사람들이 우주의 창조주를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보내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길을 따라 보냈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모습입니다. 설교자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뺨을 맞고, 수염에 침 뱉음을 당하고, 옆구리를 걷어차이셨다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돌아오신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빌라도가 이 일에서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를 발견했다고 설명합니다.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로마 당국의 관례였습니다. 빌라도는 대답이 그렇다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달라고 외쳤다고 전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3–23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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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 설교 안에서 일곱 편쯤 듣고 계시는군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9절로 돌아가십시오. 빌라도가 “너희에게는 전례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헤롯에게서 다시 보내져 오셨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우주의 창조주를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보내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 보냈다가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뺨을 때리고, 수염에 침을 뱉고, 속이 뒤틀릴 만큼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그렇게 그분이 돌아오셨고, 다시 빌라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일에서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를 발견합니다. 유월절에는 로마 당국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이들에게 일종의 “그래, 잘한다”라는 선심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이 제발 그렇다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묻습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소리쳐 대답합니다. “아니오, 그 사람이 아닙니다! 바라바를 주시오!”

빌라도의 미신적 두려움과 중립의 불가능성

설교자는 빌라도가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정의를 행하고 싶은 일말의 마음과, 군중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형을 선고하기는 꺼려져서 예수님을 넘겨주어 채찍질하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설교자에 따르면 빌라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설교자는 그 점에서 빌라도가 우리 중 어떤 사람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립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마태복음의 기록이 빌라도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요약한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입 밖으로 말하지만 자기 마음을 향해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질문이 오늘 청중에게도 똑같이 남아 있다고 적용합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4–24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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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여기에 정의를 행하고 싶은 일말의 마음과, 군중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형을 선고하기는 꺼려져서, 예수님을 넘겨주어 채찍질하게 합니다. 본질적으로 빌라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중 어떤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가 깨닫는 것처럼, 중립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빌라도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요약합니다. 빌라도는 입 밖으로 말하지만 자기 마음을 향해 묻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열기 속에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

설교자는 열기 속에서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을 비유로 들어, 어려움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아닌 이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절실히 구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공개적으로 반응하라고 요청하지는 않겠다고 밝힙니다. 대신 함께 고개를 숙이고 마음으로 삶을 그리스도께 새롭게 드리자고 권합니다. 그는 청중이 그분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리기를 권면합니다. 이 비유는 시련 앞에서 쉽게 녹아내리지 않는 헌신을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알리스테어 벡 · 2026-10-26

설교 내 28–28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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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님께서 열기 속에 녹아 버리는 초콜릿 병정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 이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절실히 구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께 공개적으로 반응하시라고 요청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저와 함께 고개를 숙이면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께 새롭게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욥기 1장 하늘 법정의 사탄과 하나님

설교자는 욥기 1장의 하늘 장면을 먼저 소개합니다. 사탄이 여호와 앞에 나아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묻고, 하나님이 울타리를 걷어내면 욥이 주를 욕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조건으로 그의 소유물을 사탄의 손에 맡기십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이 어느 시대에나 해당하는 전형적인 상황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31절의 '사탄이 너희를 요구하였다'도 같은 상황일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를 해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하며, 그의 모든 능력은 허락받은 능력이라는 것이 설교자의 강조점입니다. 세상에 서로 동등한 두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이 말씀은 악한 세력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우리 시대에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6

설교 내 11–11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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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전지하신 사령관으로 그려 본 하나님

설교자는 하나님을 자기 군대를 승리로 이끄시는 전지하신 사령관에 비유합니다. 이 사령관의 목적은 무한한 지혜와 전략적 능력으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적을 단번에 짓밟지 않으시고, 진격하기도 하시고 물러서기도 하십니다. 물러서실 때 원수는 자기 안의 분노와 증오와 악을 감히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에게 성공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셔서 그 안의 교만과 폭력이 드러나 참모습이 보이게 하신다고 설교자는 설명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활동할 여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수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을 드러내며 일어나면 사람들은 선한 세력이 패배했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정확한 때에 하나님께서 치시고 모든 원수를 멸하실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전략적 능력이 나타나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한 하나님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메시지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완전한 때에 승리하신다는 확신을 전합니다.

존 파이퍼 · 2026-10-26

설교 내 14–14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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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을 이렇게 그려 봅니다. 자기 군대를 승리로 이끄시는 전지하신 사령관이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무한한 지혜와 전략적 능력으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적들을 짓밟아 버리시는 대신, 진격하기도 하시고 물러서기도 하십니다. 그분께서 물러서실 때 원수는 감히 자기 안의 모든 분노와 증오와 악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에게 성공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셔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교만과 폭력을 드러내게 하시고, 그것의 참모습이 보이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로 마지막을 이루실 완전한 때를 아십니다.

사탄의 커다란 체 이미지

설교자는 가장자리를 날카로운 철사로 연결한 커다란 사각형 체를 마음에 떠올립니다. 그 체의 구멍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고, 신자는 그 안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허락을 받아 신자를 욥에게 했던 것처럼 철사 위에서 흔들고 찢고 상처 입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믿음을 잃고 체 아래로 떨어져 사탄의 품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이 '그들의 믿음을 빼앗겠다, 예수님에게서 떠나 내 군대에 들어오게 하겠다'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체를 통과해 떨어질 수 없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구멍의 모양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한, 아무리 심하게 상처를 입어도 사탄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용합니다. 설교자는 시몬 베드로를 까부르는 일이 바로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시도라고 설명하며, 사탄이 노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비유는 믿음을 붙들고 있는 성도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드러내는 데 쓰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6

설교 내 18–18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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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사탄에게 커다란 체가 있습니다. 커다란 사각형 체인데, 가장자리를 날카로운 철사로 연결하여 그물처럼 만들었고, 그 구멍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 체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뿐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신자들을 그 안에 던져 넣을 허락을 받아, 욥에게 했던 것처럼 그 철사 위에서 흔들고 찢고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믿음을 잃고 체 아래로 떨어져 자기 품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빼앗겠다. 예수님에게서 떠나 내 군대에 들어오게 하겠다.”

농부와 사자로 그려진 사탄

설교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체를 든 농부의 모습과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에서 그린 우는 사자를 나란히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커다랗고 다루기 힘든 체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믿음을 털어 내려고 거듭 흔드는 농부로 사탄을 그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사탄을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사자로 묘사합니다. 설교자는 두 그림 가운데 통과할 수 없는 것과 물 수 없는 것이 하나씩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체는 믿음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사자도 믿음을 입에 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붙들면 사탄은 저지당하고 우리는 체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설교자는 요한일서 5장 4절의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를 인용하며, 사탄의 체와 입을 이기는 것도 믿음이라고 권면합니다. 이 두 그림은 사탄의 공격의 실체를 함께 보여 준다고 설교자는 정리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굳게 붙드는 것이 사탄을 막는 길이라는 것이 이 예화의 적용입니다.

존 파이퍼 · 2026-10-26

설교 내 21–2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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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서로 다른 두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커다랗고 다루기 힘든 체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믿음을 털어 내려고 거듭 흔들어 대는 농부의 모습으로 사탄을 그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사탄을 사자로 그립니다. 체를 통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고, 사자가 입에 물고 있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붙들면 사자는 저지당하고, 우리는 사탄의 체를 통과해 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사탄의 체를 이기고 사탄의 입을 이기는 것도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굳게 붙들면 사탄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본 예수 믿는 사람의 수

설교자는 1993년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받은 충격을 이야기합니다. 그곳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이스라엘 전체를 합쳐도 만 명이 안 되었으며 그마저 대부분 유대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예루살렘에서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하면서, 자신이 지리산에서 예수를 믿게 된 일을 돌아봅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이슬람, 로마 가톨릭, 정교회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한국의 교회에는 그런 구역 구분이 없다는 점도 언급합니다. 설교자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는 현실을 놀랍게 여기며, 보통 사람에 가까운 자신과 청중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큰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이 경험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17–18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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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저나 여러분은 보통 사람 정도밖에 안 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안 믿어요. 그것도 참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1993년도에 처음 예루살렘에 가서 받은 충격이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거의 없어요. 이스라엘 전체에 그 당시에 믿는 사람을 다 해 봐야 만 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고 대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한 만 명 정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참 어이없어하면서 “예루살렘에서도 못 믿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지리산에서 믿었나?” 했어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 구역이 있고, 이슬람 구역이 있고, 로마 가톨릭 구역이 있고, 정교회 구역이 있고,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요. 우리는 구역도 없어요.

진주 성경학교 시각 장애 강사 김선태 목사 이야기

설교자는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2년간 공부할 때 특강을 하러 온 김선태 목사를 소개합니다. 김 목사는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자신들이 눈으로 성경을 쓱 읽고 지나가는 것과 달리, 김 목사는 점자를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으며 정밀하게 읽고 생각하면서 기억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생활 속 모습이었습니다. 김 목사는 정전이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더듬지 않고 바로 꽂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자들에게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설교자는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실족이 거의 없고 듣는 것에도 민감한 모습을 보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듣고 깊이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적용합니다. 믿음은 보는 데서 나는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난다는 메시지가 이 예화를 통해 강조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20–22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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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진주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2년을 공부할 때 특강하는 강사가 오셨는데, 김선태라고 하는 목사예요. 김선태 목사가 시각 장애인인데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면, 아마 성경을 다 외우다시피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눈이 보이니까 그냥 쓱 읽어 지나가거든요. 이 사람들은 점자를 가지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으니까 굉장히 정밀하고 세밀하게 읽고, 생각하면서 읽어요. 눈이 안 보이니까 휙 지나가는 게 아니고 한 자를 더듬어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자기는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대요. 정전된 것이나 전기가 들어온 것이나 똑같으니까. 그래서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으나 자기는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해요. 얼마나 밝은 눈을 갖고 있느냐 하면, 착착 계단에 올라서 어디까지 몇 걸음 딱 가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탁 꽂아요. 요즘은 번호 키를 하지만 옛날에는 열쇠 구멍이 있잖아요. 거기에 바로 쏙 들어가는 거예요. 더듬지도 않고 착착 해요. 그래서 우리 보고 당신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눈을 갖고 있는데 자기는 점점 더 밝아지는 눈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정전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굉장히 촉각이 민감하고, 걸음도 우리보다 실족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세밀히 더듬어서 가니까요. 우리는 까불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빠지고 하는데, 이분은 범사에 조심조심하고 듣는 것도 굉장히 민감하게 듣는 거예요.

설교자의 어린 시절 학업 중단과 늦은 고등학교 진학

설교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며 처음에는 참 불행했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공부를 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고 그만두었고, 중학교도 중단했습니다. 그러다 스물아홉 살 때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열여섯 살에 가야 할 학교에 다른 사람보다 13년을 돌아서 간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나중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회에 나가 보니 하나님을 아는 동창이 몇 명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보다 나중에 조금 나아졌다고 느끼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중이 좋아졌다고 증언합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에 어려웠어도 끝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적용으로 연결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30–31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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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에 어렵다가 나중이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처음부터 시종일관 좋으면 제일 좋죠. 그런데 여기 처음에 잘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나부터 처음에 참 불행했어요. 너무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공부를 하다가 그만뒀거든요.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가다가 그만두고, 중학교도 그만두고, 그러고 나서 스물아홉 살 때 고등학교에 갔어요. 열여섯 살에 가야 되는데 스물아홉 살에 고등학교에 가니까 다른 사람보다 13년이나 둘러서 학교에 간 거예요. 그래도 나중에 동창회에 가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그럴 수 있는데 내가 볼 때는 내가 제일 잘된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의 잘 몰라요. 초등학교 동창, 중학교 동창들을 보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돼요. 초등학교 동창 중에 한두 사람, 중학교 동창 중에 한두 사람, 그게 다예요. 저도 어쩌면 처음보다 나중에 조금 나아졌지 않느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예수 믿고 정말 나중이 좋아졌다는 거예요.

이승만·박정희 등 끝이 좋지 않았던 한국 지도자들

설교자는 한국 현대사의 지도자들을 예로 들며 처음에는 잘하다가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의 유형을 설명합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차례로 언급하면서, 이들 모두 끝이 좋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런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며, 한국 사회에서 이 유형이 적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이 예화는 성경이 말하는 다섯 가지 유형 가운데 '처음에 잘하다 끝이 안 좋은 사람'을 설명하는 자리에 놓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인생의 마무리를 경계하고, 처음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적용을 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32–32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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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는 거꾸로예요. 처음에 잘하다가 끝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 중에도 꽤 많아요. 이승만도 끝이 안 좋았고, 박정희도 끝이 안 좋았고, 전두환도 끝이 안 좋았고, 노태우도 끝이 안 좋았고, 끝이 안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유럽 쇠퇴와 설교자가 본 명품 소비

설교자는 과거 유럽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약탈하고 수탈하여 부를 누렸지만,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그런 방식이 끝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유럽이 산업 혁명을 이루었다고 교만을 떨다가 디지털 시대를 준비하지 못했고, 스마트폰, 컴퓨터, 반도체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대신 명품과 사치품에 치중하다가 지금은 물건이 잘 팔리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이어서 자신이 명품을 직접 사 본 적은 없지만, 명품을 사면 기분이 좋은 것은 사흘 정도이고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모습을 통해 물질 중심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바른 준비와 겸손이 필요하다고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44–46문단 · 예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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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사람은 정말 태어날 때부터 젊어서 불행했고,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어요.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이 있어서 먹고살 만한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그 어려운 시대에 살아야 했어요.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데 얼마나 어렵겠어요? 지금 이 정도 발달된 세상에서도 먹고사는 문제로 얼마나 어려워합니까? 잘사는 영국에서도 500만 명이 때거리를 걱정한다는 거예요. 이탈리아라든지 스페인 같은 나라들이 동남아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옛날에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약탈하고 겁탈하고 강탈하고 수탈하고 늑탈하고, 그런 강도질을 해서 떵떵거리고 살다가 이제 그걸 못 하게 됐거든요. 이차 대전이 끝나면서 못 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제 다 써 먹고 나니까 그런 거예요. 우리 동양 사람들, 일본이나 한국이나 중국이나 이런 데는 계속 노력해서 제조업을 이만큼 해서 먹고살 만한데, 유럽은 우리가 산업 혁명을 일으켰다 어쩌고 하면서 교만을 떨다가 지금 갑자기 어려워진 거예요. 디지털 시대를 준비하지 못했고, 스마트폰 하나 만들지 못했고, 컴퓨터도 잘 만들지 못하고, 반도체도 못 하고, 계속 자동차 어쩌고 명품, 사치품 같은 걸 하다가 지금 안 팔리는 거예요. 명품을 사면 사흘 정도 기분이 좋아요. 그렇죠? 나는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사흘은 무슨 사흘, 찾으러 갈 때 그때 기분이 좋지.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래서 지금 유럽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극동방송 상담 프로그램의 박 집사

설교자는 창원에 살 때 극동방송에서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라는 생방송을 진행했던 일을 회고합니다. 전화로 질문을 받아 아나운서와 함께 대답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중 부산의 박 집사라는 분이 자주 전화를 걸었는데, 다른 청취자들이 한 가지를 물을 때 그는 두 가지를 묻고 질문 수준도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설교자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와 일순간 당황했고, 집에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니 틀린 대답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박 집사의 전화가 올 때면 긴장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박 집사가 점자로 성경을 한 자 한 자 손끝으로 더듬어 생각하며 공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이를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대충 읽고 지나가는 것과 대비하며, 세밀하게 읽는 태도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54–55문단 · 예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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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창원에 살 때 극동방송에서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라는 생방송을 했어요. 전화로 질문이 들어오면 아나운서와 같이 대답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부산에서 박 집사라는 분이, 이름은 잘 모르겠고 박 집사입니다, 전화를 해요. 그 사람은 꼭 다른 사람은 한 가지를 묻는데 질문 두 가지를 갖고 와요. 그리고 질문 수준이 제일 높아요. 정말 물어볼 만한 걸 묻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그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질문이 툭 나와서 일순간 당황했어요. 어떻게 둘러대고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까 틀린 대답은 아니었다, 그런 정도예요. 그 사람은 자주 전화가 오는데 그 사람 전화가 오면 내가 긴장이 돼요. 또 무슨 뾰족한 걸 물어서 나를 곤경에 빠뜨릴까? 왜 그러냐 하면,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 보니까 대충 읽고 지나가는데, 아까 말했듯 점자를 한 자 한 자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더듬으며 생각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이에요. 조금 잘못한 걸 또 더듬어 보고,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거예요.

여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설교자는 키가 작은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삭개오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거리에 사람이 나오기 전에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설교자는 우리 성경에 뽕나무라고 된 나무가 실제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설명하며, 여리고에서는 그 나무가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삭개오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위를 올려다보시며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고 이름을 부르셨고, 오늘 밤 그의 집에서 머무셔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놀라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집에 가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집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시자 등불을 켜고 손님을 맞았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설교자는 돈을 따라 살던 삭개오가 돈으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증거한 사례로 적용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65–73문단 · 예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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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에요. 뽕나무가 아니고 돌무화과나무인데, 여러분 무화과하고 뽕나무가 과가 같아요. 돌무화과, 야생 무화과나무인데, 여리고에 가면 지금도 그 나무인지 모르지만 굉장히 큽니다.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나무가 커요. 올라가서 나뭇잎 뒤에 싹 몸을 숨기고 그냥 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고 내가 본다, 보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이런 심리,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남아 있다는 건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거라고 봐요. 몸을 딱 숨기고 있는데, 왜 올라갔느냐 하면 키가 작아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이 지나가도 못 봐요. 길바닥에 있으면 못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람들이 에워싸고 앞에 가고 뒤에 가고 하니까 못 볼 것 같아서 자기가 나무에 올라가면 잘 보이죠. 그래서 보고 있는데, 보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제자와 어떤 여인들과 사람들이 좌편에 우편에 쭉 함께 갑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텐데, 삭개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도 안 깜빡이고 딱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밑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위를 쳐다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나는 삭개오가 오줌을 싸지 않았겠나 싶어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름을 덜컥 불러 봐요.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데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야 되겠다” 하십니다. 세상에, 나는 삭개오가 내려왔는지 후루룩 떨어졌는지 몰라요. 놀라서 막 떨어지지 않았겠나? 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야 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막 내려와서, 그때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을 거예요.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시지 이름을 딱 불러 버리면 어떡해요? 세리장은 그 마을에서 지역 유지급이나 되는데 나무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들통났잖아요. 그러나 그냥 상관이 없어요. 내려와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입니다. 앞을 봐요. 이제 예수님께서 잔치를 하시는데, 삭개오 집에 가 보니까 마당에 이끼가 끼어서 아무도 안 와요. 아무도 친구로 온 사람이 없어요. 그저 대문간에서 마당으로 가는 길만 조금 발자국 흔적이 있고, 화장실 가는 길 같은 게 있고, 사람이 아무도 안 와서 괴한 집처럼 되어 있어요. 모처럼 예수님이 오시니까 등불을 켜고 사람 사는 집 같아요. 키가 좀 작죠? 봐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는데 삭개오가 뭐라고 하느냐?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일단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것은 네 배씩 다 갚아 주겠습니다.” 토색했는가 봐요. 보나 마나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절반으로 토색한 것을 네 배 갚아 버리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내가 볼 때 별로 남는 게 없고 거덜 나는 거예요. 이제 예수님 때문에 쫄딱 망했어도 좋다는 거예요. 아무 친구 하나 없이 길에서 만나면 얼굴을 휙 돌려 버리던 삭개오에게 예수님만 오신 게 아니잖아요. 열두 사도도 왔어요. 지금은 마태 같은 세리를 제자로 받아 준 예언자 정도로 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열두 사도를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할 수 있었다, 이게 아무나 누리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일단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봐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한때 돈의 맘몬 귀신, 돈 귀신에 걸려 돈을 쫓아갔지만,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삭개오가 아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물처럼 낮은 데로 흐르는 노자의 상선약수

설교자는 노자와 장자를 따라간 사람들의 삶을 물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유교 문화가 죽기 살기로 경쟁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 남을 털어먹고 편히 사는 모습을 추구한다면, 노자와 장자를 따른 사람들은 높은 데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물이 구정물이든 흙탕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며, 바닥까지 내려가 정화되고 다시 맑은 물이 되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노자가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고 말한 '상선약수'가 바로 이러한 뜻이라고 소개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현대 사회와 대비시킵니다.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려는 이유가 높은 자가 되어 남들을 털어먹기 위함이 아니냐고 질문하며, 예수님께서 욕을 먹으면서도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낮아짐을 적용으로 제시합니다.

노우호 · 2026-10-25

설교 내 76–77문단 · 예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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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한 번 말씀드렸죠. 유교 문화라든지 오늘 현대 한국 문화라는 것은 죽기 살기로 경쟁해서 높은 데 올라가 남들 털어먹고 짜먹고 편하게 놀고먹는 것, 이런 걸 하잖아요. 반면에 유교가 아니고 도가 같은, 노자나 장자 같은 사람을 따라갔던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지 않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물처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면서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요. 여러분, 물을 봐요. “구정물은 안 돼, 흙탕물은 안 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물도 좋아요. 가져와라. 그리고는 바닥까지 가서 소금이 있는 데까지 가서 정화하고, 또다시 맑은 물로 비에 실어서 여기까지 가져오는 것을 봐요. 그래서 노자가 가장 고차원적인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상선약수라고 합니다. 물과 같이 온갖 이로움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거예요.

담임목사님께 로마서 한 주를 더 부탁하고 싶었던 주간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을 준비하면서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던 한 주를 떠올립니다. 이 장은 낯선 이름과 '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건축했다'는 기록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서, 이것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읽는 청중도 같은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짚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담임목사님께 전화를 드려 로마서를 한 주만 더 해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몇 번이라도 여쭙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장을 전부 다루어야 하는 부담 앞에서 웃음 섞인 어려움을 나눕니다. 이 이야기는 본문 자체가 재미없게 느껴지는 순간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이어지는 설교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5–5문단 · 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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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러분, 3장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장이 참 당황스럽습니다. 일단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들이 너무 많이 나와요. 게다가 더 당황스러운 것은 내용입니다. 3장은 다 그냥 이런 내용들입니다. 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건축했고, 그다음은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중수했고, 그다음은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중수했고. 저희는 시간상 5절까지만 읽었고 제가 오늘 3장을 전부 다 다룰 텐데, 5절 이후도 지금 잠깐 눈으로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다 그런 내용입니다. ‘이거 어떻게 설교하지?’ 담임목사님께 전화드려서 “진짜 로마서 한 주만 더 해 주시면 안 되냐”고 제가 몇 번이라도 여쭙고 싶었던 한 주였습니다.

제사장들이 낯선 성벽 공사에 나서다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1절에 나오는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제사장들이 양문과 근처 성벽을 건축했다는 기록에 주목합니다. 제사장들은 평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데 익숙했고, 성벽을 쌓고 성문을 만드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설프고 낯설었을 것이며, 서로 웃으면서 일을 했을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럼에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던 그들이 이 일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중에 제사장복을 입고 성문과 성벽을 성별할 때는 그 위엄이 드러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먼저 나서는 섬김의 자세를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7–7문단 · 예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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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1절을 보십시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양문, 제사에 쓰이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양문과 근처 성벽을 건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이 평소에 성문을 만들거나 성벽 쌓는 사람들은 아니었죠. 제사장이라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성벽을 쌓고 성문을 만드니까 얼마나 처음에는 어설펐겠어요? 낯설었겠어요. 그런 일에는 다들 젬병이었겠죠. 모범을 보이기 위해 팔은 걷어붙였지만 어쩔 수 없이 서투니까 자기들도 웃고 다른 사람들도 웃고 그렇게 했겠죠. 그래도 나중에 제사장복을 입고 성문과 성벽을 성별할 때는 또 얼마나 위엄이 있었겠습니까?

살룸과 그의 딸들이 함께 성벽을 중수하다

설교자는 느헤미야 3장 9절과 12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지방의 행정관들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던 르바야와, 다른 절반을 다스리던 살룸이 자기 도시의 성벽을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그중 살룸은 자기 딸들과 함께 성벽을 중수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에 띕니다. 설교자는 무너진 성벽을 쌓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떠올리며, 딸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다 여린 손을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는 이 모습을 자녀를 단기 선교사로 보낸 부모의 마음에 빗대어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9–9문단 · 예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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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살룸의 이야기는 더욱더 아름다운 면이 있어요. 12절 보십시오. 살룸이 누구와 함께 성벽을 중수했다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 딸들과 함께. 여러분, 무너진 성벽 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저도 딸 가진 아빠로서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이 딸이 무거운 돌을 옮기다가 그 여린 손에 상처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 아버지는 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던 거죠. 마치 자녀를 단기 선교사로 보낸 부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도시에서 찾아온 지도자들과 주민들

설교자는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주변 도시의 지도자들도 함께 참여했다고 소개합니다. 벧학게렘, 미스바, 벧술, 그일라 같은 유다 지방의 작은 도시들이 언급되며, 특히 벧술과 그일라는 예루살렘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리고, 기브온, 사노아 사람들은 지도자 없이도 공사에 나왔다는 점도 함께 짚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자기 도시의 성벽이 무너진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참여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이유를 그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교회를 돕는 모습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실 것이라고 적용합니다.

심원섭 · 2026-10-25

설교 내 10–11문단 · 예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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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예루살렘 행정관들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의 행정관들도 와서 이 성벽 쌓는 일을 도왔습니다. 다 유다 지방의 도시들이었는데 다 작은 소도시입니다. 14절에 벧학게렘, 15절과 19절에 나오는 미스바, 16절에 나오는 벧술. 참고로 이 벧술 지방에서 온 16절의 느헤미야는 우리가 아는 느헤미야와 동명이인입니다. 그리고 17절과 18절에 그일라, 다 유다 지방의 도시들이었어요. 특히 벧술과 그일라는 예루살렘에서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거기서부터 지도자들이 사람들과 함께 온 거죠. 심지어 2절에 여리고 사람들, 7절에 기브온 사람들, 13절에 사노아 사람들은 지도자가 없이도 참석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들이 사는 도시의 성벽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왜요?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았지만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일이면 함께하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보셨을까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교회가 교회를 도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보실까요?